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오랜만에 주문받은 그림 두점을 뉴욕으로 부쳤다.

종로에 살 적에는 걸어서 광화문 중앙우체국까지 걸어가 속달우편을 맡기곤 했었다. 자주 보내다보니 접수 직원분과도 친해져 ‘지난 번 처럼-‘이라고 말 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 곳 헤이리 근처에는 탄현우체국이 그나마 가까웠다. 이참에 서울이나 한 번 올라가볼까 차에 올라타 잠시 망설이다가 탄현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체국은 지난 번 면사무소 방문 때 위치를 보아운 터라 찾아가기 쉬웠다. 입구에 들어서자 구멍가게만한 공간에 ‘은행업무’, ‘배송업무, '보험업무’ 딱 세 창구만 있었다. 직원들은 손님이 없는데도 각자 업무에 분주해보였다. 작지만 왠지 알찬 느낌이 들었다. 상자에 손 볼 부분이 있어, 창가쪽 데스크로 향했는데 예상과 달리 테이프며 칼이며 방금 정리한 것처럼 아주 단정하게 꽂혀있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 테이프를 쩌엌 쩌엌 뜯어 박스를 보강했다.

“어르신, 이름도 모르시고 주소도 모르시고 전화번호도 모르시면 이 경조사비는 부쳐드릴수가 없습니다아-. 보내셔도 다시 반송될 수 있으세요오.”

뒤에서 상담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을 최대한 억누르려 말 끝은 길게 빼듯 올리는, 서비스직 여성 특유의 투였다.

“아, 괜찮다쟈너. 그냥 글케 하믄 보내진다니께. 반송되면 므어 할 수 없는 일이고오.”

돈을 부치려던 남성은 직원의 설명따위 다 성가시다는 듯, 이미 몸을 반쯤 틀어 나가려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그친다.

이름도 성도, 주소도 없이 돈을 부치는 일이 가능한가? 어쩌면 남자는 부친 돈이 수취인불명으로 반환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경조사비는 진즉에 부쳤는데 우체국놈들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며 핑계를 늘어놓으려는 수작인지도 모른다. 테이프를 또 한 번 쩌억! 찢어 박스 보강을 마치고 창구로 향했다. 성미급한 어르신은 이미 나간 뒤였다. 왠지 이런 일은 한 두번 겪어본 것이 아닐, 직원들을 위로해주고싶어졌다.

배송 방법을 알려주기도 전에 특급우편 송장을 꺼내어 슥삭슥삭 작성하고 옅은 미소와 함께 직원 앞으로 내밀었다. 중량을 기입해야하는 타이밍을 살펴보고 있다가, 얼른 상자를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직원이 전산입력을 하는 동안에는 괜스레 '이곳에서 나간 우편들은 어느 집중국으로 향하나요?’ 따위 질문을 하기도 하며,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에 호응하기도 했다. 마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광화문 우체국을 내집처럼 들락거리던 똑부러진 도시 사람이니 걱정마시요.'라는 식이었다. 책상 위에 손가락을 다그락 거리며, 뭔가 기분좋은 화답을 기대하고 서 있던 나에게 직원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우편 접수 잘 되셨구요-. 안녕히가세요.”

하여간 우편 접수가 잘 되었다니 기분이 좋았다.

두피마사지를 받으며

“오늘 날씨 따뜻하죠?”

머리를 감겨주던 헤어숍 어시스턴트가 물었다.

“네, 그렇네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오늘 머리하고 바로 댁으로 가시나요?” 또 직원이 묻는다.

“네에..”

다시 짧게 대답하고 나는 뭔가 대답에 살을 붙여 호응해줘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이번 수요일에 제 월차 휴가일인데 갈데가 없네요.”

들어올 때 안내해주던 직원인지라 얼굴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보아서는 이십대 초반의 앳된 남학생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조금 뜨겁습니다. 온도 괜찮으시죠?”

목 뒤에 뜨끈한 찜질 수건을 가져다대며 직원이 물었다.

“네에…”

월요일 아침 수업탓에 긴장했던 목덜미에서부터 어깨까지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날씨도 좋은데 데이트라도 가시면 되겠네요.”

이번엔 좋은 서비스에 대한 답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지 조금 말을 붙여보았다.

