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을 받기 전 후의 사정은 생략한다. 여섯통 정도 되었으나 그 중에 두 통의 메일을 우선 확인했다. 발신인이 같은 그 두 통의 메일은 핀란드에서 온 메일이었다. (처음에는 핀란드였는데 나중엔 이탈리아로 바뀌어 있었다) 핀란드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그 친구는 나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나의 글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내가 변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렇게 글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뭔가 다시 다른 것이 생각난듯 했다. 이어 보낸 두번째 메일에는 자신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같이 공부했던 그의 동료가 나를 매우 알고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다녔던 학교의 수업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도요 수업 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도요'라니- 무얼까) 그리고 그는 '학교'가 아닌 '학원'이라는 단어를 줄곳 사용하고 있었다. 꿈 속에서는 글자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있었는데, 그 이론이 틀렸는가보다. 글자는 물론이고 한구절 한구절이 생생하게 눈앞에 보이는것 같았다. 나는 아마도 도자기 전문학교 쯤이 아닐까 생각했던것 같다. 아무튼 그 친구의 친구는 나의 글을 읽고나서 매일 옥상에 올라가서 노래를 불렀다 했다. 심지어 '나'를 주제로 졸업 연구논문을 썼다고 했다. ('연구논문'이 아닌 다른 단어였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졸업 작품전에는 '우주인과의 교신'을 테마로 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 간판을 안테나처럼 활용한 작품이라 했다. 나는 꿈 속에서 그 이미지를 상상해 보았다. 바보같이 장식된 헬멧을 쓰고서 이발소 간판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어떤 아이의 모습이 바로 이어졌다.

핀란드에도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 간판이 있구나 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잠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깬 나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이 핀란드인지 이탈리아인지에 사는 친구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신이 들었는지 창밖에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마저 꿈인듯 싶었다. 갑자기 읽지 못한 나머지 메일을 읽지않은게 생각났다. 아차 싶어서 나는 꿈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베게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미셸 공드리 영화에서처럼 눈앞에 다시 '막'이 드리워지고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꿈 속에서도 읽을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나머지 메일의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려 해보았다. 그 중에 몇몇은 내가 소리내어 발음을 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 속에서 읽었다는 메일의 내용은 아마도, 읽는다는 기분이 느껴졌다고 하는것이 맞겠지만, 그것을 읽으면서조차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몇몇 글자를 하나하나 확인한 것은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도요' 라던가 '핀란드'라는 단어가 그렇다. '도요'라는 단어는 도데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핀란드'라면, 얼마전에 본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 탓일까. 우주와의 교신을 원한다던 그 엉뚱한 친구를 정말 한번 만나보고 싶다.

물론 이메일 받은편지함에 그런 메일은 없었다.


코브라

아침에 나는, 당인리 오르막길에서 상수역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려가고 있었어. 뒷바퀴에 바람이 빠졌는지 아스팔트 둔덕을 지날 때마다 자꾸 턱! 턱! 소리가 나더구나.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양화대교에서 성수대교로 가는 한강 산책로에 무료 공기주입기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어.

“20세기 미술”이라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싸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어. 하지만 나는 브레송의 사진 속, 싸트르의 비뚤어진 눈빛을 떠올렸지. 이내 쟈코메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어.

집에 와서 남북 정상이 만나 악수하는 뉴우스를 보다 잠이 들어버렸는데, 꿈속에서는 가엾게도 남측의 대통령이 어떤 제복을 입은 어린아이의 총에 맞아 서거하시더구나. 깨어나서도 잠시 동안 그것이 꿈이었는지도 모르고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어.

저녁에 강아지와 산책할 때는 어땠냐 하면, 간밤에 지나쳤던 아가씨가 갑자기 떠오르더구나. 어젯밤 어느 좁은 골목에서 연인과 전화통화를 하던 한 여성에게 이 녀석이 꼬리치며 달려들었었거든. 그 여자는 귀여워하면서도 난감한 듯 날 보며 웃어보였었지. 그런데 녀석은 그 자리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더니 대변을 보더구나. 휴지로 집을 때 녀석의 변이 좀 더 촉촉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우유를 주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단다.

얼마 전까지 나는 방을 치우고, 지금은 벩-손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우주적 지속의 일부가 신체라는 이미지에 포착된 것이 바로 개인의 정신이고 기억이라는데, 왜 나에겐 오늘 하루 '포착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는 생각에 하루를 돌이켜 보았던 것이야.

우주는 인위적으로 분할할 수 없게끔 스스로 연속되어 있데, 어쩌면 나라는 이미지-신체는, 이미 그것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에 다다른 게 아닐까 싶어. 기억하기위해 노력하지 않는 그 기억들이, 나라는 신체의 자기동일성을 갖게 해주는 것인지도 몰라.

주변의 이미지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소간의 이점利點에 의해서- 선택이 이루어지고 행동하게 된데, 그렇다면 다소간의 이점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갖고 있는 어떤 정신은, 축적된 기억과 순수지각을 비교해야하는 수고를 덜기위해 의도적으로 기억들을 무의식속에서 끄집어 내지 않고 억압하게 될 수도 있는지도 몰라. 내가 무기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게 있는데, 1940년대의 코브라라는 단체는,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화가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래. 나는 아까 속으로, 코펜하겐의 ‘코’. 브뤼셀의 ‘브뤼’. 암스테르담의 ‘아’! 를 외치며 웃었지.


냄새

친구들의 이름을 묻고, 학번을 묻고, 사는 곳을 묻고, 가족관계를 묻고, 좀 더 할말이 없어지면 장래희망 따위를 묻기도 한다. 정말 쓸데없는 질문들이다. 내가 정말 물어보고 싶은건 어쩌면, 잠자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되는지, 꿈 속에서 깨어나 본 적이 있는지, 아무것도 안하고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하는 것들. 그런데도 계속 나는 이름을 묻고, 사는 곳을 묻고, 가족관계를 묻고. 어휴 정말 멍청해.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지도. 그래서인지도 몰라.

창문을 열어놓은채 비워둔 방안으로 문을열고 들어올때면, 방 안 가득 들어 차 있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담배냄새가 조금 나는데, 나는 그 때마다 작년 겨울을 보냈던 라이프치히의 기숙사 방을 떠올린다. 계절에 대한 감각, 세월에 대한 감각은 달력의 숫자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런 것인가보다. 냄새나 촉각 따위의 감각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는것이 사뭇 다를 때에 느껴지는 그런 것. 그런 차이.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나 하는 것들. 혹은 생에 대한 이런저런 불평 불만들. 그런것들이 잠잠- 하다. 불안하게. 근데 그래서 쓰고싶은 것이 없는가보다.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언젠가부터 시작했는지 모를 누군가를 향한 흠모. 혹은 누군가를 향한 감정적 부채, 미안함. 혹은 누군가를 향한 분노, 서운함. 같은 것들이 비로소, 비로소 해소되고, 고갈되고,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워진 결과로 어떤 안정, 여유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기 빈자리에 남은건, 거대하게 입을 벌린채 하품하고있는 무료함.

이사를 온 이후, 방안에 누워서, 창밖의 소음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보면, 창 밖, 큰 길가로 육중한 무엇인가가 도로위를 사납게 지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남부순환로를 지나 경인고속도로로 진입할 집게차들이겠지. 아마도, 차가운 쇳덩어리를 싣고 부둣가 공장으로 향하는 트럭이겠지. 언제부터 저 무시무시한 소리들에 익숙해졌던걸까. 그 소리가 두렵다. 나는 세계에 무관심하고, 그 댓가로 세계는 나에게 무관심하다.


