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여행

명상을 통해 우리는 우주를 건널 수 있어요. 당신의 몸은 작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알갱이들은 아주 미세하게 떨고 있답니다. 지구도 미세한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지구 역시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금방 알아챘겠죠? 지구의 떨림과 당신의 떨림은 그 리듬이 달라요. 하지만 명상을 통해서, 당신의 알갱이와 지구의 알갱이의 떨림을 같게 만들 수 있어요. 아주아주 차분해지는 거예요. 땅처럼. 바다처럼. 그러면 당신은 지구의 떨림 그 자체가 되어, 당신의 영혼을 지구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된답니다. 지구의 떨림과 하나가 되어 저 멀리 다른 은하계의 다른 행성의 생명체와 교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너무 황당한 이야기 같나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당신이 매일 밤 우주를 여행한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나요? 당신이 깊은 잠에 빠질 때, 그것은 명상에 빠진 것과 다름없답니다. 지구와 하나가 되는 거죠. 매일 밤 당신의 영혼이 지구와 하나 되어 지구 밖의 다른 존재와 교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꿈이랍니다. 꿈을 꾸지 못한 날이 있었나요? 아마 당신과 같은 진동수를 가진 우주먼지와 교감했기 때문일 거예요. 암흑 속을 날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지요. 우주여행을 특별한 무엇이라 생각지 마세요. 당신의 영혼과 몸의 결속은 생각보다 그리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당신의 몸을 떠나, 우주를 건널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우주를 여행해보세요!

모난길

나는

모서리

위를 걷는다

평평한 두 면이

모여 이루는 모서리

나는 그 위를 따라 걷는다

모서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삐끗하면 어느 한 세계로든 미끄러진다

한편으로 기울어진 세계에 선 자들이

모서리를 따라 걷는 나를 비웃는다

기울어진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모서리에 선, 나라 비웃는다

평평한 세계에서 평평한

지평을 보며 가라 한다

모서리는 선이어서

면이 결코 될 수

없다 말한다

이번엔

수직으로

측면에 매달린

사람이 성내며 묻는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밝히라며

절벽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으면서

정작 똑바로 서 있는 건 자신이라 한다

두 세계가 맞닿은 모서리를 따라

여전히 나는 기우뚱거리며

좌-우를 살피며 걷는다

내겐 두 세계 모두가

아래로 추락하는

측면일 뿐

끝일 뿐

나는

모서리

위를 걷는다

모서리 끝에는

또 다른 면이 있고

또 다른 모서리가 있고

또 다른 절벽이 있고

무엇이든 상관없다

미끄러질지라도

계속 걷는다

뒤뚱뒤뚱

걷는다

모난

일이삼

*

나의 권태에 대해 누가 알아줄까. 권태에는 게으를 태怠자가 있으니 배부른 소리라 욕먹기 딱 좋다. 사람들이 권태를 잊기 위해 하는 일들이란… 오락, 창작, 관계 맺기, 여행, 자기기만… 다 망각을 위한 행위들이 아닐까… 권태는 게으름에서 오는게 맞다. 더 많은 변화와 가능성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일이다. 변화와 가능성은 도처에 있으니까… 다른 일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아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한발 물러설 마음이 있지만, 권태에 대해서는 ‘야, 너는 암 것도 몰라 이 자식아'라고 꼰대같이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 

**

교육 중에서도 가장 못된 교육은, ‘착하고 올바른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강박을 심어주는 교육이 아닐까. 사람이 살며 ‘올바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까. 이왕 교육이란 것이 필요하다면, ‘착한'사람이 되기위한 훈육과 더불어 ‘올바른 나쁜 사람 되기’에 대한 교육도 시켜주는 건 어떨까. 하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하겠지. ‘착한 나쁜사람’은 형용모순이니까. 

***

나에게 방랑이란 가능할까. 목적지 없이 떠돌 수 있을 만큼 내가 강건할까. 집이 없어 끊임없이 신세 지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을 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권태는 목적지 없이 계속해서 떠나는 것만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처분하고도 허무를 느끼지 않을 만큼 방랑은 좋은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서는… 방랑은 가능하지 않겠지.