“아, 그러면 좋겠는데, 제가 얼마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거든요. 저보다 네 살 어린 친구였는데…”

하며 직원은 헤어진 여자친구의 나쁜 점에 대해서, 어떤 문제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여자를 사귀고 싶은지에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식상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머리 구석구석을 부드럽고 힘있는 손놀림으로 마사지해주고 있었던 터라, 나는 마치 콧등을 애무당하는 한마리의 고양이처럼 눈을 감고서 ‘어이구우’, ‘아아’ 하며 맞장구를 쳐주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굳어있던 근육들이 차츰 말랑말랑 해지면서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반대로 내가 나의 사생활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할 때 쯤, “수고하셨습니다.”하며 직원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왠지 모든 손님들에게 기계적으로 던지는 대화에 내가 괜히 마음을 열었나 싶어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모든 손님들에게 똑같은 말들을 던져놓고는 각기 다른 타이밍에 다른 부위를 마사지하며 그에 따른 상반된 태도와 반응을 살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육의 경직도가 인간의 타인에 대해 갖는 경계심리에 미치는 영향’따위의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하여간 머리를 말리는 동안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어, 그 시덥지않은 대화조차 아주 좋은 느낌으로 남았다.

도모지

모자란 것 없는 하루. 단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부족한 것 하나없이 충분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결핍이나 과잉을 바라는 것은 아니나, 달고 뜨끈하기만하여 뭔가 개운하게 속을 다스릴 냉기가 필요한 기분이다. 차가운 기운은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잠시동안 만들어낼 수 있겠으나 이미 봄은 와버렸다. 그리고 나는 계절의 변화를 거스를 만한 힘과 의지가 없다. 나는 해동되어 이제 곧 흔하디 흔한 이파리를 피워낼 처지인가보다. 온몸이 간지럽기만 하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면 꽃을 피워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낮잠

그녀와 점심을 배불리 먹고 유리알유희를 집어들었다. 오백 페이지를 넘겼는데도 요제프 크네히트씨의 일대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심지어 평탄한 그의 삶에 이제서야 뭔가 동요가 일고 있다. 내용상 흥미진진한 전개는 없지만, (제목 탓인지) 아주 잘 숙련된 유리세공자가 현미경을 머리에 쓰고 안경알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처럼 멍하게(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런 이유인지 나는 헤세와 스피노자를 종종 헷갈려한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드디어 오백페이지 분량만큼의 순탄했던 삶을 내려놓고 새 출발을 결심한 부분에서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잠이나 잘까?’

점심을 배불리 집에서 챙겨먹는 일에 대해서 경탄했던게 엇그제같은데, 책을 읽을 시간이 있다는 것, 나아가 낮잠을 마음껏 잘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놀라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삶이 내가 그토록 원했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그런 삶을 함께 만들어가주는 동반자에게 고마움을 매 순간 표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수입을 위해, 더 높은 지위를 갖기 위해 달려갈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매일 재확인하고, 또 지금이라도 하루하루 여유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된 데에 안도한다.

“책을 읽어볼까 아니면 잠이나 잘까.” 를 새 삶의 모토로 삼아야 할까보다.

화니훼이스

받아놓기만 하고 시작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진척이 없는 일감들만 수북이 쌓여가고 있다.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못봤던 영화들이나 챙겨보며 어슬렁 지내다보니 이제 하나 둘 마감이 다가온다. 혼자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일이 손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진다. 잘 안되는 탓을 함께 있는 이에게 은연중에 떠넘기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저녁엔 오드리 헵번과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화니 페이스’를 감상했다. 감탄을 자아내는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잘난체하지 않는 그녀의 천역덕스러운 연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예술가들의 소굴같은 파리의 어느 바에서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날아갈듯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자기가 자기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일말의 거추장스러운 느낌 없이 그 아름다움을 한 껏 발산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빈에 머물때 동료들과 wirr라는 바 지하에 있던 작은 클럽에서 막춤을 추던 날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서로 가지고있던 어색함을 극복하고 각자 느끼는 그대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그 날의 흥겨움. 술과 담배, 땀냄새가 뒤섞인 그 지하 클럽의 퀴퀴한 냄새가 떠올랐다. 내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 있던 그 시절의 느낌이 그리웠다.