뚤린 입으로 그가 말한다

내가 너그 학교 앞에 거기 사거리 있지? 그 왜 철길 지나가는 모퉁이 말이여. 내가 거기서 장사했었다니께. 삼십년 전에! 그때 내가 쌀 사백가마니 돈으로 시골서 올라와서 그 가게를 시작한거여. 그때 너그들 백만원짜리 집에 살았다므는 나는 천만원짜리 사업을 시작했단말이여. 그때 내가 그 왜 가나전자 대표랑 같이 바둑도 두고 그랬다니까. 내가 그때 이 뭐냐. 냉장고, 텔리-비전, 오디오 같은거 취급하고 그렇게 사업을 차린거여. 그때 내가 그 돈 가지고 처음에는, 주유소를 할까 아니면 호텔을 할까 고민했었는디. 그때 내가 주유소를 했으면 때부자 됐을터인디. 아 서울 한복판에 주유소 하나 가지고 있어봐. 그게 어디 기름 팔아서 돈버나? 다 땅으로 부자되는겨. 거기 너그 학교 앞에 청기와 주유소. 그거도 내가 얼마전에 알아봤는데 이백억인가 하더라고. 그게 다. 그 땅이 돈인거여. 어쨌건, 나 그때 사업하고 돈 홀랑 다 까먹었어도 다시 시작해서 이정도 발 뻗고 살고 있잖아. 운이라는 건-말이여- 응? 로또복권 당첨되듯 그렇게 오는게 아니여. 운이라는게 무슨 하늘에서 굴러떨어지는 줄 알어? 아니여-어. 다 일년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 나면 그것이 복인거여. 올해는 이만-치 계획 세우고, 그 해에 그걸 이루고. 그것이 바로 복인 것이여. 요즘도 내 친구들 만나면 뭐라고 하는줄 알어? 초등학교 동창들 말이여. 그때 나는 코찔찔 흘리고 다니던 놈이었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거 보고 다들 부러워하는거여. 엇그저께도 내 친구녀석. 이. 요 옆에 사십일층짜리 건물에서 경비일혀. 그놈이 나랑 나이가 같은데, 요 옆 건물에서 경비일을 해요. 밤새도록 해 놓구서는 아 겨우 일당 이만원씩 받어. 그런 놈은 내 앞에서 슬슬 기는겨. 나 이 아파트 사는거 보고 그냥 놀라버리는겨-어.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친척이고 가족이고 소용 없당께. 뭐가 젤로 중요한 줄 아냐? 돈 많이 벌면 그걸로 끝인거여. 돈 벌면 그게 힘인거여. 아. 학교에서는 도데체 뭘 가르치나 몰라. 응? 대학교에서 왜 돈버는 법은 안가르쳐주는지 몰라. 사년제 대학 나와서 봉급쟁이 되는 놈들? 그거 다 한심한 짓거리여. 평생 뼈빠지게 벌어봐야 3억이여. 그렇게 살면서 뭐 좀 있다고 떵떵거리는 것들 보면 아주 한심혀. 돈 못버는 그런 놈들은 우리같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요. 자 봐라. 내가 우리 아들노무새끼 비엠더블유 지포를 사줬단 말이지.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우리가 빚을 내 가면서 그 차를 사준 줄 알어. 돈 없어봐 그 차를 어디 현찰로 주고 사. 자랑할려고? 그게 아니여. 그 사람들하고는 레벨이 다른겨. 우리는 그마-안치 사니까 다 그런 비싼 차도 현금주고 사서. 몰고다니고 하는겨. 우리가 그 차사서 쩔쩔매면서 사는게 아니라 다 몰고 다닐만 하니까 그러는 거라구. 그러니까. 레벨이 다르면 말이 안통해. 여기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줄 알어? 골프 못치면 말도 안통해요! 반상회 할 때에도, 한번 빠지면 죄송합니다-아 하고 얌전히 돈 갖다 줘야되. 여기 사는 사람들은 돈하고 관련된 사람이 없어. 돈 벌려고 걱정 안해도 사는 사람들이라고. 골프 쳐봤어? 골프 칠줄 알아야뒤-야. 나도 전에 여기 닭장에서 육개월동안 그것만 쳤잖아. 근디 내가 요새 오십견이 와서 그만뒀지. 나중에 어디 선산에다가 닭장 지어놓고 골프연습이나 했으면 좋겠드라니께. 그런것도 다 배워둬야되.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너도 멍청하게 그러지 말고 얼른 사업을 혀. 너 졸업해서 뭐할꺼냐. 졸업해서 봉급쟁이 되 봤자- 아 평생 일하고 삼억 벌면 많이 버는거라니까? 삼억 벌어서 뭐해. 겨우 쬐그-마한 집 하나 사는거 밖에 더 되? 안그랴?


월요일의 동선


제6열람실 좌석 227번*

Meiner Weisheit A und O Klang mir hier:
was hoere ich doch! Jetzo klingt mir's nicht mehr so,
Nur das ew'ge Ah! und oh! Meiner Jugend hoer ich noch.
젊은날 가졌던 지혜의 알파와 오메가를 나는 여기에서 다시 듣는다.
그러나 무엇을 들어왔던가? 지혜의 말보다는 고뇌의 말:
내 귀에 이해되는 것은 우리 청춘의 끝없는 <아아!>와 <오오>뿐.

이런 번역은, 마음에 든다. 청춘의 끝없는 <아아!>와 <오오>뿐이라니 아아! 니체는, 그렇게 많은 양의 글을 써야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문학적 욕심이랄까, 감동적이고 찬란한 미사여구가 생각하기를 방해한다. 그 누구보다도 신에 대해서 잘 이해하는 자가, 당대 그리스도교도들의 신앙이나 숭배에 대해서는 성토하면서도, 그 스스로의 사상에 대해서는 미래의 눈먼 독자들에게 신앙이 되어도 상관없다는듯, 알면서도 모른척. 그런 태도는 못마땅하다. 못마땅해도 할수없지. 그래도 아아! 레클람에서 나온 문고판 니체를 사가지고 올껄 그랬나.

학관에서 정문쪽으로*

샤프심의 진하기가 마음에 안들어서, 짐을싸서 도서관을 나온다.
학생회관 건물 여기저기 각종 동아리 홍보물이 붙어있다.
'숨겨진 열정을 찾아드립니다 - 대학창작음악동아리.'
'유럽 배낭여행 50만원! - 홍대배낭여행'
'순수한 영혼을 가진 당신! 글샘동아리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정문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걷다가, 괜히 바닥에 그어진 화살표를 따라 운동장으로 내려간다. 미식축구를 연습하는 덩치큰 녀석들의 구호소리 하인즈워드가 한번 다녀갔다고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유세라도 부리는건가. 정문 공사 때문에 초등학교 앞으로 옮겨진 농구장에서 과-대항전이라도 하는지 함성소리가 꽤나 시끄럽다. 열람실에서 들리던 소리가 저것이었군.

다시, 정문을 지나 신호등 앞. 건너편에 서있는 침착한 표정의 여자아이. 피트한 스키니-진, 아무것도 프린팅되어있지 않은 회색 티셔츠를 입었다. 그저 아무 무늬없는 회색티셔츠 라는것만으로도 주목해야할 그 아이는 천연덕스럽게도 순간, 작은 입을 벌려 하품하였다.

9600 좌석버스*

베르그송의 이마주- 를 이해한답시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뜬다. 그것을 꽤나 진지하게 반복하고 있을즈음 갑자기 내가 앉은 좌석으로 왠 낯선 녀석이 고개를 내민다. 무슨일인가 하고 황급히 이어폰을 귀에서 뽑았는데, 내 뒷자리에 앉았던 그 녀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머리위에 붙어있는 노선표를 뚤어져라 쳐다보고있었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대프트펑크 face to face. 로멘소니의 섹시한 목소리는 도무지 질리지도 않는다.

이번엔 에드문트 후썰- 그가 질문한다. <타자속에도 과연 의식이 있는가?> 흥미롭지 않은가. 98년도인가, 미술학원을 다닐적에도 한번,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 맨 뒷자리에 앉아서 그런생각을 했었던것 같다. 내 옆에 앉아있는 이녀석에게도 나와 같은 의식이 있다니, 믿을수 없어! 라고 현상학적으로만 해석하자면 의미적 세계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정말- 너는 없는지도 몰라. 훗. 아- 그러고보니 웨이킹 라이프에서도 잠깐 이런 대사가 등장했었지. 잠이 덜깬 제임스가 귀찮다는듯 돌아누우며 셀린느에게 이렇게말했었잖아.
maybe I only exist in your mind.
I'm still just as real as anything else.

신촌역즈음에서였을까, 갑자기 내뒤에 앉았던 그녀석들이 버스를 멈춰세우고 황급히 뛰어내린다. 어어- 가만있자, 지난번에도 분명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연인이 꼭 같은자리에서 버스를 멈춰세우고 뛰어내렸었는데- 그리고, 나는 지금처럼 그녀석들을 가만히 지켜봤었더랬는데-

그리고, 집*

연애시대를 보다.
이런 재미난 각본을 써내다니

ES 와 ICH 그리고 UEBERICH

어머니는 한동안 이사가는 일에 열중하고 계셨다. 그리고 결국엔 당신이 원하시던대로 누군가에게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가게되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이 무의미한 이사계획을 말리고 싶었지만, 문득-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가 없으면 어떤가- 하고. 특별한 이유는 반대할 수 있는 여지라도 가질수 있게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에는 아무런 대답도 불평도 소용없지 않은가. 가야되니까- 가야되니까- 라는 말만 되풀이하고나서 나도 결국 독일에 갔던것 아닌가. 그런식의 무모함. 즉, 이드가 원하는 것에 손을들어주고 그것에 순순히 복종할수 있는, 그런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던가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드- 자아- 초자아- 라는식의 사변적 개념들이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것이라면, 나의 경우- 초자아는, 그가 가지고있던 중대한 현실계의 권한 대부분을 이미- 이드에게 빼앗겨버린것같다. 그 이드는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게으른것조차 옳다- 라고. 하지만 늘 충족된 이드는 어떤 것에도 책임지기 싫다는 태도로 뻔뻔하게 들어누워버린다. 그것이. 문제이다. 위축된 초자아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워야 함이 마땅하지만. 무슨 근거로, 어떤 체계로 그것을 구축해야한다는 말인가. 아버지의 멘탈리티를 다시 습득할만큼 나는 천진하지 않다.