점-선-면

점처럼 박혀있는 ‘너’라는 그 관념을 뽑아버려. 너 아니면 누구도 뽑을 수 없어. 그 점의 위치는 너밖에 모르거든. 그러면 그 아래 너와 선으로 쭉 이어져 있던 기억들이 따라 나올 거야. 개개의 너를 만들어낸 기억들은 잠재적인 무의식 저편에 끈끈하게 고정되어 있거든. 당기다 보면 그 기억의 끝자락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아파 올 거야. 그 선이 끊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붙잡고 있는 너라는 점을 놓지 마. 너와 이어져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진 선들이 결국 너의 존재면 자체를 드러내게 될 거야. 내부로부터 바깥으로 말이야. 이불보를 갈아 끼울 때처럼, 너의 이면, 너의 속을 보는 일은 불편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네가 아니야. 그리고 보는 주체도 네가 아니야. 너는 이미 뒤집혀 벗겨진 상태일 테니, 네가 보는 것은 너의 외부가 아니라 너의 내부인 것이야. 온 세상이 너의 내부가 되는 셈이지. ‘너’라는 하나의 점으로 꽉 막혀있던 너는 그렇게 온 세계를 너의 내면으로 품을 수 있는 것이야. 그러니, 그런 면에서, 그 정도 선에서, 아니 그런 점에서…… 너의 그 점은 뽑는 게 좋겠구나.

죄수

나는 네가 나에게서 달아나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지금 있는 그곳은 나의 손이 닿지 않는, 나로부터 가장 먼 곳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의 손이 닿지 않는 곳 너머는 네가 숨을 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네가 은신하고 있는 그곳이 우리가 처한 세계의 가장자리이자 끝임을 너도 잘 알 것이다. 갈 곳이 없어진 너는 곧 네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느낌을 주는 모든 존재는 나의 것이며 나의 소유물은 언제나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한다. 나의 소유물로서 나에게서 벗어나려 한 너의 죄를, 너의 존재가 발각되는 그 즉시 벌할 것이다. 너는 나의 소유물 중에서 나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존재인 데다가 도망치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여, 나로서는 너에게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우선 바람이 너를 갈기갈기 찢어놓도록 명령할 작정이다. 바람은 물론, 내가 세상을 잡아당기는 힘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너를 수억 개의 조각으로 부수어 놓을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다. 너는 그렇게 조각난 채로 공중에서 사방으로 내팽개쳐질 것이다. 수십 년을 헤매고 다녀도 너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만큼 너는 분해되어 여기저기로 흩뿌려질 것이다. 네가 다시 내 손아귀에 들어오기 전, 나는 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한 번 더 안겨줄 것이다. 바람에 유린당한 너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 너를 탐하던 내 모든 소유물에 한 번씩 너를 맛볼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구역질 나는 그들의 내장을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너는 그들로부터 한 번 더 버려진 다음, 바닥을 기어가며 내 몸 구석구석을 핥아 더러운 때를 말끔히 씻어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존재를 기꺼이 품고 있는 자비로운 땅인 내가 호시탐탐 탈주를 모의하는 너, 물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바람 바람

밤 산책길. 급하게 마주친 사람에게 걷어채듯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황망히 바람이 지나온 길을 바라보아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바람의 흔적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다. 멈추어 있음이란 그런 것. 정지해 있는 존재란, 오고 가는 것들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의 산증인이며 목격자이다.

증인은 말한다. ‘바람이 방금 내 왼뺨을 후려치고 지나갔소!’ 목격자는 말한다. ‘바람이 저 계단으로 올라와 난간을 뛰어 내려가는 것을 내가 보았소!’ 목격한 바를 증언하기 위한 존재는 피곤하다. 땅은 지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며, 하늘 아래 모든 존재는 그 어지럼증을 못 이겨 끊임없이 제 몸을 변화시킨다. 그것도 모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날아간다. 관망자는 그 모든 양태의 변이와 충돌과 운동을 지켜볼 뿐 스스로 바람이 되지는 못한다.

산책길에 멈춰 서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계속 멈춰 서 있어야 하는가, 계속 움직여야 하는가.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다른 모든 것들이 운동하고 있다면, 구태여 나까지 그 산란한 유동에 참여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람이 불 때 그것을 목격하면 나도 바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 돌진할 때, 멈추어 서 있으면 그들에게 나 역시 미친 듯 역행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도 잠시, 모처럼 산책 나온 길에 가만히 서 있기도 참 멋쩍은 일이다. 하며 하릴없이 발걸음을 아무 곳으로나 내디딘다. 인생의 중대한 깨달음은 이처럼 정신없이 내질러 가던 사람을 도중에 붙잡고 잠시 멈추게 하지만, 득도도 잠시, 그 ‘멋쩍은 기분’ 앞에서 또 겸연쩍어 어디론가 또 방향을 잡아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책길에 얻은 교훈.