하루를 살며 느끼는 불편은 대게 그런 것이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편안한 척 하려는 것. 조급증은 열등감에서 비롯되고, 열등감은 나에게 꼭 맞지 않는 크거나 작은 허울을 뒤집어 쓰는데에서 온다. 그렇다고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릴 수는 없는 일. 누군가 옆에 있거나 없거나 나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편안하게, 거리낌 없이 생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다.

메일메일

밥먹는 시간 빼고 약 열 시간 동안, 전시 때문에 답을 미루거나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이백여 통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 중 오십여 통의 이메일에 짧은 회신을 했고, 오십여 통은 재고해보기 위해 다시 내일로 미루었다. 나머지 백여통은 회신이 필요 없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메일.

전시에 초대하는 메일, 전시를 제의하는 메일,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일, 콜라보레이션을 제안하는 메일, 콜라보레이션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하는 메일, 작품 게재를 요청하는 메일, 작품을 게재하겠다고 공지하는 메일, 다짜고짜 참가비를 내라는 메일, 작품 가격을 묻는 메일, 작품의 의미를 묻는 메일, 작품을 그린 방법을 궁금해하는 메일, 조언을 구하는 메일, 안부를 묻는 메일,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대신 메일을 써달라고 요청하는 메일- 까지, 보내는 사람, 말투, 내용이 모두 제각각인지라, 하루동안 수십여 명을 직접 만나 상대한 것처럼, 앉아서 자판만 두드리는데도 체력이 방전되어버린다.

어느 순간부터 메일함이 그림에 대한 메일로 가득해진 것은 기분좋은 일이나, 메일을 쓰다보면 하루의 절반이 훌쩍 넘어버리고 매 순간 결정하고 선택해야하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을 느낀다. 나에게 올바른 것들을 잘 선별하고 있는지, 놓치는 것은 없는지, 일의 경중을 따져 스스로 진행해 나갈 능력이 내게 있는지 때로는 자신이 없기도 하다.

진정 후리랜서로서의 삶이 전격적으로 시작되었는가보다.

용기

알랭 바디우에 대한 글을 읽었다. 사건과 주체에 대해, 진리에 대해, 다수를 일자화 시키는 국가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해 놓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건’ 개념은 아직 낯설긴 하나, 오늘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지고있는 문제점들에대해 냉소하는 부분이나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분석이 와닿았다. 그의 사상적 근간이기도 한 프랑스 68혁명에 대해서는 좀 더 찾아 읽어보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 있었던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자 총파업, 촛불운동 등, 과거의 일들과 비교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오늘날 그러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합당해 보일 만큼 68년 프랑스에서 외쳐졌던 구호들이 지금 내게 와닿았다. 그와는 별개로, 공포가 지배하는 이런 무시무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기’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개념적 추가설명이 있는 것인지 원문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엄격하고 엄숙한 사상을 펼치는 철학자들 일수록 종장에 하는 말들이 싱거운 느낌인 경우가 많기는 하다.) 하여간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사실 재작년엔가 플래툰에서 있었던 포럼에서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의 발언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저 생전에 한 번 보는게 좋겠다는 심정이었기에, 무슨 얘긴지도 모르고 텍스트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었는데, 이제야 그 포럼이 왜 서울에서 유의미했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봄비

오늘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녀와 관련된 책과 블로그들을 검색해보다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 관한 그림들을 찾아보았다. 오후에는 월요일이라서 텅 빈 헤이리를 조금 산책 했다. 그리고 잠깐씩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며 시시각각 변하는 경치들을 감상했다. 그리고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줄곳 왜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사실 헤이리로 이사를 온 이후, 읽고 쓰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생산해내는 일련의 과정들이 잘 기능하고있지는 않고 있다. 그런 것들이 완벽한 리듬을 가지고 작동했던 적이 있기는 한가-하고 자문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지난 날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상하고 생각하는 일들은 지속적이라기 보다는 짧게 집중적으로 각기 다른 날들 행해졌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주로 그보다 더 긴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행해졌다. 어떤 날엔 여러 가지의 것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와 그것들을 정리하기에 바빴고 어떤 기간 동안에는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능동적인 행동들임에도 수동형 문장으로 묘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나는 아직도 무언가 다가오기를,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표현에 대한 불만은 늘 있었다. 지난 날들을 흘긋 뒤돌아보고는 왜 지금은 잘 안되는가 하고 불평하는, 거의 습관에 가까운 조급증. 지난 날 이루어졌던 창작의 결과물들을 한꺼번에 포개어 생각해보면 모든 창작과정들이 아름다운 리듬을 가지고 착착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런 착시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요즘 읽고 있는 헤세의 유리알 유희 탓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오늘은 봄비가 내렸다.