아무것도 궁금하지않다

목요일 새벽, 집앞에 이르러 잔뜩 취해있던 나는 왜 이유없이 크게 소리내어 웃었을까. 모르겠다. 살다- 라는 것은 살고있는 순간순간이 모두 다 리얼- 일것만 같지만, 사실 정말로 실감나는 생- 이라는 것은 감지할수 없는게 아닐까. 계속 걷고있을때에도 걷다-라는것을 새삼 느껴본적 없는것처럼. 어떤 사람처럼 눈꺼풀 위에다가 문신을 해보는건 어떨까. 아프지않다면 '깜빡' 이라고 적어달라고 해야지.

술자리에서 말이 많아졌다. 외로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 숨김없이 들춰지는것 같아서 창피한 일이다. 한번 터진 입에서는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려도 잠겨지지않고 계속해서 뭔가가 무례하게 사방으로 튀기며 쏟아져나오지만, 그 것은 별로 상쾌하거나 신선하지도 않다. 크리스마스에서 와인을 세병쯤 마시고나서 앞에앉은 사람에게 혹시 남자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무심코 물었는데, 그는 사실 게이였다. 젠더가 문제겠는가, 인간을 사랑할수 있는가? 가 문제겠지.

꿈에서 만난 아버지는 늙고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머리카락은 건강한 청년처럼 자라있었다.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삼개월동안 한번도 씻지못하셨다고 하셨고, 나는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다고 하며 그 방에서 나왔지만 결국 꿈에서 깨어나버렸다. 우리는 이른 장마가 시작되기전에 아버지 묘소에 가보기로 했지만, 나는 일이 있어 갈수없게되었다. 갑자기 그것과는 상관없이 인류학관련 서적들을 읽어보고싶어졌다.

늦은 오후까지 이불속에 누워있어도 부끄럽지 않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도 반갑거나 기대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보고싶은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보고싶지 않은 그런것과 비슷한 현상일까. 생활이 무기력해지면 조금은 다짐같은것을 해봐야 하지 않나- 사는것이 무료해지고 답답해지면 뭔가 새로운 것들을 기대해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을 하고있다. 예전처럼 왜 이렇게 되었는가? 라고 묻지도 않는 나는- 나에게조차 무관심해진게 아닐까.

장면들 속에서 허락없이 빠져나온것같은 기분이랄까. 사실 던져져있지도 않아.


새벽 5시 30분. 나는. 라이프치히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베를리너 슈트라쎄 18/20번지 건물 앞에 서있다. 이곳을 빠져 나오는 동안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너무 긴장을 했던가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내가 빠져나온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길 위에는 나트륨등 조명을 받아 노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어제, 안드레이라는 브라질에서 온 친구가 눈이 많이 내린다며 부산을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한걸음 내딛어보니 내 오래된 캔버스화가 저 자신의 높이만큼 눈속에 깊이 파묻혔다. 신발 양쪽 끝이 닳아서 구멍이 나 있다. 조금 걷다보면 양말까지 젖어버릴 것만 같았다. 구멍난 신발을 독일에까지 가져간다며 핀잔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잠시 길 위에 서있는 동안, 신발이 벌써 얼얼하게 젖어오는 것 같아 나는 툭툭. 두어번 눈을 털고 길을 재촉했다.

12월들어 부쩍 라이프치히에는 눈이 오거나 비바람이 부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하고 있었다. 눈싸라기가 얼굴을 찌르며 날아드는 폭풍속을 걷다보면 마치 유배지로 끌려가는 죄수가 된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유배지로 글려가는 죄수의 기분을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가 된 것만 같았다. 왠지 한 손에 사냥총이라도 들고 있어야할 것처럼. 왠지 이런 비유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사냥총은 어디에 쓰려고? 오늘 새벽의 거리는 조용했다. 길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나는 더 크고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좁은 베를리너 슈트라쎄를 빠져나와 큰길에 이르자 도로위에 드문드문 차가 지나다녔다. 빨간색 푸조가 눈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젖은 도로위를 핥고 지나가는 듯. 그 불쾌한소리가 오히려 내 몸이 따뜻하게 해주었다. 눈을 만져볼까? 장갑 낀 손을 휘둘러서 난간 위에 쌓여있던 눈을 쓸어내린다. 그러자, 서로 뭉치지 못한 그것이 눈가루로 변하여 난간 아래 작은하천으로 부서져 떨어진다. 하천은 노인의 손등위의 실핏줄처럼 힘없이 쓸쓸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블렌딘파크까지 이어져 있다. 이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될게다.

간밤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시시한 이야기들. 나는 왜 그런 시시한 것들을 생각하느라 잠을이루지 못했을까. 갑자기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다. 찬 공기가 목구멍 끝까지 가득 차오른다. 이대로 멈출수있으면- 차디찬 심장을 가져보는건 어떨까. 기계로 된 심장을 갖겠다고 지구를 떠나던 은하철도999라는 장편 만화영화 속의 철이가 생각났다. 하지만 난 기계심장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그저 차가운 심장은 어떨까. 머리속에도, 눈가에도, 입술에도 차가운 혈류를 보낼 수 있고, 그래서 차가운 생각, 차가운 눈빛, 차가운 말투 따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숨을 멈추어도 생각은 계속될것만 같다. 순진한 발상. 하지만, 진짜로 숨을 참아볼까- 차가워질 수 있지 않을까. 흐읍! 나는 지난 일주일동안 고작 열 시간도 못잤다. 불면의 밤들. 불면증이라는것은 현대인에겐 거의 필수품에 가까운 신경증아닌가. 나는 현대인인가? 괜히 불쾌하다. 아니 벌써 숨이 가쁘다. 불면의 순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불면증을 핑계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진짜 불면이 아니다. 진짜의 불면이라는 것은, 꼬박 침대 위에서만 영원불멸의 미이라처럼 누워만있어야 한다. 이른 아침의 서광을, 그것이 비록 찬란하더라도 잔인한 그 오전의 풍경을 묵묵히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지난밤 마셨던 지독한 에스프레소를 떠올리고 후회하더라도, 아침이되면 아침이니까 다시 한잔 들이켜야한다. 그래 아침이니까! 아-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제 숨을 내쉬어야할까. 아니면 더 참아낼 수 있을까. 그럼 이런 은유는 어떨까. 불면의 나는 마치 대양위에 난파된 선박과도 같다. 긍정적이고 쾌활한 생의 대발견을 위한 대-항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대항해의 결말은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만큼이나 진부하고 뻔하다. 단지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이 극적으로 구조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과감하게 비극으로만 돌진하는 플롯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좀 더 줄수있는 정도랄까. 형이상학적인 대양 위에서, 출렁거리는 질문들 위에서, 그것을 비웃는듯 초침소리에 맞추어 - 내 이케아 탁상시계와 스와치 손목시계는 유난히 초침 소리가 크다 - 출렁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암초를 만나 우드득! 허무라는 이름의 폭풍을 만나 우드득! 그대로 배는 가라앉아버리고, 나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해수를 온몸으로 느끼며 홀로 대양위를 떠다녀야 한다. 마치 노르웨이 신화 속 인어, 싸이렌과 마주치듯 그렇게 꼭 같은 지점에서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대양위에 하나의 점이 되어, 포말이 되어, 그대로 고독이라는 상징이되어, 비극적으로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오후에 건조되고, 자정에 출항하여, 동이 트기전에 난파되어버리는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우드득- 우드득- 부서지지는것 만큼은 피하기 위해, 허무하게 가라앉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으니까. 우드득! 우드득! 소리내어 발음해보려다가 그만, 푸우- 참았던 숨을 터뜨린다. 역시 스스로 차가워지는건 불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애초에 숨을 멈추어볼까-가 아니라 숨을 참아볼까- 였더라고. 조금 우스웠다. 괜히 항해라는 은유를 쓴걸까. 정말로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나는 평생 배에 오른적도 없지 않은가. 싸이렌에 대한 신화를 읽어본적도 없지 않은가. 역시 우스웠다. 하지만 왜? 스타벅스이 사이렌의 상징을 쓰고있을까. 그것 역시 알수 없다. 그러고보니 커피를 마셔야할 시간인데. 거의 다왔다. 하천을 따라 걷다보니 라이프치히 동물원이 나왔다. 동물원 입구에 그려진 동물들의 형상이 어둠속에서 보니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미신적인 이야기나 애니미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까봐 고개를 획- 돌렸다. 아니 사실 내가 가고자 하는 블렌딘파크는 동물원 뒷편에 있기 때문에, 획- 하고 돌아가야 하는것이 맞긴 하다.

