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 개인사를 한 편의 자전적 소설로 혹은 한 편의 성장영화로 번역 해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나의 생에서 포착할 수 있는 중심서사 혹은 시놉시스는 이러한 것들이다. "혼돈스러운 세계상 앞에서, 순수하게 독립 된 '자아'를 획득하고자 하는 21세기의 젊은 청춘의 고뇌! 스펙터클한 예술가의 삶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동경과 도전! 하지만 계속되는 방황과 시련. 과연 그는 전체성에 매몰된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 이외의 통속소설을 서 너 편 더 쓸 수 있을 만한, 번잡스런 고민들도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크게 보면 '개성있는 자아 획득'이라는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 본적이 없다.
개성있는 자아의 획득이 내게 중요한 이슈가 되는 이유는, 세계 내 존재로서 '나'라는 개체의 '존재감'이 (지금 내게) 부재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왠지모르게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존재론적 고민처럼 보이는 이 존재감의 문제는 때때로 허무주의적 감상과 한데 버무러져,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의미없는 존재'라는 식의 결론으로 귀결되어버리곤 한다. 그러한 니힐리즘적인 세계인식은 그 어떤 희망찬 기대나 생산적인 소망들에도 찬물을 끼얹는 듯한 비관적인 결말만을 예고한다. '내일은 없다' 인 것이다. 내일의 존폐 여부와 생존이 걸린, 바로 이 존재감의 문제에서 부터 '개성있는 자아'에 대한 요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개성있는 자아의 획득의 한 방편으로서 내게는 예술이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예술가로서 어떤 것이든 의미있는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그 '의미'를 세상에 발설함으로서 의미있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세계 속에 등단, 혹은 데뷰, 혹은 도킹하고 싶은 것, 그로서 '개성있는 자아'를 찾고 세상 속에서 '존재감'을 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20대를 살며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에 대한 해법이자 비전인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자면 마치 내가 미술대학을 택하기 이전, 즉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런 존재론적 고민들에 심취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그것은 물론 아니다. 1980년에 태어나서 칼라티브이를 통해 88년 서울올림픽을 보았고, 중산층의 자녀(한국전쟁 전후세대의 부모를 가진)로서 평범하게 자라온 나에게 예술가의 이미지란, '보이는 형상을 똑같이 잘 그리는 사람' 정도였다. '고흐의 잘린 귀'로 대변되는 천재적 예술가나 광기 등의 이미지는 그나마 최신의 것이었다.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은 물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한탄한 적은 없다. 온갖 종류의 돈버는 방법에 대한 비법서들만 난무했던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왔음에도, 유미주의적 이상과 낭만주의적 비전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고 그러한 삶을 현실화 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해 다행히 자부심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 생각 뿐이라는 냉소와 심심한 위로를 동반한 그런 자부심이긴 하나...
최근 일이년 전부터 그렇게 - 지금 생각해보면 - 낭만적이고 감상적이기만 한 이유로 예술가가 되어보자 라고 마음을 집어먹긴 했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과연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전근대적 예술가상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시작한 시점의 '고흐의 잘린 귀'에서 멈춘 감성으로, 근대를 뚫고나와 포스트모던에 합류한다는 것. 게다가 '동양화과'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전통의 계승-발전'이라는 숭고한 번뇌까지 스스로 짊어지게 된 운명 속에서. 과연 어떻게 헤쳐나가야만 하는가.
나는 이러한 '착한 모범생'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일전에 한 레포트에서 <'나'와 '세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현상학적인 고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해법을 스스로 내 놓은 적이 있다. 나와 세계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이라는 것은, 곧 '당대성 회복'의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당대성 획득이라는 것은 현 시대적 맥락과의 내가 서 있는 지점과의 시공간적 거리감을 파악하는 일이다. 또한 자신감 회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시공에서 방향감각을 잃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세계 인식의 부족은 이내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세계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게 되며 그렇게 버려진 영혼은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유배시킨다. 불합리에 무감각하며 불편부당함에 대해서 무관심해진다. 파악불가능한 자연-세계는 박약한 정신에게 공포이며, 그를 더더욱 내부로 숨어들게 하거나 도피하게만 만드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계속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 세계로부터 추방된 이방인의 이미지는 구현하고 싶은 유혹이기도 하다. 나약한 영혼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포착해 낼 만한 엄두가 나지 않는 현실-세계를 마주할때마다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하기 보다는 도피하는 것이 익숙하고, 늘 낯선 취향만을 탐미한다. 끊임없이 그 낯선 것들과 동질감을 얻으려 하고 자기 스스로가 날것의 신선함을 얻었다고 착각한다. 누군가에게 그 낯선 것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절망감을 느낀다. 부딪쳐야할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내면으로 숨어들거나 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며 본질을 왜곡한다.
그러한 태도는 때로는 정신병적 우울을 동반할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나 다다-에 대한 향수를 갖게 하기도 하여, 그러한 생방식이 어떤 생산적인 창작활동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탈주자의 다리는 늘 피로하고, 언제나 위로받고만 싶어진다.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과감한 배신과 탈주의 이미지는 자기 스스로가 마치 천재적 운명으로 태어나 전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스러져가야만 하는 숙명적 존재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내가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던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 지점은 지하로 몸을 끌어내리는 무덤이며 스스로를 잡아먹고 결국 극한의 영점으로만 달려가는 블랙홀이다. 그러한 타자 흉내내기-로는 애초에 상정했던 '존재감 획득'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는 결론에 이르렀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를 향해 웅크렸던 몸을 퉁겨서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 그렇다면 온전한 세계인식을 갖게하는 혜안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역사는 더이상 과거의 역사에서처럼 단선적 서사로 기술되지 못한다. 예전의 역사가 튼튼하게 다져진 일차원의 길 위에서 한발짝 한발짝 돌다디를 두드려보며 탐색할 수 있는 역사였다고 하면, 지금의 상황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삼차원의 그물망 속에서의 사차원의 시공간감을 획득해야 하는 다차원적인 상황인 것이다. 당대성의 획득이란, 그런 의미에서 나와 세계에 시공간적으로 벌어져 있는 간극을 인식하는 일이며, 그것은 타자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것이다. '자아'에 대한 시공간적 현실적 무게감은 그러한 균형감각 속에서 차츰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허우적 거리지 않고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세계라는 지형을 또렷이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세계 속의 '나'라는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그것을 예술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일도 가능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