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서예 수업 이학기가 시작되었다. 단산丹山 선생께서는 학기 말에 도서관 전시장에 작품을 걸어야 하니, 마음에 드는 글귀를 정해오라고 하셨다. 아직 깨우친 것도 얼마 없는데 무슨 작품인가- 싶으면서도 괜히 욕심이 났다. 지난 학기에는 스승께서 써주신 글귀 해사후소繪事後素 를 써봤으니, 이번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의반박解衣般礴 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다. 선생님도 ‘좋다, 조금 어려울 테지만 써보라’ 하신다. 안진경이 쓴 글자들로 모아 놓고 그냥 써본다.
해의반박은 ‘화가라면 그림을 그릴 때 옷깃을 풀어 헤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그려야 한다-‘는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 에 나오는 구절이다. 동양화 전공자라면, 학교에서 이런 글귀를 배우지 않더라도, 붓을 다룰 때 긴장하고 규칙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면 얼마나 초라한 필선이 나오는지를 알기에 어쩌면 ’긴장을 풀어야 한다‘ 는 것은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 같다. 체득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선긋기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호방한 필력을 갖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물과 먹을 머금은 기다란 붓을 움직여 세상 온갖 것들을 표현한다는, 그것도 망설임 없는 호방한 필치로 그려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거의 묘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해의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있겠지- 하며 다른 우물을 파는 데에 집중했던 것 같다.
사실 그림을 그릴때에 그렇게 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작가도 있지만, 다른 한편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험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내야 안심이 되는 작가도 있다. 그것은 서양이나 동양의 차이도 아니고 화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것 뿐이다. 해의반박 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그렇게 격의없이 옷깃을 풀어 헤치고 다리를 빧고 그릴 수 있기까지, 붓을 다루는데에 두려움과 긴장이 없을만큼 수련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있는 것일테다. 그래서 동양화가 어렵다… 하여간, 해의반박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언젠가 그런 태도로 붓을 휘휘 저어도 작품이 되는 그런 경지에 다다르고싶다-는 마음을 담아 서예 작품의 주제로 삼아본다.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강아지가 밤산책을 가자고 보챈다.
그래, 산책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