팝 아이스

십오년만에 와 보았다.

서촌 파파이스를 지날 때마다 나는 ‘파파이스는 파파이스가 아니라, 팝! 아이스지. 팝! 아이스!’ 하며- 속으로 발음해보곤 했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맛있다는 의미로 지었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프렌치커넥션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형사 ‘지미 팝아이 도일’ 이름에서 따 온 것이라한다. (그 형사의 눈이 유난히 튀어나와있었던 걸까?)

하여간 그래, 감자튀김은 역시 파파이스지. 하며 매콤한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십오년전 단짝친구 둘과 신촌 파파이스에서 히히덕거리던 생각이 났다. 프루스트식으로, 케이준 후렌치 후라이를 한 입 깨무는 순간으로부터 과거의 그 장소로 스윽 돌아가 하나하나 섬세하게 기억해 낼 열의는 없었고, 그냥 한 번 그 ‘단짝’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을 뿐이다. 또한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무슨무슨 순례를 떠난 해’ 처럼 오랜 친구들의 면면과, 우정, 다툼과 헤어짐, 그리고 해후-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볼 기력또한 없어 그저 파편적인 기억들 뿐이었다.

어느날 우리는 각자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한 녀석은 십년 후 영화감독이 되어있을 것이라 했고 그것이 잘 안되면 아마 아버지 가업을 이어 비디오가게나 하고있을거라며 꺼억꺼억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비디오가게라니!) 또 다른 친구는 뉴욕에서 패션디자이너가 되어있을거라며 마치 지금 맨하탄 마천루를 올려다보고있는 것처럼 먼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야기했었다. (패션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 친구는 얼마 전까지 맨하탄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작은 방과 램프, 아주 편안한 소파를 갖는 것이 꿈이라 말했었다. 노장철학서를 읽던 시절이어서인지, 무위의 허세를 부렸던가보다. 그래, 아주 편안한 소파를 장만해야겠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다들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 닿지 않는다기보다는 서로 닿을 수 있는 면적이 줄어들었달까. 아니면 그냥 서로 맞딱드리기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말 핑계로 연락을 해볼 수는 있겠지만 형식적인 말들만 오고가게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잘 지내고 있길.

재계 齋戒

늦여름까지 작업실에 자주 나타나던 녀석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책상 구석 어딘가에서 기어나왔다. 동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벙벙해 하더니만 도망쳐 날아갈 기색도 없이 제 몸 닦기에만 열중한다. 고양이들이 더러워진 제 몸과 털을 정성껏 다듬는 것은 종종 보았지만, 벌레가 이토록 세심하게 몸 마디마디를 움직여 매무새를 가다듬는지는 미처 몰랐다. 실처럼 가는 다리로, 실보다 더 가는 근육들을 움직여 미묘하고 정교하게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Life on Mars

밤이 새도록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앉아있자니, 그 적막함이 너무 좋아 그만, 이내 누군가 불러다 놓고 함께 고독과 우수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의 고독 속으로 끌려 내려와 우두커니 그 고독에 참여해야 할, 그 누군가를 상상해보니, 그것도 참 안됐다-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곤 다시 돌려보낸다.

고독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매우 세심한 배려와 믿음이 필요하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의 원자라도 둘로 셋으로 얼마든지 나누어 쪼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배짱과 27km에 이르는 거대한 환형 입자가속기 터널을 따라, 광속의 99.999991%에 이르는 낭만적인 속도로 돌고돌고 또 돌아, 종말을 각오하고서라도 서로를 향해 과감하게 돌진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있다면 더욱 좋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인가?) 그럴 자신이 없다면, 화초와 고독을 나누는 수 밖에 없지.