나라는 습관

언제나처럼 나는 나에 있다. 나로 있는 일이 점점 힘들게 느껴진다. 온몸의 근육들이 딱딱하게 굳어있고 잘 움직이지 않는 탓에 온몸이 무겁다. 누워 있으면 그나마 견딜 만하다. 이 거대한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니 온갖 구실을 다 동원해서라도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이 몸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 오늘 꿈이 무척 중요했다는 핑계를 대고는 다시 꿈속으로 빠져든다. 부산한 소리에 눈을 다시 뜬다. 다시 나에게 돌아와 있다. 큰마음을 먹고 침대 위에 돌처럼 굳어버린 몸을 일으켜 본다. 머리가 어질 하지만 좀 더 힘을 내어 일어서 기지개를 켠다.

내가 나에게 있음이란, 그렇게 무게를 지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너무 의식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곳에 있음을, 내가 나로 있음을 습관처럼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갇혀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져 다시 잠에 빠지거나, 계속해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토마토 스파게티. 예를 들어 우리는 토마토 스파게티로 도망칠 수 있다. 토마토 스파게티를 냄새 맡고 맛보는 행위는, 나를 잠시 몸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준다. 빠져나간다기보다는 사실 갇혀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뿐이다. 토마토 스파게티를 씹는 동안 혀로 느껴지는 그 맛이 나를 토마토 스파게티로 들어가게 해 준다. 맛의 향유가 끝나면, 다시 권태가 시작된다. 여전히 내가 스파게티가 아닌 내 안에 있음을 자각한다. 나를 던져놓을 대상이 또다시 필요한 순간이다.

컴퓨터를 켜고, 미뤄 둔 편지들을 확인한다. 회신해 줘야 할 메일에 답을 하고 내게 주어진 질문과 요청사항들을 검토한다. 능숙하게 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컴퓨터 화면을 조작한다. 익숙한 것을 조작하는 일은 나를 고양시킨다. 내 손이 모니터 화면 넘어 연결된 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나를 넘어서는 듯한 그 느낌 때문에 나는 또 잠시나마 몸이라는 한계를 잊는다. 그마저도 몰려드는 피로감에 금세 나 자신에게로 주저앉고 싶어진다. 이제는 그만 나에게로 돌아오고 싶어진다. 벗어나고 싶다가도 돌아오고 싶은 것이 내가 나에게 있음의 또 다른 성격. 지긋지긋한 기분에 떠나고 싶다가, 너무 편하고 익숙해서 언제나 돌아오고 싶기도 한 그런 장소가 바로 나인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에게 돌아오고 싶은 기분이 들면 산책하러 나간다. 그대로 있다간 또 나를 잊기 위한 잠으로 귀결되고 말 테니까.

산책길에는 빛이 나를 나로부터 꺼내어 준다. 반사되어 반짝이는 다양한 색채와 빛과 어둠이 만들어 내는 형태들이 나를 황홀케 한다. 그렇게 눈으로 빠져나간 나는 꽃 위에 닿았다가 구름에까지 가 닿기도 한다. 보는 행위는 쉬이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해가 저물면 그만둘 수밖에.

밤이 되면 종이를 펴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잊어버리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림을 그릴 때는 내가 나에 머무른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다. 대상을 누리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창조해야 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이리라.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나를 떠나지 않고 나의 피로를 느끼며 내 안에 계속 머문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몸이 나를 자꾸만 끌어내려 잠 속으로 유인한다.

잠 속에서는 내가 나를 잊으려는 노력조차 필요하지 않으니까.

습관적으로 나는 다시 내 안에 머물기를 멈춘다.

섬의 아침

섬이 처음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 

지각이 처음 우르르 흔들릴 때, 바닥에 엎드려 세상이 무너질 듯한 공포감에 떨며 살려달라 빌고 싶다. 바닷속 깊은 곳 벌어진 틈으로부터 지구의 뜨거운 숨이 솟아오를 때, 그것에 심하게 데어, 비명을 지르고 싶다. 끓어 넘치던 뜨거움이 성난 모습 그대로 굳어져 갈 때, 그제야 차분해진 지구의 온기를 느끼며 상처를 위로받고 싶다. 

검게 식어버린 화산섬을 처음 발견한 갈매기가 흥분에 찬 날갯짓으로 섬을 선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을 만큼 안전해지면, 나는 섬의 한가운데로 걸어가 바람을 타고 뭍으로부터 날아올 씨앗을 기다리고 싶다. 앞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될 그 소중한 씨앗이 첫 떡잎을 틔워낼 수 있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 모든 이야기의 시작,

자연이 그 섬에 뿌리를 내리는 일을 지켜보고 싶다.

그렇게 비로소 시작될 섬의 아침을 보고 싶다.

