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센느

걷다가 다시 생각한다. 


자연은 아름답다.
물과 나무와 바람이 아름답다. 
바람은 물을 밀어내 파도를 만들고 나무는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이 떨어져 물과 닿는다. 
물에 작은 파문이 일고 흐르는 물을 따라 점차 사라진다. 
이 흐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끊임없는 변화에 있다. 
늘 변화하는 것들, 빛에 색을 달리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인간이 만들어 낸 빛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하지만 인공의 사물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스스로 살지 못한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살아서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빛을 받는 존재이면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다. 
살아있는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이 그들 자신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몰두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말하는 이기의 마음과 달리,
내부를 바라보는 동시에 외부로도 열려있는 무엇이다. 
안으로는 생장에 모든 정성을 다하면서도, 바람, 비, 태풍과 번개와같은 천재지변을 받아들인다. 
그것에 뜻을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의미를 전할 수 없다고 아름다움이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예술이 거기에서 탄생한다.
아름다운 것을 알지만, 그 아름다움을 전할 길이 없어서, 
노래로, 그림으로, 글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있는 언어로 표현할 길을 찾고자 한다. 
그것이 예술가의 마음이다. 
모두 느낄 수 있고, 알 것 같지만
결코 표현되어 본 적 없는 것을 표현하는 자, 그들이 예술가이다. 
예술은 언어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자연에 머물 필요가 없다. 
예술-언어로 표현된 적 없는 무언가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 대상은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 
현대의 기괴한 예술은, 작가들이 기괴한 세계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의 언어적 표현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내부에서 촉발된 무한한 생명력
그리고 외부와 끝없이 반응하는 적응력
자연은 그 관계 속에서 감정이 없다. 무심하다.
무심함을 무정 또는 비정함 같은 단어와 연결지어 생각해서는 안된다. 
비인간이라는 단어는 인간적이지 않은 것일 뿐, 비-자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센느강에는 백조가 산다. 백조는 나에게 무심하다. 
염소도, 고양이도, 비둘기도 나에게 무심하다. 
길게 뻗은 자작나무들이 무심하게 바람결에 흔들리며
오로지 그들의 생장에만 관심을 두는 것처럼,
염소는 염소 나름대로, 고양이는 고양이 나름대로, 비둘기는 비둘기대로
자신의 시간을 산다.

인간만이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얻고자 하고
그들이 목격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에게 전하고싶어 쩔쩔 맨다.
인간은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무심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의식이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기게 만들고
자연의 일원이 아닌, '관찰하는 자'로 지위로 스스로를 추대했기 때문일까.
관찰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자연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분리되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자연과 인간을 다시 잇는 무언가. 신과 사람을 중매하던 샤먼처럼. 
그 경계에 서서 경계의 예술-언어를 만들고 싶다. 

예술가로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저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릴 뿐이에요. 저는 시위에도 나가지 않고, 기부하지도 않아요. 거리를 걷다 보면 너무 많은 목소리가 들려와요. 모두가 약자이고, 모두가 피해자인 듯 보여요. 나도 어쩌면 약자이고 피해자인걸요. 세상에 수많은 약자들 중 누구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어 줘야 하나요. 누가 더 약하고 힘이 없는지, 목록을 만들어 순위를 매기고 제일 아래에서부터 선택해야 하나요. 아니면, 나와 관련된 사람 중에서 도울 사람을 찾아야 하나요. 돈을 잃고, 일자리를 잃고, 터전을 잃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저도 그 세 가지를 잃어본 적 있지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따로 있답니다. 바로 아름다움이에요. 사람들이 잃어버린 건, 아름다움이에요.

돈 많은 기업가나 재벌들이 약자들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집도 아니고, 일자리도 아니고, 돈도 아니에요. 아름다움이에요. 기업은 더 많은 돈을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가기 위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느라 늘 혈안이 되어있죠. 이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아무도 그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을 테니까요. 기업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아름다움을 팔 수밖에 없어요. 종일 광고에 노출된 우리는 그래서, ‘지금 이대로의 우리는 아름답지 않다’는 얘기만 듣고 사는 셈이죠. 재벌들이 가난한 자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빼앗아가는 방식도 그와 비슷해요. 재벌들에게 아름다움은 곧 자신이 가진 ‘부富 ’예요. 자신이 믿는 것처럼, 부유함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더 큰 비용을 지출한답니다. 가난한 자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부를 공공연히 자랑하며, 가난한 자들이 가진 아름다움이 무가치한 것처럼 포장하기 바쁘죠. 기업가와 재벌들을 타도하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들이 더 많은 아름다움을 축적할 수 있게 해 주는 사회 시스템을 비난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어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상념과 갈등, 감정들을 숨기고 차단하는, 그래서 자신을 무디게 만들고 마는 사람들에게 저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요. 감정의 깊이를 더하고, 생각의 주름을 더욱 세밀하게 다듬는 데에 게으른 사람들에게 말이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식의, 떠도는 말을 이마에 방패막이처럼 붙여놓고서는 자신의 나태한 지성을 적당히 합리화해버리는 자들에게 말이죠. 기업가와 재벌들의 배가 점점 더 나오는 건, 그들이 거미줄처럼 쳐 놓은 가치망에 스스로 가치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을 마비시켜 내팽개쳐버린, 게으른 너희 우리 들 때문이라고 말이죠.