하여간, 나는 왜 이토록 절대적으로 혼자 있을 때에만 뭔가 생산적인 일에 착수할 수 있을거라는 식의 강박 아닌 강박, 결벽 아닌 결벽을 가지고 있는가. 딱 봐도 청승이고 슥 봐도 허영인 이런 막돼먹은 고집을 가지게 되었을까? 를 생각하다가. 완벽하게 고독한 어떤 존재를 상상해보다가. 절대적으로 홀로 있는 상태에서만 작동하는 기계 따위를 떠올려보고는, 화성에 홀로 던져져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로봇을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낯선 땅, 낯선 행성의 지표 위를 홀로 점처럼 버려져 뒤뚱뒤뚱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런 로봇. 삐죽 솟아나온 팔로 붉은 흙을 한줌 집어, 무슨 신성한 의식인 것처럼 자신의 머리위에 조심스레 뿌리고는 다시 또 정처 없이 나아가는 그런 모습. 팔을 뻗을 때 자신의 팔꿈치에서 나는 모터소리를 듣고는 흠칫 놀라고 마는 그런, 로봇의 표정까지를 떠올려 보았다. (이것은 R2D2와 C3PO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런 절대 고독 속에서라면 로봇이라도 영혼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여하간, 감정이입이 이미 그렇게 충분히 된 우리의 화성탐사로봇 피닉스 Phoenix에 대해 이제 막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려던 차, 안타깝게도, 지난 5월 24일, 미 항공우주국(이 단어는 어쩜 이리 멋있을까)이 피닉스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보도 자료를 발견하였다. 피닉스는 해가 뜨지 않는 화성의 혹독한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록 송신이 두절되었지만 우리의 피닉스는 당분간 탐사활동을 계속 할 것이라고 퍽 리 Fuk Li, manager of the Mars Exploration Program at NASA's Jet Propulsion Laboratory in Pasadena, Calif, 씨가 말했다. 퍽(Fuk)씨는 이어, 태양이 다시 비추기 시작하면 피닉스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Manager of the Mars Exploration Program at NASA's Jet Propulsion Laboratory in Pasadena, Calif쯤 되는 사람이니, 피닉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 밖에. 피닉스가 화성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영혼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내 생각에, 퍽(Fuk)씨라면 아마 동의하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 눈을 질끈 감고 북받치는 감정에, 나를 부둥켜안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자리를 빌어, 2008년 5월 25일 홀홀단신 화성에 착륙하여, 화성에도 물이 존재함을 보고하는 위대한 성과를 이루어낸, 무인 탐사로봇 Phoenix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버려버린 세 가지

