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길. 급하게 마주친 사람에게 걷어채듯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황망히 바람이 지나온 길을 바라보아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바람의 흔적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다. 멈추어 있음이란 그런 것. 정지해 있는 존재란, 오고 가는 것들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의 산증인이며 목격자이다.
증인은 말한다. ‘바람이 방금 내 왼뺨을 후려치고 지나갔소!’ 목격자는 말한다. ‘바람이 저 계단으로 올라와 난간을 뛰어 내려가는 것을 내가 보았소!’ 목격한 바를 증언하기 위한 존재는 피곤하다. 땅은 지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며, 하늘 아래 모든 존재는 그 어지럼증을 못 이겨 끊임없이 제 몸을 변화시킨다. 그것도 모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날아간다. 관망자는 그 모든 양태의 변이와 충돌과 운동을 지켜볼 뿐 스스로 바람이 되지는 못한다.
산책길에 멈춰 서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계속 멈춰 서 있어야 하는가, 계속 움직여야 하는가.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다른 모든 것들이 운동하고 있다면, 구태여 나까지 그 산란한 유동에 참여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람이 불 때 그것을 목격하면 나도 바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 돌진할 때, 멈추어 서 있으면 그들에게 나 역시 미친 듯 역행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도 잠시, 모처럼 산책 나온 길에 가만히 서 있기도 참 멋쩍은 일이다. 하며 하릴없이 발걸음을 아무 곳으로나 내디딘다. 인생의 중대한 깨달음은 이처럼 정신없이 내질러 가던 사람을 도중에 붙잡고 잠시 멈추게 하지만, 득도도 잠시, 그 ‘멋쩍은 기분’ 앞에서 또 겸연쩍어 어디론가 또 방향을 잡아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책길에 얻은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