새벽 6시 정각. 드디어 블린덴파크의 입구이다. 이곳, 블린덴파크는 라이프치히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원이었다. 물론 기숙사에서도 가장 가까운 공원이기 때문에 산책하러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내가 이곳을 특히나 좋아하는 이유는 몇가지 있는데, 우선 이곳은 그 지리적 형태가 너무 초현실적이다. 마치 거대한 우주선을 위한 비행장같다고 할까, 아니면 거대한 신전같다고 해야할까. 거의 하늘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밭, 그리고 그 잔디밭 주위로 자라있는 커다란 고목들이 마치 그 한가운데에 뭔가가 내려서기를, 한없이 장엄한 무엇을 영원처럼 기다리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다시 바다-라는 은유를 사용해도 괜찮을까. 유럽대륙 한가운데에서 볼수있는 유일한 바다. 아니 그 무엇이든, 지금 저 나무숲을 뚫고 지나기만 하면 내가 보고싶은 그 풍경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게다가 오늘은 그 황홀한 대지위에 차곡차곡 눈이 쌓여있을테니 얼마나 더 아름다울것인가! 그래, 저 검은 나무숲을, 어둠속을 뚫고 지나갈수만 있다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그 숲의 입구에 가만히 서있었다. 내 앞에 늘어선 고목들이 늦은 오후처럼 찬란했던 신전의 기둥이 아닌, 까맣게 늘어선 위압적인 성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난 지금 무섭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이런 감상적인 두려움은 도데체 얼마만인지! 그 컴컴한 숲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죽음과 관련된 상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다른 경쾌한 비유를 떠올릴 수 있다면 수월할것 같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며칠전에 보았던 노스페라투의 핏기없는 얼굴의 백작이 걸어나올것만 같았다. 허허. 유럽에 와있다고 당장 소복입은 귀신이 아닌 드라큐라를 떠올리고 있다니! 참. 우습게도 나는 '이건 너무 유치하잖아!' 라는 불평의 힘으로 그 감상적인 두려움을 무찌르고 검은 성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큼성큼 걸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괜히 대담하게 걷는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 어떤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것을 반증하고 있는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두렵긴 했던가보다. 갑자기 태연하게 걷는것도, 대담하게 걷는것도, 심지어 그저 걷는것 조차도 복잡한 프로세스처럼 여겨졌다. 얼마쯤 왔을까 나무사이로 뭔가가 열리듯 환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미소까지를 지으며 그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블린덴파크.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풍경 탓에 <드디어>라는 단어를 나는 아얘 잊어버린 듯 했다. 나는 눈에 힘을주고 탐욕스럽게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상상했던 풍경은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우수에 젖은 설원이나, 동양화풍의, 여백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런 고즈넉한 설원이였는데, 뭔가 그런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감독이나 연출자를 탓할수도 없었다. 이 낯선 풍경에 대해 불평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할테니까. 사실 나는 애초에 풍경따위를 보고 감동 받는 일에 대해서 쓸데없는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든 영화 속에서든 작가가 '대자연'에 흠뻑 취해 찬미해 마지않는 그런 대목을 만나면 시큰둥하게 넘겨버릴 정도였으니까.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저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깨달음을 얻게된 주인공 알료사가 대지위에 엎드려 키스하는 명장면에서나, 혹은 까뮈의 수필 <티파사의 결혼>에서 그가 태양 아래에서, 압셍트의 향기 속에서, 과일을 깨물며 묘사한 찬미의 구절들 말이다. 아마도 그건 가본적도, 가져본적도 없는 감상에 대한 질투일 것일테고, 그것에 대한 욕심이겠지. 그래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일생일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장면을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갖게되면, 가질수 있다면, 혹시 지난 며칠간 느꼈던 외로움이나 서러움같은것을 단번에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가진다>는 말인가. 도데체 그 텅빈 공간을 바라보며 무슨말을 해야하고 무엇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모른다. 알료사처럼 당장 대지위에 엎드려 키스를 해볼까. 아니면 까-뮈를 흉내내볼까. 하지만 '압셍트의 향기'라는 것의 근처에도 가본적없지 않는가. 설레는 기분은 이미 간데없고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한밤중에 높은 성벽을 지나, 귀중한 어떤 것을 훔쳐내기라도 할 것 처럼 점점 더 초조해지기만 했다. 아니, 나는 왜 섣부르게 '일생일대의' 라는 한정사 따위를 생각해 냈을까. 갑자기 불길한 느낌. 도데체 무슨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홀로 거대한 풍경앞에 서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몇분이 지나도록 멍하게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더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만큼 집중해 있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구름 낀 하늘인데도, '12월의 새벽하늘'이라고 하기엔 너무 밝은 하늘. 그리고 그 빛깔은 거의 황토색에 가까웠다. 황토색의 하늘이라니! 나는 한번 실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내려온, 내 시야에서 가장 먼 곳을 응시했다. 그 곳에는 내가 방금전에 지나왔던 검은 성벽이 수평선을 따라서 먼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미 지나온 풍경이라서 그런지 왠지 낯설지 않고 믿음직했다. 다만 나무들은 수평선에 가까울수록 나무가 아니라, 그저 검은 띠에 가까워 보였다. 그것도 발기발기 찢어진채로. 그리고 다시 그 아래 하늘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잔디. 잔디? 그것은 잔디밭도 아니고 하늘의 반댓말인 <땅>도 아니었다. 차라리 텅빈 하늘이 계속 이어져있다라고 할까. 잔디밭 위로 쌓인 눈이 하늘빛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번엔 실소가 아니라 탄성을 질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전체를 조망하니, 풍경은 그저 커다랗게 뚤린 황토빛 공간 위에 그어진 검은 선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내가 공간속에 서있는기는 한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반추상에 가까운 그 풍경속에서 나는 얼어버린 듯, 그대로 나조차 화면이 되어버린듯 멈춰버렸다.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 비구상의 화면속에, 추상적인 무대위에 발을들여 놓는 순간, 나따위는 금방 뒤틀리고 일그러질것만 같았고, 현실적인 지각과는 무관한 세계로 끝없이 떨어질것만 같았다. 뭔가 뒤바뀐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가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바라봄을 당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번엔 탄성이 아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감고 걷기 시작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기꺼이 비틀리고 일그러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 텅 빈 공간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넘어지더라도 떨어지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아늑할 것 같았다. 그냥 걷고있다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불면의 시간들 처럼 부유하는 느낌이 아니라 온전히 무게를 느끼는, 내가 나 스스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그 느낌이 따스했다. 얼마 걸었을까 다시 눈을뜨고 바라보았다. 머리위와 발 아래로 빈 공간, 그리고 그 경계에 검은나무들이 저 멀리서 나를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수백만의 군중이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알것 같았다. 내가 정확히 그 빈 공간의 중심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을. 아- 이건 너무 인간적인 허영이 아닌가! 나는 탄식했다.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며칠 밤, 대양위를 홀로 표류하며 외로움에 떨어야 했던 이유를, 아무도 없는, 아무도 찾지않는 시간에, 블렌딘파크를 찾은 이유를. 그것은 마치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꼭대기에 올라 서야만 하는 허영심이었고, 산정에 올라갔었노라고 어떻게든 발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약함이었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더 절대적인 고독을 찾아서, 나는 그 망령을 좆아서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발설하지 않을 수 없는 척박한 정상을 맛보기 위해서. 누구도 느껴본 적 없는 장면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 그 허영을 위해! 아-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구에게든 달려가 그것을 고백하고 싶은 그 심약함을, 모두의 머리 위에 서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인하고자 하는 그 허영을 당장에 내팽개쳐버리고 싶었다. 대체 어디가 더 높은 곳이고 어디가 더 낮은곳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는 하늘과 땅조차 의미없지 않은가. 나는 그 인간성들을 배신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자. 아무에게도 이 장면을 나누어주지 말자.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허영이라는 신에게 바칠 제물로써 바로 그 허영심을 내놓은 것 같았다. 그것도 눈먼자를 상징하는 블렌딘파크에서! 그 엉뚱한 반전이, 그 아이러닉한 결말이 나를 희열에 차오르게 했다. 홀로 충만하다.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나는 지금 충분하다. 차라리 완전하다. 나는 신이나서 미친사람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고 지금, 그것에 대해 쓴다. 아무도 알지못하는 그 기이한 풍경을 통째로 소유하기 위해서. 이기는- 아니 허영은 나를 절대로, 한번도 놓아준 적 없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만큼 할 수 없는 얘기도 많고, 우주에서든, 화곡3동에서든 '세상이 엉터리로 굴러가고 있다' 라고 술잔을 엎지르며 이야기 하고 싶지. 근데, 너는 왜이렇게 많고, 너는 왜이렇게 어렵고, 너는 왜이렇게 구식이기만 한지- 금방 또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얼굴도 보기 싫어지는거야. 상업성도, 예술성도 떨어지는 '너'라는 영화는 완전히 실패작이다. 우리는 경제학도들게 확실히 포위당해 있고, 거의 위기에 가깝지만, 아무도 도망칠 생각은 안하지- 온갖 방법론과 레시피와 테라피가 가득한 세상이니까. 가짜들의 옷을 가장 폭력적인 태도로 찢어버리고서는 아무 관심없다는 듯 돌아서고 싶다. 하지만 나도 가짜니까. 조용히- 가만히- 얌전히- 스스로를 폭로하자. 그것 뿐이야. 한심한 너. 게으른 나. 엉터리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지. 데이빗 보위의 모든 디스코그라피를 단번에 구해서, 단숨에 들어볼 수 있는 세상이니까.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다음 작품의 음악은 톰요크가 담당하기로 했다는 소식조차도 버퍼링 없이 알 수 있는 세상이니까. 감사해. 고맙다- 불평할수조차 없잖아.

