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멸등 點滅燈

좌회전 신호대기중, 앞서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콘코오드 승용차가 보인다. 깜-빡 깜-빡 깜-빡 방향지시등은 아직 녹슨 기색없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내 오랜 메트로오 계기판에서도 귀엽게 따-깍 따-깍 거리며 이비트의 기계음이 들린다. 문득 앞차가 깜-빡 깜-빡 깜-빡 열한번쯤 깜빡이는 동안 나의 메트로오는 고작 아홉번쯤 따-깍 따-깍 따-깍 거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

처음에는 도저히 서로 같은 유격으로 깜빡거리기는 어려울 듯 느껴지다가도 슬며시 라디오헤드의 신보에서나 들을수 있는 불협한 엇박의 리듬을 만들고, 가만히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순간부터는 그 콘코오드와 나의 메트로오는 마치 오랫만에 만난 노년의 재즈 아티스트들 처럼 느리게 느리게 서로의 비트-를 맞추어 나간다. 애초에 서로 다르게 설계된 그들 일지라도 그 순간 만큼은 완전하게 교감하듯 그렇게 멋진 잼을 이룬다. 신호가 바뀌고 콘코오드가 먼저 떠난 그 텅빈 도로에서 나와 나의 메트로오는 잠시 황홀했던 그 잼콘서트를 잊을수 없어 악셀레이터를 밟는 것도 잊은 채 그자리에 서있다.

내가 열두번 슬퍼할때 네가 열세번 슬퍼하도록 고안되었다면, 우리 둘 사이의 각자 다 른 유격이 스치듯 교통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짧은 것일까. 금방 비틀어지다가도 조금만 기다리면 언젠가는 다시 같은 속도와 깊이의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좌회전 신호대기 시간 만큼의 짧은 여유만 가지고 있더라도 조금 더 쉽게 다시 만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누구가 너와 나를 같은 교차로에서 멈추고 출발하게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