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오면 마음이 괜히 불안하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을 것이라던가, 빗길에 틀림없이 차가 막힐 것이기 때문이라던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 날은 어쩐지 비가 금방 그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비가 오면 어쩐지 기분이 좋고, 비가 그치면 또 서운한 마음이 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이 차오르는 속도만큼 금새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려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좋은 느낌은, 꼭 그만큼의 잠재적인 불안과 함께 찾아온다.
#2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지 못하면서, 하루 종일 에너지를 소비하는 느낌이 불쾌하다. 좋은 작업을 위한답시고 좋은 책상과 좋은 의자, 좋은 컴퓨터, 좋은 자세를 위한 자세 교정기, 다음날 좋은 작업을 위한 숙면, 숙면을 위해 좋은 침대, 침구류. 그런 것들을 다 갖춰놓고, 갖춰진 그 사물들을 바라보며, 막상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날은, 잠을 잘 잘 수가 없다. 한편,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왔기에, 나는 의미 있는 무엇을 생산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도대체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작가라는 직업은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지만 그 답, 혹은 변명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3
단념해 버리는 관계들. 어떤 이에게 호감이 들다가도, 그 호감의 원천이, 또한 그 호감이 이끄는 결말이 어떤 성적인 욕구의 충족에 있다는 의심이 들면, 이내 마음을 접는다. 어떤 날은, 누군가가 무척 보고 싶다가도,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정신없이 그간의 사적인 일들에 대해 상대방에게 쏟아붇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되면 씁쓸한 기분에 이르게 된다. 또는 대화 중에 상대방이 나의 일상에 대해, 나의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금세 싫증이 나고 떠나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은 그저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라, 너무 생각을 많이 하지 마라고 충고하지만, 감정에 솔직해서 순간적으로 충족되는 행복감보다, 그 감정적인 행동들 때문에 얻게 될 부담이나 책임감에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의 일상이 망쳐질까 두려운 것이 크다. 그런 면에서 혼자인 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본능적인 외로움은 극복이 되지 않는다. 성적인 충동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의 또다른 환희는 무엇일까. 외로움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적절한 교우 관계란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유지하는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4
다시 신을 창조할 수는 없을까. 나는 전적으로 신에 의지한다-라는 기분을 가져본 적 없다. 어떤 신적인 존재를 믿고, 그 환상-세계관에 푹 빠져있는 사람을 볼 때 느껴지는 안정감이라던가, 확신에 찬 얼굴, 그런 것을 본 적이 있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신을 믿어본 적 없고, 믿을 마음도 없는 현대인이 의지할 곳은, 그 의지처는 어디인가. 자기 자신을 믿으라, 네 안에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부처의 말은, 참말인 듯 하나, 자기가 자기를 믿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단 말인가. 늘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가, 늘 외로움에 벌벌 떠는 인간이, 홀로선 인간이, 어찌 자기 스스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가. 경계 없이, 내가 이 세계에 포함되어, 일부로서 함께 있을 뿐,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말은 참말인 듯 하지만, 하루 중 과연 몇번이나 그 사실을 스스로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나를 버리면서, 어떻게 신성을, 충만감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신은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