해질 무렵, 나는 무덤같은 정육면의 석실 가운데로,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초가 놓여져 있는 공간 속으로 던져져, 어림잡아 해가 뜨겠거니 싶을 때까지, 내부의 산소를 모두 소모할 때까지, 가끔씩 무언가 추구하는 듯한 포즈와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것이 자유일까, 아름다움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그냥 살아있음일까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러다가 아무 것에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있는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또 그러자니 너무 고상한게 아닐까, 너무 촌스러운게 아닐까, '무위'를 '위'해 치르기엔 그 댓가가 너무 크지않나 하며, 무위를 위해 치르고 있는 월 30만원의 가치를 떠올리다가, 30만원짜리 프로젝터를 하나 사고싶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던져버리듯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 뭔가 크나큰 이유와 사명이 있는 게 틀림 없어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며 프로젝터 대신 그 어떤 고상한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대가리를 굴리고 또 굴리고, 그러다 도저히 갈피를 못잡겠다는 듯 대충 스륵 넘겨 덮어버리곤, 소파 위에 던져놓고, 그 근처에는 앉지도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서 버린다. 입을 꾹 다물고 나니 왠지 슬프게도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고독을 위로하는 일 보다 시급한 일은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보다가 재수없게 걸린 초, 내 눈치를 보는 듯, 움직이지도 소리내지도 않고 타고 있는 초, 내가 일 분 일 초 쉬어야 할 숨을 가로채 얄밉게 초 위에 앉아있는 초, 내 속이 타는 줄도 모르고 타고 있는 이 초, 내가 쉴 숨을 왜 네가 쉬냐며, 마치 앞으로 쉬어야 할 한숨들을 이 참에 다 뱉어버리겠다는 듯, 내가 쉴테니 너는 쉬어라, 힘차게 훅 꺼버리자, 라는 듯 꺼버리자, 그렇게 매정하게 초를 끄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것이라는 듯 연기가 피어올랐고 나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한 낯으로, 불을 끄고나면 적어도 이 방의 평수 만큼은 산만한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것을 어떡해 하고 말해서 버린다.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맨 처음 연필로 애매하고 흐릿하게 앞으로 다가올 어떤 결말을 암시하듯 슥슥 이리저리 흔적을 남기고는, 너그럽고 친절한 시선으로,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슬픈 결말은 아닐꺼야- 라며 일단 안심을 시켜두고는, 그 관념과 그 형이상을 몽롱한 심정으로 즐기다가, 조금만 더 놀게 해달라고 떼를 쓰면, 안돼 이제 그만해- 하고 실랑이를 부리는 여유조차 없이 대뜸, 0.1 mm, 아니 좀 더 굵고 짙은, 0.3 mm 쯤 되는 코픽사의 멀티라이너로, 왜 멀티라이너일까, 아무튼 힘을 꽉 주고는, 애써 부드럽게 그린 것 마냥, 그 선을 그을 때에, 마치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는 듯, 가뿐한 체하며, 가끔은 씨익 웃어보이기까지 하며, 선을 그어, 경계에서 간지럽게 주저하던 이 마음과 저 마음을 떼어 놓은다음, 이제는 너희는 보려고 해도 도저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없이 말하는 듯한, 궁극의 검정, 스페셜 블랙이라고 뚜껑에 적혀있는, 코픽사의 마커펜슬로 단애와도 같은 명도로, 무한한 백색과 무한한 흑색으로, 둘을 이별시키고는, 애초에 그런 연약한 연필자국따위, 개나 줘버려 하는 듯한 명쾌한 손짓으로, 하지만 왠지모를 미련을 느끼며, 손등으로 슥슥 지워, 입으로 훅훅 불어서 버린다. 쓸데없이 또 시간을 허비하여 버렸다.

요즘의 있기

되도록이면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끄고, 옆집에서 개미소리만한 전화통화 소리가 들리면,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인다. 수면 위에 풍덩 던져졌음에도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듯 무모한 그런 마음. 여기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종의 해를 끼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귀신이라면, 아마 사람들이 놀랠까봐 가능한 한 어둠 속에 빈 곳만을 찾아서 다닐 것 같아. 라고 혼잣말을 해버리곤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핀다. 어딘가에서 풍덩- 소리가 들려온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네에 다녀왔다. 기분탓인지, 내가 동네를 떠난 이후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반갑다기보다는,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를 보는 것 처럼 안타까운 마음. 골목골목 지날때마다 그때 앉았던 자리, 만났던 사람들, 보잘것 없는 다짐이라던가 불평 따위가 떠올랐다. 장소가 기억을 보관하고 있었다. 어느날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잃어버린, 다시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물건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처럼, 피식- 웃으며 걸었다. 그렇게 아무데나 흘려버린 기억들은 아마 '나'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없는, '나'라는 단서가 없는 정보들이었을게다. 문득 그렇게 버린 기억들을 하나씩 수거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가,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는 프루스트의 소설이 생각나서 단념하고만다.

더위가 불쾌한 이유는, 몸에서 쏟아지는 온갖 분비물과, 습한 공기, 그에 젖어 무겁게 처진 옷가지, 불쾌한 냄새. 그것들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이 '몸뚱아리'라는 것이 얼마나 거추장 스러운 '짐'인지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찬 새벽에, 레비나스가 그려낸 '존재하기'에 관한 아름답고 구슬픈 문장들을 읽고 탄성을 지르다가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는 그냥. 어쩔 수가 없다. 나도 어쩔 수가 없고, 아마 레비나스도 어쩔 수가 없을 거다. 존재하기는, 애잔하고 숭고한 무엇이라기보다, 끔찍한 노역이 되어버린다. 가끔 다섯 살 난 우리 조카녀석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가 느끼는 가뿐함이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보곤 한다. (아마도 그 '가뿐함'조차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야말로 심신이 평행하여, '존재자가 존재의 주인'이라던가 '항상 소멸하는 시간'이라던가 하는 얘기가 가능해지는게 아닐까?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오히려 슬플때의 안타까운 표정을 짓게 된다. 그것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일까. 욕망이 극복되어지는 순간. 고양이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을때와 비슷한 감정. 아름다운 것들은, 이미 지나간 것들이어서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워서 금방 지나가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자폐