유언 流言

…나는정말자유를원해서여기까지오늘하루정말많은생각을했다가오는한해에는제발올해와같이함께하는삶속에서만큼은제발로내게찾아온사람들이렇게말도안되는것들에대하였더니만도못한나는도대체어찌해야한다고말했다가도가도끝이보이지않는것이어도괜찮을지난날들을돌이켜생각해보면서도저히말도안되는일인것도아닌데에다가갈수록점점이흩어지는것같은기분이드는것도쉽지않았을것이라고는생각할수가없었는지도모르는일이많았고도로투명하고맑은것들에대해서만큼좋은일도대체가나는미나아름다움에대해서그런말들을주고받은만큼의애정을가지고나자신의미래에대해정말로아무생각이없었던…

머릿속엔 끝없이 말이 흐른다. 말의 흐름 속에서 나는 헤어날 수가 없다. 말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머릿속을 점유한다. 날아든 말들은 흐르다 떨어져 큰소리를 내고, 한데 뒤섞여 회전하며 가라앉았다가 솟구친다. 저들 습관에 따라 단어와 단어를 이어붙여 말을 만들어 내는 것 뿐. 그 말들이 나를 죽이거나 살리지는 못하므로 나는 그저 그것들이 나를 차지하도록, 흐르도록 놓아둔다. 어젯밤 꿈속에서는 흐르지 않는 말들을 만났다. 말들은 조그마한 유리병 안에 갇혀 있었다. 흐르는 말처럼 불순하지 않은 깨끗하게 정제된 언어들. 어제 마신 정종처럼 맑고 투명한 색이었다. 나는 유리병을 힘차게 흔들어 밝은 빛에 비추어 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말들을 다 기억할 수 없어 나는 얼른 마셔버리기로 한다.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꿈으로부터 점차 밀려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의 말 만큼은 간직하고 싶어, 마시지 않고 기억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저편에 있는 것들을 이편으로 훔쳐가는 일은 도저히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기억해 내지 못한 채 꿈에서 깨어나버렸다.

귀소 歸巢

저녁 여섯 시 무렵이면 낮 동안 동쪽 산너머에서 하루를 보낸 기러기들이 날아온다. 아침 여섯 시엔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 꼬박 열두시간 동안 저 산너머 어딘가에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볕도 쬐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단체로 귀가하는 것일 게다. 기러기들이 시옷자 대형을 유지하며 많게는 백여 마리, 적게는 수십여 마리가 함께 노을지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알려진 대로 기러기들이 시옷자 대형을 유지하는 것은 선두의 기러기들이 뒤따라 오는 기러기들의 공기 저항을 최소화 시켜주어 최대한 멀리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날아가며 끼룩끼룩 시끄럽게 내는 소리는 선두의 기러기들을 응원하는 소리라고 한다. ‘응원의 목소리라니, 너무 인간적인 발상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인도 기러기는 무려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 8,900킬로미터를 비행하기도 한다고 하니, 과연 힘내라는 응원이 필요할 만도 하다. 장거리 비행을 위해 오랜 세월 그러한 것들을 스스로 터득하고 전수해 온 기러기들이 참 영묘하게 느껴진다. 여기 파주의 기러기들도 이제 봄이 오면 다시 조금 포근해진 시베리아로 날아가 여름을 날 것이다. 그렇지만 왜? 매년 그렇게 얼어붙는 고향 땅을 떠나 따뜻한 곳으로 내려왔다가 왜 이곳에 더 머물지 않는지 갑자기 의아하게 느껴졌다. 제 고향 땅이 그리 춥다면 애써 멀리까지 내려와 먹을 것이 더 풍부해질 여름, 가을을 기다리지 않고, 또는 제 고향보다 포근한 겨울이 기다리는 이 땅에 정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다시 귀향하는 것일까?

머리가 나빠서? 아니다. 기러기들은 그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들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얻고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기 때문일 게다. 자유로운 성정의 그들에게는 이해타산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적인 습성이 없는 것이 당연할 게다. 자유롭지 않으면 그게 어찌 새일 수 있겠는가. 아니면 기억력이 나빠서? 그것도 아닐 게다. 기러기들에게는 인간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뻗어가는 단순하기만 한 선형의 시간이 아닌, 아닌 환형의 시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엔 이곳에 왔다가, 여름엔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일 뿐, 다음 다음 계절에 대해, 내년에 대해, 또는 내후년을 미리 걱정하여 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러기들이 매년 돌아오고 돌아가는 이유가 자유로운 습성이나, 환형의 시간 개념 때문이 아니라면, 어쩌면 시베리아 땅에서만 먹을 수 있는 아주 맛있는 곡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투정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며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말들을 속으로 뱉아낸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소용'에 대한 부정이다. 어느 순간 그림들 조차도 그렇게 '소용'의 산물들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렇게 보이는 순간이란, 내 주변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죄다 어떤 목적들을 가지고있고 또 그 목적에 충실하라고 내게 명령하는 느낌을 줄 때이다. 그림 역시 저마다 자신의 소용과 운명을 내게 묻고 하소연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한 회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입사 초기에는 워킹비자 없이 일을 하고 있었던 터라 그곳에 남아야 할 지 돌아가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나를 그리로 데리고 왔으면서도 그들은 사실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우연히 퇴근 길에 마주친 보스에게 하소연하듯 물었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니?” 장신에 멋진 은발 머리를 한 마티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암 낫 리스폰서블 포 유어 퓨쳐!”

