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이 진부하다고 여겨질때, 그 것이 고민스럽게 느껴지던 오래전 어느날- 자책을 거듭하다가 다다른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살짝 포장해서 한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내 삶을 좀 더 치열하게 끌어안지 못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진부하다. 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나 스스로가 진부해진 이유를 외부가 아닌 내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 점에 대해서는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포장을 살짝 풀어 보자면, 내가 내 삶 속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페이소스들에 좀더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관찰할 수 있다면- (혹은 그럴 여유가 있다면) 누군가와 그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감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진부하게 여겨진 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같은 펑션으로서 작용하진 않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진부함이란, 재미의 요소로서 다양한 사건, 사고의 부재를 의미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진부함이란, 그 어떤 기쁨과 희열의 부재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진부함이라는 것은 그 어떤 슬픈 감정들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특별히 고민할 것 없는 나날들엔 진부함 이라는 복병이 슬며시 나 여기있소 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이러니- (라는 단어는 '우울함'이라는 단어와 견줄 수 있을만큼 오래되고 진부해진 단어이지만-) 아이러니 한 것은, 젊은날 젊은 사람들이 만나서 자조적인 말투로 종종 털어놓곤 하는 그런 푸념 -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도데체,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다' 라는 말은 어쩌면 새빨간 (혹은 새하얀) 거짓말일 지도 모른 다는 것. 그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야 하는 이유' 가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내 삶이 내게있어서 진부해져 버리는 것을 못견뎌 하고, 은연중에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억지인)것이다.
글쎄 좀 억지스러운가?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분명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도 너무 분명해진다. 해야할 일이 분명해지면 삶은 너무 단순해진다. 마치 고3 수험생처럼- 정해진 목표에 이를 때 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누가 어떤 연애사건에 휘말렸건 말건 너무나 클리어하게 그 것에 다다르는 것에만 메달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고3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확고한 목표 따위를 누가 정해주진 않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어느정도 그 기간을 연장하거나 앞당길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기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당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나의 게으른 인생을 적당히 둘러대도 되고, 어쩌면 그 흐릿한 목표들을 평생 유보시켜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는 지경인 것이다. (글쎄 뭐 글을 쓰는 와중에도 여기저기 반박의 여지가 너무 많아서 좀 의기소침 해지긴 했지만, 그.. 그래도 )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분명한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은 꽤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기피할수 밖에 없는 그런 아이러니... (아 뭔가 멋있는 결론을 기대했지만, 대략 실패다 휘릭-)
잘은 몰라도 인류의 삼십삼퍼센트 정도는 특별히 원하는 것도 그닥 정해진 목표도 없지만 무감각하고 다소 게으르게 재미난 사건들과 더불어 잘 살아갈 것이고, 나머지 삼십삼퍼센트 정도는 확고하게 정해진 목표와 정해진 일정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적당히 성공을 좇으며 그에 따르는 것들에 만족하며 잘 살아갈 것이고, 나머지 삼십삼퍼센트 정도는 '똑같은 일상은 싫어-'라고 불평하면서도 금방 잊고 적당히, 그저 적당히 잘 살아갈 것이다. 구십구퍼센트는 얼레벌레 해결 된건가? 휴;
마지막, 나머지 일퍼센트 정도는- 진부해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페이소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폐인처럼 스스로 고통속을 허우적거리며 인류 예술사의 한획을 긋고 있거나, 전인류를 고통속에서 구제하기 위해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내가 마지막 일퍼센트랍시고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