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 세상 전체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가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찔한 기분 만이 아니라 형광등이 껌뻑이는 것처럼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오후. 창밖으로는 소풍나온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건너편 카페에서 매일같이 틀어놓는 유행하는 음악 따위만 들려올 뿐이다. 매일같이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보던 가족들도 요즈음은 나를 가만 내버려두는 눈치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가 일하던 회사에도 이젠 가지 않고, 요즈음엔 딱히 맡아서 하는 작업도 없지만, 한 두 달 생활할 만큼 받아야 할 돈이 적게나마 있어 이렇게 가만히 있다고 해서 구박할 사람은 없다. 좀 쉬고 싶다고 입버릇 처럼 말했었는데 막상 쉴 수 있게되니 다시 불안이 찾아온게다.
이럴 때면 강박적으로 내가 마치 어떤 중요한 의무들로부터 무책임하게 이탈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기분에 휩싸일때면, 주변에서 오는 온갖 소음은 물론 정적마저 나를 책망하며 것 같아 귀를 닫고 숨고 싶어진다. 이미 은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더 숨을 곳이 없나 찾고 있다. 마치 검정에 검정을 더해 더 검은 색을 만들려는 것처럼, 암흑 속에서 더 어두운 구석을 찾아가려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좀 더 어릴 적에는 미래 보다는 과거의 일들에 더 얽매여 있었다. 그 얽매임에 괴로워했다기 보다는, 그 기억들을 되새기고 뒤적이며 유의미한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오히려 즐거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데에 더 많을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예전보다 지금은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중요한 무언가를 행여 잃어버리거나할까봐 노심초사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앞에 놓인 인생에 선택할 수 있는 가지수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여겨져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주 오랜만에 가쁜 숨을 고를 수 있는 지대에 와 있다. 이리로 내가 자발적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이런 시간이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쉼을 지속하고싶다.
“인생의 비밀은 아마도…”
하고 언젠가 빨래를 널다가 은연중에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적이 있다. 듣고있던 이가 무슨 얘길 했냐고 물었지만 ‘인생의 비밀은 아마도'라는 서두가 너무 거창하고 또 애매해서 대답하지 못했었다. 생각난 김에 다시 고쳐 얘기해보자면 인생의 비밀은 바로 이 '쉼'을 계속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삶을 이끄는 동력이 타인에게서 촉발된 것이 아니며, 아무 목적없는 이 '쉼’ 속에 모든 창조적인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쉼은 나로 인하지 않은 다른 모든 것의 멈춤이다. 다시 말하면 '마침'의 의미로서의 쉼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정지이다.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지연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