March 06, 2017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바람 때문인지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꾸만 하이킹을 가자고 하는 필립을 보고는 거의 짜증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집중해서 작업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이킹이 작업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변을 늘어놓는다. 한편 산드라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 작업실 문을 두드리며 담배를 같이 피우자고 한다. 평소 같으면 넉살을 부리며 웃어넘겨 버렸을 일에도 신경질이 났다. 모두가 나를 방해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지 않겠다고,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작업에 집중하고 싶을 뿐인데, 행여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나를 인식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사실은 사교성이 떨어지는 것이 맞다. 남들보다 사교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인데도 사교적인 사람인 척 보이느라 노력한 날들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저 남들보다 비-사교적임을 인정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바람 소리가 이토록 클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창문을 닫아 놓고 있어도 바람이 만들어 내는 파도 소리가 쉴새 없이 들려온다. 파도는 어딘가 부딪쳐 사그라지지 못하고 쉴새 없이 일렁인다. 셀 수 없이 많은 파고가 솟구쳤다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마치 바람과 물의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듯 살벌하다. 한편 산을 넘어온 바람은 산정을 덮고 있던 얼음과 눈가루를 쓸어내고 전속력으로 절벽을 타고 내려온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 사이로, 거대한 바위틈을 지나며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장자가 말하듯, '하늘의 퉁소 소리'라 하기엔 너무 거칠고 또 무시무시하다. 문밖을 나서면 바람의 위세에 놀라 몸과 마음이 절로 움츠러든다. 이런 거대한 자연 속에서 매일 이렇게 거센 바람을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바람이 잦아들고 햇빛이 온화하게 비치는 날이면, 자연으로부터 외출을 허락받은 기분, 어쩌면 거의 용서받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엔 하늘을 향해 고맙습니다 절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고 거대한 도시로 떠나게 되는 것일까. 이곳에 오니,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오늘은 2월 17일에 보았던 바다를 그렸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느낌이 좋았고 수면 위의 물결이 아주 매끄럽게 느껴졌었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오후의 햇볕이 수면 위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수면에 반사되어 그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오늘의 바다는 어떨까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채비를 단단히 하고 해안가 바위로 올라가는데 하마터면 바람에 떠밀려 미끄러질 뻔했다. 파도는 거칠었다. 탁 트인 하늘 여기저기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풍랑이 솟구쳐올랐다. 솟아오른 파고는 바람에 잘게 부서져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이런 바다를 그릴 수 있을까. 이런 바람을 그릴 수 있을까. 어서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