문을 열어 본다. 건물 옆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다시 문을 닫고 소리가 나지 않게 잠금장치를 걸어둔다. 저들이 지나가고 나면 나가야 할 것이다.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은 건물 뒤편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면 지나가 버릴 줄 알았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작업실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서로 담뱃불을 붙여준 두 청년은 유리문 앞에 아예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작업실이 있는 건물은 골목길에서 적당히 들어와 있어 한적한 데다가 유일하게 가로등이 켜져 있는 곳이어서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아마도 골목 초입의 게이바에서 올라온 커플인 모양이다.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황에서 일을 해결하려고 일어났는데 막상 좌절되고 나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려 빈 페트병 하나를 찾아냈다. 내가 조금 전에 비웠던 음료수병에 볼일을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 거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빈 병이 금방 따뜻한 액체로 가득 찼다. 일을 해결하고 나니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잠겨 있지도 않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나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작업실에 온 것은 오전 열한 시쯤이었다. 비가 내린 탓에 낮부터 전등을 켜놓고 있어야 했다. 내 자리는 창문이 없는 안쪽 자리인 데다가 커다란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 대낮에도 그리 밝지 않았다. 전등을 켜놓고 작업하다 보니 어둠이 내리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화장실을 가지 못한 건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밖에서 보기에, 작업실에는 오늘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내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같은 건물 사람들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건물 뒤편에 임시로 지어놓은 집에는 활달한 성격의 아저씨와 그의 딸이 살고 있었다. 작업실에 들어온 이후로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다. 작업실을 함께 쓰는 문숙 씨는 인테리어 일을 하며 인부 아저씨들과 자주 어울려서인지, 어른들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한 듯했다. 뒷집 아저씨와도 상당히 친한 듯 보였지만, 오늘은 나 혼자였다. 어둠 속에서 문을 열고 나와 그 아저씨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어둠 속에서 무얼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 그가 납득할 만한 자연스러운 핑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이고 홀로 그렇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마치 오늘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던 듯, 빈집의 유령처럼 처신해야 할 것만 같아, 낮부터 그렇게 생리 현상을 참아왔던 터이다. 그런데 이제 집 앞에 게이 커플까지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저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할 판이다. 바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얘기들이 많았는지,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그들의 목소리가 작업실 안까지 울려 퍼졌다. 간드러진 웃음 소리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실루엣이 작업실 한쪽 벽에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순간에 나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사랑의 속삭임을 어둠 속에서 염탐하는 음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실수로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안쪽에서 들려온다면 넋놓고 있던 저들은 아마 소스라치게 놀라 나자빠져 버릴 것이다. 귀신이라면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사람들이 행여 자신을 보고 놀랄까 봐 노심초사해야만 하는 그런 불행한 마음. 나는 작업실 안쪽 칸막이 뒤편 어둠 속에서 속절없이 기다렸다.

삼십 분쯤 지나자 뒷마당 쪽의 아저씨 가족들은 잠자리에 들었는지 조용했다. 문앞에 게이 커플도 이제 슬슬 일어나려는지 바닥에 신발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골목 끝으로 멀어지는 웃음소리와 구두 소리.

드디어 해방된 것이다. 가로등 불빛으로 노랗게 물든 유리문 너머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짐을 챙겨서 문 앞으로 다가간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나를 보고 질색할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본다.

꿈에서 친구들과 모래를 주웠다. 한 손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꽉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실로폰채 같은걸 들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넷이서 같이 걷다가 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모래알을 주워담았다. 내가 모으는 돌은 아주 작은 볼트모양으로 생긴 푸른색 빛이나는 모래알갱이었고, 다른 친구는 다른 색을 주워담았다. 차도 안다니는 누런 흙길 위에서, 네명의 친구들이 그렇게 돌을 줍는것 이외에는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평화롭게 끄적끄적 거리를 쏘다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었는지, 내가 혼잣말로 한국어를 하면 다른 친구가 신기하다는 듯 흉내내기도 하고 그게 재밌어 또 웃었다. 뜨겁지 않은 이상한 대낮의 거리에서 그렇게 두런두런 돌을 줍는 느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