독일식 포말과 껌 붙은 닐 암스트롱

요 며칠, 아침에 눈을 뜨고 가뿐하게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면 안에서부터 썩어버린 통조림을 흔들 때 처럼 머릿속에서 잠이 덜깬 망상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털썩 쓰러져 버렸고, 길을 걸을 때엔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뭔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는 떨그럭 거리는 상념들이 껌 처럼 꼴사납게 내 바짓가랭이에 엉겨붙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화 라는 것을 시도해보려고 하면, 마치 좌초된 유조선을 삼키기라도 한 것 처럼 침샘에서 꾸역꾸역 벤진이 세어나오는 것 같아 차마 입을 열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돌아온 처음 일주일 동안 만큼은 어땠는가, 아침에 일어날 때엔 마치 형광등이 켜질 때 전류가 필라멘트를 지나며 나는 듯 한 상쾌한 비명을 지르며 일어날 수 있었고, 걸음을 걸을 때엔 마치 미처 발을 내딛어보지도 못한 채 공중에서 뒤뚱거리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의 몸 처럼 가벼웠고, 말을 할 때엔 는 마치 기원전 1만 5천년전 에스빠냐 알타미라 동굴벽화 속 들소의 그림 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는가. 마치 지구에서의 보낸 일주일 이기라도 한 것 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일주일 사이에 형광등은 썩은 통조림으로, 닐 암스트롱은 발바닥에 엉켜붙은 껌으로, 에스빠냐 초원의 싱그럽던 들소는 좌초된 유조선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 일주일 동안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안쓰럽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이사람, 저사람에게 다시 나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독일의 불쾌하게 내리는 비처럼 포말의 형태를 마다않고 뉘앙스를 풍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가소롭게도 나에게 '인간관계'란 그저 내 존재감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형성' 된다고 믿는 것인지라, 이미 뭔가가 나로인해 오염되었거나, 뭔가가 나에게 감염되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체 독일식 포말과 껌붙은 닐 암스트롱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오염과 감염 양 염의 주범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닌 '관계를 향한 의지'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냉장고에서 패스트푸드를 꺼내오듯 굳이 신화를 빌어 올 것도 없다. 라디오 헤드의 '데어, 데어' 뮤직비디오에서 숲으로부터 도망치던 톰 요크가 나무로 변해버려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처럼. 내가 다시 달아나지 못하도록 내 몸에서 뿌리가 자라 지반 위에 감금되어버린, 그런 기분인 것이다. 내게 있어서 달갑지 않은 그 뿌리가 자랄 수 있게 해주는 '자양분'으로서의 상징은 정확하게 '인간관계'로 대치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들뢰즈가 사물의 의미를 지시나 의도 혹은 기호작용이 아닌 이웃한 항들과의 이웃관계에 의해 정의하듯) 이 '자양분-뿌리-나무' 의 계열화가 '순환'이나 '생명'의 의미로 해석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양분(관계)-뿌리-나무(로 변해가는 톰요크)'의 계열화로서, 즉 '구속' 내지는 '부자유'로 해석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바라는 것도 많지)

  하지만, 불쾌한 비유와 상징을 난발해 가며 한 껏 멋있는 채 이야기 한다고 해서 '철 없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라는 식의 냉엄한 말에서 비껴 갈 수는 없는 법. 그러므로, 지구에서의 일주일이 마치 형광등이 켜질 때 에스빠냐 들소를 배경으로 닐 암스트롱이 뒤뚱거리는 것 처럼 황홀한 순간이었다 해도, 더 많은 날들을 나는 통조림을 머리에 인 채 상념이라는 족쇄를 발목에 차고 벤진을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할 것이 분명하므로, 계속해서 나는 독일식 포말과 껌 붙은 닐 암스트롱과의 관계를 겸손하게 포행하듯 탐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황금빛 수의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후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내게 무엇인가 커다란 의미를 깨닫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다음 문장을 이어가기만 하면 나는 정말 많은 것들에 대해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며, 내가 그것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마치 사막 위를 날던 굶주린 독수리처럼 아버지의 죽음을 발견하고는 그의 주위를 맴돌며 날것의 은은한 향기를 만끽하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아버지의 일터에서 고철을 꽝꽝 던질 때에도, 햇볕이 좋은 날 아무 생각없이 버스에 앉아 있을 때에도, 이름모를 감독의 오래된 영화를 몇 편 씩 감상 할 때에도, 오랫만에 동기들과 만나 술자리를 할 때에도 하나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의 이미지가 내게 의문을 줄 것이고, 의미를 줄 것이고, 그럴싸한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그 이미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날 아침 아버지의 입관을 치르던 날의 이미지를.

그 날 우리는 두 명의 염사원들이 시체검안소 한켠에서 노련한 솜씨로 아버지에게 고운 황금빛 수의를 입혀드리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축 쳐진 팔이 그들이 움직이는대로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것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수의를 입히는 일이 끝나자 염사원들은 우리들에게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며 마지막으로 한번씩 만져 보라고 권했고, 아버지의 주위를 차례차례 돌며 어머니와 형, 누나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부둥켜 안고 오열했다. 나는 그 때 가만히 아버지의 감은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들 염사원들이 혹시 내게 '눈 앞에 존재하는 그 몸이 곧 죽음입니다' 라고 말한 것인가, 아니면 '자 여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죽음이 있으니 한번 만져보세요.' 라고 말한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하마터면 실소를 할 뻔 했다. '나'라는 세계가 뒤엉키는것만 같았고 곧장 머리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날의 이미지에 관해서, 그 '만질 수 있었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든 쓰고 싶었다. 나는 그 날의 슬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것은 내게 너무도 커다란 슬픔이어서, 슬픔의 척도는 무엇인가를 대해 이야기하던 나는, 비장함을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골몰하던 나는, 그 생경한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노라고. 그리고 나는 그 날 마주친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관념은 마치 그날 아버지의 축 쳐진 팔처럼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무거운 것이어서 그 것은 만질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노라고.

나는 의욕적으로 텍스트 파일들을 생성해 나갔다. 슬픔을 느낄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서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가,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에 대해서, 또 갑자기 허무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면서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이 글은 조악한 문장들로 지저분해 졌고, 글 속의 화자는 강박에 시달리는 신경증 환자처럼 추하게 변해갔다. 굶주린 독수리는 어느새 시체 위에 내려앉아 머리를 처박고 열심히 살점을 뜯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에서야 간신히 그 지독한 허영이라는 이름의 독수리들을 내 쫒고, 아버지에게 다시 멋진 황금빛 수의를 입히고 향불을 피우기로 한다.

나는 맨 처음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그래서 나는 많이 슬펐다.' 라는 문장으로 끝맺음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좀 더 많이 울고 위로 받았어야 했다.


어떤 두려움. 어떤 침묵. 어떤 불발탄.

만원어치의 소비. 아메리카노, 물은 되도록 적게. 그 다음엔 더블 에스프레소. 마지막으로 땅콩과 버드와이저. 그것을 소비하는 동안, 혹은 그것을 지불한 댓가로 생산 해 낸 것은 고작 Untitled 1.txt, Untitled 2.txt 그리고 Untitled 3.txt. 각각의 페이지에는 '적을 제조하는 법', '가보지 않은 영토', '그것들을 지금의 내 입장에서' 라는 따위의 문장들이 두서 없이 타이핑 되어 있다. 핸드폰을 연다. 엄지손가락으로 액정을 문지른다. 그리고 다시 닫는다. 너무 낡은게 아닌가. 다시 핸드폰을 연다. 받은 메세지함. 다시 엄지손가락. 다시 닫는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어떤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제인버킨의 어릴적 머리스타일.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몇 몇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짧게 쓰자' 라고 말해버린다. 그 한마디 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갑자기 제인버킨과 눈이 마주친다. 눈길을 피하자 이번엔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라는 문장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 액정에 써진 어떤이의 이름과 눈이 마주친다. '당장 그 이름을 책상위에 던져놓고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단념한 채 제인버킨과 이별해야 겠다' 라고 생각한다. 황급히 던힐과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파워북과 어댑터를 가방에 넣고, 시계를 차고 자켓을 입는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반대편 의자 위에 읽다만 플라톤. 만원을 지불하고. 뒷문을 통해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오늘은 유난히 사람이 많다.

