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정筆亭

인사동 동양한지에 가 보면 늘 선반 안쪽 구석에 한두 개씩 먼지를 잔뜩 이고 뒹굴고 있는 이것. 용도가 불분명하여 적당한 이름도 없이 그저 한지죽으로 불리우는 이것. 처음 보았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어느날 작업하다가 말고 이것의 쓰임이 번뜩 생각나 한달음에 가서 사왔다. 아니, 종이 몇 장 샀더니 그냥 가져가라 하신다. 이 종이 뭉치는 붓에 스민 수묵을 살짝 덜어내고 붓 매무새를 가다듬기에 그만인 도구이다. 면 소재의 행주는 금방 쉰내가 나고, 티슈나 화선지를 접어서 만든 종이 뭉치는 또 금새 축축해져서 못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수백 수천 번 붓을 가져다 대도 딱 적당한 만큼의 물만 가져가 주고, 먹은 물은 차곡차곡 제 몸에 담아 감당해 낸다. 잠시 쉴 때 붓을 올려두거나 세워두기도 좋아서 필산의 역할까지 훌륭히 수행한다. 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붓을 슥슥 닦아 낼 때마다 흡족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넘치게 쏟아내도 언제든 들어주는, 그러면서도 입이 무거운 사람, 언제든 찾아가 의지하고 싶은 그런 듬직한 사람이다. 장소로 비유하자면 먼 길 떠나는 이가 잠시 머물다 가는 정자와 같은 소담하고 편안한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 한지뭉치를 필정筆亭 이라 부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