‘자기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때만 되면, 스님이나 심리학자들이 책 좀 팔아보려 힘들고 지친 현대인들을 다독여주려고 하는 그저 그런 말 같지만, 내가 말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에요. ‘아름다움’은 곧 ‘이야기’예요. 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자연스레 넘쳐나오는 물, 풍겨 나오는 향기와 같은 그런 이야기 말이죠. 그런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게 되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다 보면,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되죠. 자신이 느꼈던 어떤 복잡한 감정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번번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 안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지를 찾아내게 되죠. 이야기를 나누며 쌓이게 되는 우정과 사랑은 덤이고요 또한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합당한 표현 형식을 찾게 됩니다. ‘경험 속에서 깨달은 바를, 그에 합당한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순수한 형태의 예술표현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없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표현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깨달은 바, 즉 내면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원래 당신에게 있었던 무언가가 아닙니다. 발견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생겨나는 것이지요.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그려내는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릴 뿐입니다. 매일 훈련하듯 내면의 이야기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찾아낸 그 이야기 속에서 의미, 즉 아름다움을 발굴해 내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표현은 어찌 되어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저의 그림 속에서 제가 발굴해 낸 아름다움을 감상합니다. 그 아름다움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림에서 빠져나와 다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저의 그림에 표현된 것과 유사한 감정, 생각을 꺼내어 비교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름의 경험과 추억을 통해 그림을 이해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어 볼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음을, 아름다움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 외부로 향한 시선을 내부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끄럽게 외쳐대는 외부의 아름다움에 휩쓸리거나 기댈 필요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 절대적인 무엇이라 여겨졌던 아름다움의 기준에서 벗어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 행위를 통해 제가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로서 세상을 대하는 저의 태도입니다.

쉬운 화론

내가 그림에 사용하는 재료는 종이와 붓과 검은색 안료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이 재료들을 전통재료라 하기도 합니다. 종이는 지, 붓은 필, 검은색 안료는 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무엇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종이는 희고 안료는 검다'라는 것입니다. 흰 종이에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붓은 그리려는 형상에 알맞게 적당히 굵고 적당히 긴 것이면 족합니다.

붓에 검은색 안료를 묻혀 흰 종이에 바르면 선명하고 단단한 자국이 남습니다. 붓털에 힘을 주어 가느다란 검은 선을 긋기도 하고, 부드럽게 하여 넓은 면적을 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붓을 움직여 나타난 형상은 모호한 구석 없이 명쾌하고 간결합니다. 나는 그 느낌이 좋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붓을 잡은 내 손끝이 그리고자 하는 바로 그 길로 붓이 지나가 검은 자국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재료, 물질과 상호작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과 싸우거나 대결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용합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형상을 잘 그려낼 수 있는 재료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그리려는 형상은 사람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형상은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바라는 사람의 형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몸매의 특별하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을 특징으로 그립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려고 골격과 동세가 잘 보이는 검은 몸을 하고 있고, 특별하지 않은 얼굴을 그리려고 표정이 없는 얼굴을 그렸습니다. 즉, 특별하지 않은 몸을 가진 특별한 사람을 그립니다. 표현은 위에서 말한대로 검고 분명하고 명쾌한 형상이면 좋습니다.

사람의 형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에 관한 질문들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자연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의 감각과 경험, 기억을 동원합니다. 그러므로 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람이므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 관한 이야기, 즉 사람이라는 존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을 둘러싼 자연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즐겨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나에게 '나'라는 사건이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입으로 전해지고 몸짓으로 전해집니다. 또 글과 그림으로도 전해집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말로 전해져도 글로 읽혀져도 또 그림으로 보여져도 상관 없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져야 할 필연은 없습니다. 말로 전하면 좀 더 생생하게, 글로 전하면 좀 더 진지하게, 그림으로 전하면 좀 더 간편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전달이 편리하고 상황에 적절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개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