**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눕는다. 벽 가까이 코를 대고 돌아 눕는다. 눈을 껌뻑이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다. 연휴 마지막 날. TV소리가 시끄럽다. 싸구려 쇼 프로그람에서 어떤 코미디언의 방정맞은 웃음 소리. 방청객들도 같이 따라 웃는다. 익숙한 환호 소리. 베게 속으로 얼굴을 구겨 넣는다. 이번엔 홈 쇼핑 채널. 쇼호스트의 방정맞은 목소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번엔 오래된 홍콩영화. 알수 없는 언어. 과장된 효과음. 다시 홈쇼핑 채널. 그리고 다시 싸구려 쇼 프로그램. TV소리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잠을 잘 수가 없다. 가만히 눈을 껌뻑이며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번쩍이는 TV수상기 앞에 무덤처럼 누워계신 아버지는 그렇게 쓸쓸하다. 채널을 바꿀 때 마다 꾹꾹 리모컨을 누르는 그의 엄지손가락은 그렇게 외롭다. TV소리가 그친다. 날카로운 기침소리. 궁색한 침묵. 누추한 고요. 갑자기 비가 내린다. 그러자 전봇대 옆에 세워져 있던 음식쓰레기가 소각 되는 소리. 그런 것은 없다. 되도록 정확한 발음을 위해 입술을 조목조목 움직여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다시 한번 소리 없이 발음 해 본다. 외로움을 극복한 죄로, 슬픔을 멸시한 죄로, 사랑을 폐기한 죄로, 나는 말하는 법을 빼앗기고, 불안을 빼앗기고, 우울을 빼앗겼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영토.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또 한번 말하고 나서 '그렇다면 희극이어야 할까' 라고 천진하게 묻는다. 대답이 없자 나는 '이것 또한 외로움인가' 하고 생각한다.

Louise - Lester young

입안에 씁쓸한 싸구려 맥주맛.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걸 보니 이건 분명 벡스인가보다. 몇병이나 마신거지. 그리고 이건 분명 Lester Young 일꺼야. 나는 술에 취해 바 한켠 테이블 위헤 엎드려 있고. 나의 친구는 이미 술값을 지불하고 집에 가버렸고. 그런 상황인가보다. 집에 가야되는데. 이 곳엔 나밖에 없는 걸까. 음악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군. 술 집 주인은 분명 투덜거리고 있을꺼야. 저새끼는 도데체 언제 가나 하고. 근데 우리는 결론을 내렸던가? 여지껏 무슨 이야기를 한거지. 술 값은 이미 계산한건가? 그래 결론이란게 있었던 것 같긴 해. 난 울기라도 한건가 제기랄 도무지 눈을 뜰수가 없네. 그나저나 저 레이스터 영. 왜 아직 연주를 저리 열심히 하고 있는거지. 날 위해서? 저녀석도 나만큼 취한걸까? 모르겠다. 음악이 끝날 때 까지만 누워있지 뭐. 어차피 난 한가지 옳은 선택을 했고. 옳은 선택이 옳다고 믿기 위해서 옳지 못했던 선택도 옳다고 믿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나는 옳은 선택을 한거야. 저 색소폰 연주가 끝날 때 까지만 엎드려 있자.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가 솔로연주를 하기 시작하면 조금 어지러울 테지만 고개를 들고 여길 뜨는거야. 나갈 때에는 술집 주인에게 건방지게 웃어줘야지. 아까 그 팔레스타인에서 왔다던 아랍녀석이 조국을 위해 자살폭탄 테러를 했다던 지 친구 사진을 보여줬던 건 정말이지. 음. 그나저나 저 드럼 연주는 정말 일품인걸. 아트 블레키 씨가 울고 가겠어. 근데 그거 알아?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는 38년도 음반이 가장 오래된거야. 근데 60년, 61년엔 아무런 디스코그라피도 가지고 있지 않아. 제길. 아 들어봐. 이제 다 같이 연주하는군, 저 곡이 무슨 곡이더라. 루.. 루.. 루로 시작하는데 기억이 안나. 집에 가야하는데. 왜 그들은 아직도 신나게 연주를 계속 하는걸까. 가만, 그러고보니 여긴 어디지. 내가 누구를 따라왔던가? 내가 이런 미제 재-즈바를 가자고 했을리는 없잖아. 아직 여기는 구라파인가. 그저 눈 감고 있을 뿐인데 도무지 어딘지 알 수 없군. 어어 비가 오나. 아니 눈이 내리는 건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군. 이 시간에도 트램이 다니나? 모르겠어. 모르겠어. 아니 알고 있는데.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거. 그건 알고있어. 왜냐구? 또 설명해야해? 올은 선택이 옳다고 믿기 위해서 옳지 못했던 선택도 옳다고 믿어야 한다니까. 그리고 생각해야해, 피. 피에 가까운 생각을 해야해. 내 피.

나의 눈이 멀게된 사연

새벽 5시 30분. 나는. 라이프치히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베를리너 슈트라쎄 18번지 건물 앞에 서있다. 이곳을 빠져 나오는 동안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너무 긴장을 했던가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내가 빠져나온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길 위에는 나트륨등 조명을 받아 노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어제, 안드레이라는 브라질에서 온 친구가 눈이 많이 내린다며 부산을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한걸음 내딛어보니 내 오래된 캔버스화가 저 자신의 높이만큼 눈속에 깊이 파묻혔다. 신발 양쪽 끝이 닳아서 구멍이 나 있다. 조금 걷다보면 양말까지 젖어버릴 것만 같았다. 구멍난 신발을 독일에까지 가져간다며 핀잔을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잠시 길 위에 서있는 동안, 신발이 벌써 얼얼하게 젖어오는 것 같아 나는 툭툭. 두어번 눈을 털고 길을 재촉했다.

12월들어 부쩍 라이프치히에는 눈이 오거나 비바람이 부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하고 있었다. 눈싸라기가 얼굴을 찌르며 날아드는 폭풍속을 걷다보면 마치 유배지로 끌려가는 죄수가 된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유배지로 글려가는 죄수의 기분을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런건 어떨까,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가 된 것만 같았다- 라고. 한 손에 사냥총이라도 들고 있어야할까. 왠지 이런 비유가 더 마음에 든다. 하지만 사냥총은 어디에 쓰려고? 오늘 새벽의 거리는 조용했다. 길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나는 더 크고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좁은 베를리너 슈트라쎄를 빠져나와 큰길에 이르자 도로위에 드문드문 차가 지나다녔다. 빨간색 푸조가 눈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젖은 도로위를 핥고 지나가는 듯. 그 불쾌한소리가 오히려 내 몸이 따뜻하게 해주었다. 눈을 만져볼까? 장갑 낀 손을 휘둘러서 난간 위에 쌓여있던 눈을 쓸어내린다. 그러자, 서로 뭉치지 못한 그것이 눈가루로 변하여 난간 아래 작은하천으로 부서져 떨어진다. 하천은 노인의 손등위의 실핏줄처럼 힘없이 쓸쓸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블렌딘파크까지 이어져 있다. 이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될게다. 간밤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시시한 이야기들. 나는 왜 그런 시시한 것들을 생각하느라 잠을이루지 못했을까. 갑자기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다. 찬 공기가 목구멍 끝까지 가득 차오른다. 이대로 멈출수있으면- 차디찬 심장을 가져보는건 어떨까. 기계로 된 심장을 갖겠다고 지구를 떠나던 은하철도999라는 장편 만화영화 속의 철이가 생각났다. 하지만 난 기계심장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그저 차가운 심장은 어떨까. 머리속에도, 눈가에도, 입술에도 차가운 혈류를 보낼 수 있고, 그래서 차가운 생각, 차가운 눈빛, 차가운 말투 따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숨을 멈추어도 생각은 계속될것만 같다. 순진한 발상. 하지만, 진짜로 숨을 참아볼까- 차가워질 수 있지 않을까. 흐읍! 나는 지난 일주일동안 고작 열 시간도 못잤다. 불면의 밤들. 불면증이라는것은 현대인에겐 거의 필수품에 가까운 신경증아닌가. 나는 현대인인가? 괜히 불쾌하다. 아니 벌써 숨이 가쁘다. 불면의 순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불면증을 핑계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진짜 불면이 아니다. 진짜의 불면이라는 것은, 꼬박 침대 위에서만 영원불멸의 미이라처럼 누워만있어야 한다. 이른 아침의 서광을, 그것이 비록 찬란하더라도 잔인한 그 오전의 풍경을 묵묵히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지난밤 마셨던 지독한 에스프레소를 떠올리고 후회하더라도, 아침이되면 아침이니까 다시 한잔 들이켜야한다. 그래 아침이니까! 아-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제 숨을 내쉬어야할까. 아니면 더 참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우드득- 우드득- 부서지는것 만큼은 피하기 위해, 허무하게 가라앉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으니까. 우드득! 우드득! 소리내어 발음해보려다가 그만, 푸우- 참았던 숨을 터뜨린다. 역시 스스로 차가워지는건 불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애초에 숨을 멈추어볼까-가 아니라 숨을 참아볼까- 였더라고. 조금 우스웠다. 괜히 항해라는 은유를 쓴걸까. 정말로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나는 평생 배에 오른적도 없지 않은가. 싸이렌에 대한 신화를 읽어본적도 없지 않은가. 역시 우스웠다. 하지만 왜? 스타벅스가 사이렌의 상징을 쓰고있는것일까. 그것 역시 알수 없다. 그러고보니 커피를 마셔야할 시간인데. 거의 다왔다. 하천을 따라 걷다보니 라이프치히 동물원이 나왔다. 동물원 입구에 그려진 동물들의 형상이 어둠속에서 보니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미신적인 이야기나 애니미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까봐 고개를 획- 돌렸다. 아니 사실 내가 가고자 하는 블렌딘파크는 동물원 뒷편에 있기 때문에, 획- 하고 돌아가야 하는것이 맞긴 하다.

