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스타일이라는 게 뭐라고.
최근에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한 친구가 나의 그림을 모작하고 있다며 한 친구가 알려 준 적이 있었다. 학생이기도하고 또 과제 제출 용으로 제작한 듯 하여, 한 며칠 조용히 팔로우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열심히 여러 작품을 열심히 따라서 그리더니만, 어느날인가 내 그림에 기하학 도형 몇 개 추가해 놓고는 감격에 찬 말투로 이제 자기 스타일을 찾았다며 기뻐하더라. 혼내주고싶다기보다는, 뭔가 일깨워 주고자 하는 마음에 팔로우를 했더니 대뜸, 죄송하다 한다. 계속 습작을 하며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본인만의 작품을 갖게 될거라는 격려로 일단락 되었지만,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동양화를 공부하다보면 화가들이 일가를 이룬 작가의 화풍을 모방하는 일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인 것 처럼 여겨진다. 문화 수입 경로가 그러하듯 주로 한국의 작가들이 대륙에서 유행하는 화풍, 화제, 준법 등을 들여와 그리곤 했다. 물론 겸재나 추사의 경우 처럼 역으로 중국 문필가들로부터 존경받는 일도 있었다. ‘화풍’, 지금으로 말하면 ‘스타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너그럽게 공유될 수 있는 있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여겨졌다.
당시에는 표현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화제, 즉 그림의 ‘주제’ 역시도 수없이 공유되고 전래, 임모되어 왔다. 일테면, 단원 김홍도가 어느 봄날 한가롭게 강가에 나가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가 절벽에 위태롭게 피어있는 매화 한 줄기를 바라보며, 스승인 강세황의 화풍을 모방하여 멋지게 그림을 그리고, 두보의 시 중 한 구절,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을 그림 위에 적어 놓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보의 후손들이나 강세황의 자손들로부터 저작권 문제로 고소를 당한다거나, 주변 화가들로부터 지탄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뭐랄까, 누가 더 독창적으로 표현했는가-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얼마나 몰입하여 기운생동하게 표현했는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으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기 보다는,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정신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랄까.
한 구절, 한 마디 비슷한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작가로서 자격을 운운하는 요즈음의 각박한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뭔가 좀 씁쓸한 기분이다. 아마도 근대에 저작권이라는, 지적재산권 개념이 생겨나면서 부터, 이후 자본주의 발전과 맞물려 공고화, 세분화되면서 지금의 극단에 이른 것일 게다. 자기의 창작물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해진 이유를 생각해보면,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명예도 한 이유겠지만, 저작권은 결국 창작물을 통해 얻는 '수익'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그토록 예민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저작권에 대해 비교적 느슨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업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지고, 전업작가-로서 생활을 이어나가려다보니, 나 역시 저작권에 대해 좀 더 예민해지고 엄격해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을 살고있는 작가로서 자본 논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몇백년 전, 서로 다른 분야에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좀 더 자유롭게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시절이 더 낭만적이고 좋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 글은 표절을 장려하기위해 쓴 글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