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무덤 속에서

이틀 만에 가까워 졌던 친구로 부터 꽁꽁 숨어 버리는 나 자신을 보니 알겠고, 몇달 동안 연락하지 않던 이들에게 다시 연락하고 만나는 나 자신을 보니 알겠고, 일년 남짓 혼자 나와 살다가 다시 집에 들어와 부모님 곁에서 살아보니 알겠고, 이년 넘게 닫아 두었던 홈페이지를 다시 만들려고 생각 해보니 알겠고, 삼년 동안 쉬지않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출근해보니 알겠고, 점점 아래로 아래로 땅굴을 파고 숨으려고만 하는 나 자신을 알 것 같다. 아직 그 곳에서 기어나올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절실한 기분에 생각 없이 그랬을지 몰라도 어느순간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그 곳에서 외롭다며 외쳤을지 몰라도 어느순간 누군가가 꺼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그런 나 자신을 두려워했을지 몰라도 어느순간 그것이 더 편하고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것들을 알게 되고나니 나 이외에 그 어떤 누군가를 그 아래로 끌고 내려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 것 같다. 그 누군가를 끌고 내려오는 일은 쉽지만, 그를 다시 위로 올려 보낼 자신은 없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 곳의 압력과 밀도를 견딜 수 있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에

그 입구가 열려있는지 닫혀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다시 기어 올라갈 방법을 마련 해 두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누군가가 들어 설 공간은 있기나 한 것인지 이미 그 안에 침입자가 있거나 동료가 있는건 아닌지 그런 것들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무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일기 속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를 외로움에서 구출 해 주기 위한 나의 모든 뉘앙스는 그에게는 일종의 무례함이었다.<그건 누구에게나 그래, 나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어> 라고 나는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를 더 불쾌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진정한 고아로서 인정 받고싶어했고, 더 끔찍한 우수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말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그건 너의 생각일 뿐이야, 너는 완전히 미쳤어> 라는 식의 경멸을 더 듣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혼자서만 완전하고 절대적인 경지에 머물러 있다는 그의 착각을 애써 돕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허영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공감이라는 것조차 거절하는 그를 경멸한다. 누군가의 외로움 앞에서 그가 외로움에 떨고 있고 구출되길 바라고 있다고만 섣불리 가정 해서는 안된다. 더 잔인하게, 고아로서 인정받고 싶어하고 유배지 에서의 더 끔찍한 우수를 상상해주길 기대하는 부류의 인간도 분명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모두들 나를 좋아해- 라는 가정 속에서 사는 것 보다는
모두들 나를 싫어해- 라는 가정 속에서 사는 것이 좀 더 속 편하다고나 할까.
이런식. 이런 테라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