새벽 6시 정각. 블린덴파크의 입구. 이곳, 블린덴파크는 라이프치히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원이었다. 물론 기숙사에서도 가장 가까운 공원이기 때문에 산책하러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내가 이곳을 특히나 좋아하는 이유는 몇가지 있는데, 우선 이곳은 그 지리적 형태가 너무 초현실적이다. 마치 거대한 우주선을 위한 비행장같다고 할까, 아니면 거대한 신전같다고 해야할까. 거의 하늘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밭, 그리고 그 잔디밭 주위로 자라있는 커다란 고목들이 마치 그 한가운데에 뭔가가 내려서기를, 한없이 장엄한 무엇을 영원처럼 기다리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다시 바다-라는 은유를 사용해도 괜찮을까. 유럽대륙 한가운데에서 볼수있는 유일한 바다. 아니 그 무엇이든, 지금 저 나무숲을 뚫고 지나기만 하면 내가 보고싶은 그 풍경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게다가 오늘은 그 황홀한 대지위에 차곡차곡 눈이 쌓여있을테니 얼마나 더 아름다울것인가! 그래, 저 검은 나무숲을, 어둠속을 뚫고 지나갈수만 있다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그 숲의 입구에 가만히 서있었다. 내 앞에 늘어선 고목들이 늦은 오후처럼 찬란했던 신전의 기둥이 아닌, 까맣게 늘어선 위압적인 성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난 지금 무섭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이런 감상적인 두려움은 도데체 얼마만인지! 그 컴컴한 숲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죽음과 관련된 상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다른 경쾌한 비유를 떠올릴 수 있다면 수월할것 같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며칠전에 보았던 노스페라투의 핏기없는 얼굴의 백작이 걸어나올것만 같았다. 허허. 유럽에 와있다고 당장 소복입은 귀신이 아닌 드라큐라를 떠올리고 있다니! 참. 우습게도 나는 '이건 너무 유치하잖아!' 라는 불평의 힘으로 그 감상적인 두려움을 무찌르고 검은 성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큼성큼 걸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괜히 대담하게 걷는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 어떤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것을 반증하고 있는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두렵긴 했던가보다. 갑자기 태연하게 걷는것도, 대담하게 걷는것도, 심지어 그저 걷는것 조차도 복잡한 프로세스처럼 여겨졌다. 얼마쯤 왔을까 나무사이로 뭔가가 열리듯 환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미소까지를 지으며 그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블린덴파크.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풍경 탓에 <드디어>라는 단어를 나는 아얘 잊어버린 듯 했다. 나는 눈에 힘을주고 탐욕스럽게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상상했던 풍경은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우수에 젖은 설원이나, 동양화풍의, 여백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런 고즈넉한 설원이였는데, 뭔가 그런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감독이나 연출자를 탓할수도 없었다. 이 낯선 풍경에 대해 불평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할테니까. 사실 나는 애초에 풍경따위를 보고 감동 받는 일에 대해서 쓸데없는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든 영화 속에서든 작가가 '대자연'에 흠뻑 취해 찬미해 마지않는 그런 대목을 만나면 시큰둥하게 넘겨버릴 정도였으니까.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저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깨달음을 얻게된 주인공 알료사가 대지위에 엎드려 키스하는 명장면에서나, 혹은 까뮈의 수필 <티파사의 결혼>에서 그가 태양 아래에서, 압셍트의 향기 속에서, 과일을 깨물며 묘사한 찬미의 구절들 말이다. 아마도 그건 가본적도, 가져본적도 없는 감상에 대한 질투일 것일테고, 그것에 대한 욕심이겠지. 그래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일생일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장면을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갖게되면, 가질수 있다면, 혹시 지난 며칠간 느꼈던 외로움이나 서러움같은것을 단번에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가진다>는 말인가. 도데체 그 텅빈 공간을 바라보며 무슨말을 해야하고 무엇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모른다. 알료사처럼 당장 대지위에 엎드려 키스를 해볼까. 아니면 까-뮈를 흉내내볼까. 하지만 '압셍트의 향기'라는 것의 근처에도 가본적없지 않는가. 설레는 기분은 이미 간데없고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한밤중에 높은 성벽을 지나, 귀중한 어떤 것을 훔쳐내기라도 할 것 처럼 점점 더 초조해지기만 했다. 아니, 나는 왜 섣부르게 '일생일대의' 라는 한정사 따위를 생각해 냈을까. 갑자기 불길한 느낌. 도데체 무슨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홀로 거대한 풍경앞에 서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몇분이 지나도록 멍하게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더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만큼 집중해 있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구름 낀 하늘인데도, '12월의 새벽하늘'이라고 하기엔 너무 밝은 하늘. 그리고 그 빛깔은 거의 황토색에 가까웠다. 황토색의 하늘이라니! 나는 한번 실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내려온, 내 시야에서 가장 먼 곳을 응시했다. 그 곳에는 내가 방금전에 지나왔던 검은 성벽이 수평선을 따라서 먼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미 지나온 풍경이라서 그런지 왠지 낯설지 않고 믿음직했다. 다만 나무들은 수평선에 가까울수록 나무가 아니라, 그저 검은 띠에 가까워 보였다. 그것도 발기발기 찢어진채로. 그리고 다시 그 아래 하늘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잔디. 잔디? 그것은 잔디밭도 아니고 하늘의 반댓말인 <땅>도 아니었다. 차라리 텅빈 하늘이 계속 이어져있다라고 할까. 잔디밭 위로 쌓인 눈이 하늘빛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번엔 실소가 아니라 탄성을 질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전체를 조망하니, 풍경은 그저 커다랗게 뚤린 황토빛 공간 위에 그어진 검은 선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내가 공간속에 서있는기는 한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반추상에 가까운 그 풍경속에서 나는 얼어버린 듯, 그대로 나조차 화면이 되어버린듯 멈춰버렸다.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 비구상의 화면속에, 추상적인 무대위에 발을들여 놓는 순간, 나따위는 금방 뒤틀리고 일그러질것만 같았고, 현실적인 지각과는 무관한 세계로 끝없이 떨어질것만 같았다. 뭔가 뒤바뀐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가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바라봄을 당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번엔 탄성이 아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감고 걷기 시작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기꺼이 비틀리고 일그러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 텅 빈 공간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넘어지더라도 떨어지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아늑할 것 같았다. 그냥 걷고있다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불면의 시간들 처럼 부유하는 느낌이 아니라 온전히 무게를 느끼는, 내가 나 스스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그 느낌이 따스했다. 얼마 걸었을까 다시 눈을뜨고 바라보았다. 머리위와 발 아래로 빈 공간, 그리고 그 경계에 검은나무들이 저 멀리서 나를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수백만의 군중이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알것 같았다. 내가 정확히 그 빈 공간의 중심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을. 아- 이건 너무 인간적인 허영이 아닌가! 나는 탄식했다.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며칠 밤, 대양위를 홀로 표류하며 외로움에 떨어야 했던 이유를, 아무도 없는, 아무도 찾지않는 시간에, 블렌딘파크를 찾은 이유를. 그것은 마치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꼭대기에 올라 서야만 하는 허영심이었고, 산정에 올라갔었노라고 어떻게든 발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약함이었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더 절대적인 고독을 찾아서, 나는 그 망령을 좆아서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발설하지 않을 수 없는 척박한 정상을 맛보기 위해서. 누구도 느껴본 적 없는 장면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 그 허영을 위해! 아-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구에게든 달려가 그것을 고백하고 싶은 그 심약함을, 모두의 머리 위에 서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인하고자 하는 그 허영을 당장에 내팽개쳐버리고 싶었다. 대체 어디가 더 높은 곳이고 어디가 더 낮은곳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는 하늘과 땅조차 의미없지 않은가. 나는 그 인간성들을 배신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자. 아무에게도 이 장면을 나누어주지 말자.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허영이라는 신에게 바칠 제물로써 바로 그 허영심을 내놓은 것 같았다. 그것도 눈먼자를 상징하는 블렌딘파크에서! 그 엉뚱한 반전이, 그 아이러닉한 결말이 나를 희열에 차오르게 했다.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나는 지금 충분하다. 홀로 충만하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완전함.

