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 하지만 조금은 더 여유로운 하루였다. 아무 계 획없는 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져, 오늘은 아침에 이런 저런 할일들을 열거하고 별 불만 없이 그것들을 잘 수행했다. 너무 자유롭게 하루 하루를 보내왔었던 것인지, 아주 작은 의무, 아주 미세한 압박, 스트레스도 마음에 도드라져 보이고, 금새 제거해야 할 무엇인 것처럼 여긴다. 계속 미뤄뒀던 그래픽 프로그램을 배우기 시작했고, 프랑스어 공부를 조금 했다. 그리고 스케치를 좀 해보았다.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건 없었지만, 습관을 만들어 나갈 수만 있다면,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처럼 하루를 몇몇 좋은 습관들로 채워나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에는 무심코 어머니를 찾아뵈러 형님 댁으로 갔다. 내심 어제 불편한기색을 보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집에는 어머니 혼자 계셨는데 차분하게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으셔서 다행이다. 이내 형님과 조카가 들어오고 형이 차려준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는 다같이 한강에 나갔다. 어머니의 보폭에 발을 맞추고 느릿느릿 걷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예쁜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다시 어머니와 형, 조카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와, 나는 따로 한시간 정도 다시 산책을 했다. 참 특별하지 않지만, 이정도면 충분하다 싶은 하루였다. 산책을 하며, 지금 만들어가는 생활, 내가 처음 일궈가는 생활 패턴을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고, 다시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단단해지기 위해, 당분간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 끌어들이고 또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래서 온통 혼돈으로 가득 찬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관계란 꼭 그래야만 할까. 그렇지 않은 관계도 가능할까. 정말 단단하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 건강하게 교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