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의 디테일

요즈음 우리의 화두는 <디테일>이다. 발단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해 ‘좋았어'라던가 '그냥 그래'라는 식의 밍밍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을 습관적으로 늘어놓는, 내 화법에 대한 친구의 불만섞인 충고에서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대상에서 디테일하게 표현해 낼 만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라며 불같이 항변했다. 원래 곧잘 글로 대상의 면면을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뭔가 대상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야하는 글과 달리 뭉뚱그려 애매하게하는식의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런 표현능력이 퇴화된 것 같다는 식의 변명도 곁들였다. 다음에는 대상 자체를 문제삼았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맛보는 대상의 표피적인 것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사고방식 자체를 뒤 흔들어놓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이 있는 대상이 아니고서는, 섬세하게 표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식의 이야기였다. 한번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분석해보기도 했다. 나는 작품을 창작할 때에 그 작품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관객과 대화하길 원하지 그 사이에 등장하여 왈가왈부 의견을 나누고싶지 않다. 작품 안에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에 대한 가능성이 모두 열려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작품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짓지 않지만 커다란 인상이나 느낌을 담는데에 집중한다. 그런 식의 표현을 추구하다보니 말로 생각을 표현할 때에도 완결된 생각이나 호불호가 분명한 감상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식의 장황한 해석이었다. 감상자의 입장에서도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있는 소설보다는 시를, 핵심만을 다루는 철학서들을 더 좋아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라 부연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 중심의 서양 근대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혹은 일원론/이원론에 갇혀있지 않은, 가타부타 호불호를 말하지 않는 도가적인 생각에 더 가까워지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나도 이렇게 되어버렸다-며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을 주문처럼 외며 변명하고 싶기도 했고, 비트겐슈타인의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를 인용하며 구구절절 언어 표현의 한계를 통탄해하며 감동적인 변명을 하고싶기도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이 모든 것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풍파에 견디다 못해 모난 부분을 스스로 깎고 다듬어야 했고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밋밋란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신세한탄을 하기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자책과 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계속해서 ‘재밌네’, ‘맛있다’, ‘좋다’는 식의 유아적인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고집한다’고 표현하기엔 굳게 버티어 지켜내야 할 신념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디테일한 생각들을 ‘게으름’에 대한 변명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표현에 있어서 디테일함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한 변명을 하다보니 변명의 디테일만 점점 늘어가는 형국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늘어놓은 다양한 변명들을 종합하다보면, 밍밍한 표현에 대한 일종의 새로운 미학을 정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