나는 그리고 지금, 그것에 대해 쓴다. 아무도 알지못하는 그 기이한 풍경을 통째로 소유하기 위해서. 이기는- 아니 허영은 나를 절대로, 한번도 놓아준 적 없었던 것이다.


미레이유

2도 화상 따위는 그 어떤 구실도 상징도 되어주지 못했다.
북경 시내를 열 두 시간 걷는 것 만큼 바보 짓이다.

두 문장을 써 놓고 잠이들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얼굴을 모르는 어떤 젊은 친구들과 광대극 같은걸 준비하고 있었다. 유랑 서커스단원인지, 학예회 연극 공연을 준비하던 학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는 공연을 몇시간 앞두고, 높은 철탑 위에 매달린 채로 얼굴에 분장을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는 갑자기 바닥에 까맣게 고인 빗물을 찍어 바르기 시작했다. 왼쪽 눈에 먼저 서툰 솜씨로 바르고 나서 동료를 향해 웃어보이며 어떤지를 물어보았다. 다시 한번 새끼손가락에 빗물을 찍어 오른쪽 눈에도 까맣게 칠해 놓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렇게 목놓아 울었다. 눈물에 뭉게져 풍경들은 왜곡되고 동료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챙피하게도 계속해서 울었다. 질끈 눈을 감았을 때 뺨위에 흐르던 뜨거움이 생생하다. 벨엔세바스챤의 slow graffiti 라는 곡이 멀리서 들려오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직 옆에 서 있던 광대만이 등을 두두리며 뭐라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멋적은 표정으로 나는 어딘가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는데 그 얼굴은 마치 마스카라가 엉망으로 번져버린 미레이유의 얼굴 같았다.

그 때 갑자기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는지 하늘 가득 꽃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우리 모두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그 빨갛고 파란 종이조각들은, 할인마트에서나 나누어 줄 법한 쿠폰 스키터들이었다. 우리는 폭소했고, 또 다시 어딘가로 분주하게 이동했다.

며칠 전 처음 만난 어떤 시인 앞에서 울었던 것 만큼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꿈이었다.


unsere WG

그리스에서 온 마리오스는 하루 종일 크리스탈이라는 이름을 종이에 그리고 있었고, 칠레에서 온 마쿠스는 어젯밤 밤새도록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온 줄리아노는 오늘도 모리스바리스타이에서 느끼한 춤을 추고 있을 것이고, 두바이에서 온 무하마드는 어디선가 처음만난 여자에게 자기는 차가 두대가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벨기에에서 온 기요르기는 두시간동안 카토펠른을 폼프릿츠로 만드는일에만 열중 해 있을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크리스는 호주머니에서 포크를 꺼내서 툰피쉬를 얌얌 쪼아먹고 있겠지. 그리고 난, 네 시간 째 데이빗 보위만 듣고 있다.

그래 데이빗 보위가 있으니까. 괜찮아.

거시적 안목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익숙한 링크들을 반복해서 누르고, 거기에 씌여진 무엇인가를 읽기도 하고, 또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 채, 가끔은 히죽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울상을 짓기도 한다. 빈 화면을 스크롤 하고 있으면서도, 내 시선이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고 있는데도, 아무 이유도 묻지 않는다. 마치 15인치 모니터에 나를 투영해 보아야만 비로소 에고는 발현 될 수 있고, 만족 할 수 있다는 듯 그렇게. 하지만, 겨우 그것으로 부터 시선을 거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혹은 고작) 여기 먼 도시, 작은 방, 작은 전등 아래 앉아 있을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나는 그 누구도 껴안을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다. 사실은 그게 전부이다. 별거 없다는 사실.

북경에서 온 편지

애초에 계획 된 일정도 아니었고, 급하게 야간열차 표를 구해 출발했던 북경. 필름 아홉 롤과 열 두 페이지의 메모.

북경이라는 도시에서 '이 곳에서는 무엇이든 정말 크고 넓구나' 라는 감탄 이외에 거대함에서 오는 숭고미崇高美 따위를 애써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마에 '나는 자랑스럽다' 라는 말을 크게 써붙인 사람을 바라보는 것 처럼 직설적인 그들의 화법이 진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수많은 전동 자전거와 덜덜거리는 삼륜차, 온갖 종류의 복스봐겐들이 한데 뒤엉켜 곡예를 하듯 달리던 알려지지 않은 북경의 뒷 골목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택시기사들은 중앙선을 넘나들며 가까스로 횡단하는 사람들을 피해 운전하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8차선 대로를 무작정 건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불평도, 공포도, 각박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극도로 무질서한 가운데 느껴지는 무신경하고 무덤덤한 어떤 여유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도자기와 금불상, 동양미술사 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산수화들를 찾아보기도 했고 북경에 가면 꼭 봐야한다던 곳들을 둘러 보기도 했지만, 그저 '이것이 그것이로구나' 라는 짧은 단상 이외에 별다른 감흥도 느끼지 못해서 아쉬웠다. 아마도 내게 문화적, 역사적, 미적 소양이 기준 미달이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찬탄의 대상이라는 것이 내겐 어딘가에 엉뚱한 곳에 따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적한 호숫가에 앉아서 하늘빛과 물빛이 같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풍경들을 반나절 동안 앉아서 바라 본다던가 북경동물원의 코끼리의 느린 진흙 목욕을 유심히 관찰 한다거나 겹겹이 하늘에 그어진 버드나무 잎들을 멀뚱하게 올려다 본다던가 하는 일이 내겐 더 매력적인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끊임 없이 변하는 무엇을 지켜보는 일. 그런 것들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참 좋았다. 외치고 싶은 이름은 있지만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내 앞에 데려다 놓기엔 미안한 정도의 그리움.

처음 중국에 가기로 했을때, 짐을 싸면서 유일하게 가져온 책이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 이었던걸 보면 이 곳에 와서 어떤 마음속의 <결단> 이라던가 <혁명> 따위가 일어나고 맺어지길 바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치기어린 바램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밤새 야간열차 위에서 잠을 설친 시간 만큼, 자금성에서 북경동물원까지 힘을 다해 걸었던 만큼, 가슴 속에서 뭔가가 맺어져 있거나 해결 되어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돌이켜보면, 그저 여기저기 무작정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아무데나 걸터 앉아서 뭐든 노트에 끄적거리는 짓은 서울에서나 북경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뭔가가 해결되지 않았거나, 맺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중국식의 무신경함과 무덤덤한 여유나 배짱 이라도 가지고 돌아가길 희망한다.

참 두렵다. 결국 어디든 항상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꼴라주 혹은 몽타주

인사동 까만 보도블럭 위에 벗어져있던 흰색 운동화는 떠나고 난 뒤에 버려졌던 것인지, 출발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인지. 지하철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지상으로 미끌어져 나올 때에 쏟아져 들어온 노란 햇볕 때문에 내가 얼굴을 찡그렸었는지, 그 것을 마주보았었는지. 새벽 6시 마다 아래층에서 울리는 알람이 어떤 음악이었는지,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이미 떠난 것인지, 여전히 그대로인지, 아름다운지, 불쾌한지, 너는 누구이고 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마치, 빨간 신호등 앞에서 한참 기다리고 서 있다가, 그 것이 파란불로 바뀌고 나서도 건너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모르겠다.

육공육

더블유가 그려진 핑크색 티-셔츠를 입은 녀석이 뒷 좌석에 쳐박힌다. 검은 양복이 터질듯 뚱뚱한 사내는 양 주먹을 꽉 쥐고 무엇인가 친구에게 설명하고 있고. 차창 밖에 커다란 안경을 쓴 남자는 버스가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포기하고 돌아선다. 더블유가 그려진 핑크색 티-셔츠를 입은 녀석이 다른 자리로 또 다시 쳐박히듯 앉고 버스가 속력을 내자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쥐. 에이. 피 라고 적혀진 내녹색 티-셔츠가 출렁거린다. 터널안을 지날 때엔 끈적하고 더운 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운전대를 꼭 쥔 택시기사가 보였다. 그의 옷 소매는 노란색이었는데 그가 정말 노란색 셔츠를 입은 것인지 아니면 터널에 가득찬 나트륨등 불빛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덩치큰 남자애가 얇은 가죽끈으로 된 버버리 가방을 메고 있다. "너는 남자애가 가방이 그게 뭐니?" 엄마들 처럼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너는 남자애가 가방이 그게 뭐니" 라는 하나의 문장 안에 도데체 주어가 몇개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너는, 남자애가, 가방이, 그것이, 무엇이니? "무엇이니" 라는 말만 빼고 보더라도 분명 네개의 주어가 연달아 나온다. "너는 남자아이로써, 가방이.... 그것이 무엇인것인가?" 어떻게 해야 정상적인 문장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