내 그림들에게도 손을 흔들어보이며 그렇게 말해야할까. 모든 관계와 소용, 애착들로부터 연기처럼 떠나고 싶어지는 그런 계절이다.

무색무취

계절이 변할 때, 주로 달라진 공기의 맛을 느끼게 되는 즉시 나는 유럽 어딘가의 골목들을 떠올린다. 고향도 아닌, 겨우 하루, 한 달, 일 년 머물던 그곳을 그리워한다. 그 골목의 공기가 떠올려주는 풍경이라는 건 지극히 평범한 장면들이다. 이를테면 비엔나 지글러 슈트라세의 한인 슈퍼에서 장을 보고 자이덴가쎄로 꺽어지는 모퉁이 라던가, 할테슈트라세 아파트 오층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참, 파리 8구역 샹젤리제로 가는 길 어딘가의 현금인출기 앞이라던가 하는 식이다. 그토록 그리워 할 만한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 아닌 데도, 그런 순간이면 늘 오싹 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음이 순식간에 그 곳에 가 있다. 오늘은 무심코 라나 덜 레이의 노래를 들었는데, 흐느끼는 듯 한 그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리의 9월 어느 오후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뜻도 잘 모르면서 당시에 지독하게 들었던 탓일 게다. 오늘은 유독 그 이국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직접적이어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 볼 정도였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바로 이런 이상한 기분에 처할 때인데, 보통 어떤 색다른 특별한 경험을 위해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달리, 나는 바로 그 이국의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인 것 같다. 그 공기는 나와 관련된 그 어느 것의 향기도 실어다주지 않는 공기이며, 그렇기에 그 공기를 향유하는데에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무색무취의 공기이다. 지금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 내가 거기 없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게다.

격정마라

다스릴 수 없는 마음. 마음은 여기에 있다. 노자며 장자며, 석가모니며, 아무리 읽어도 이 마음은 해체할 수 없는 검고 단단한 외계 운석처럼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어, 나는 머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 공자가 우주에 대해 입을 다물 듯, 너희들도 외계 운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

물 같았던 때가 있었다. 뜨거움을 만나면 증발해버리고, 차가움을 만나면 얼어붙었다. 물길이 바뀌면 나도 방향을 바꾸고, 갈림길을 만나면 주저함 없이 양행하였다.

잘 모르기에 망설이며, 잘 모르겠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너무도 잘 알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며 또 그래도 괜찮았기 때문일 터.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나의 직감은 영영 물 그대로 남아 있으라 한다. 하지만 물로 남으라 하는 명령은 물로서 할 수 없는 명령이기에, 그대로 흙이 되거나 공기가 되어버려야 하는 숙명을 사랑해야 하려나.

예측 불가능한 삶 위에서 하지만 되도록 예견할 수 있는 것들만 준비해 놓고 몰랐던 것인 양, 놀라고 마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삶으로의 이행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안 만큼이나 나를 두렵게 한다.

확실한 것은 죽음 뿐. 죽음은 언제고 찾아온다. 하지만 아무도 죽음을 경험한 적 없다. 나 역시 확실하다는 소식만을 가끔 듣는다. 하여, 죽음에 대한 불안은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부질없는 연극일 뿐. 그 누구도 사실 지금 죽지는 않는다.

독창적 스타일

자기 스타일이라는 게 뭐라고.

최근에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한 친구가 나의 그림을 모작하고 있다며 한 친구가 알려 준 적이 있었다. 학생이기도하고 또 과제 제출 용으로 제작한 듯 하여, 한 며칠 조용히 팔로우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열심히 여러 작품을 열심히 따라서 그리더니만, 어느날인가 내 그림에 기하학 도형 몇 개 추가해 놓고는 감격에 찬 말투로 이제 자기 스타일을 찾았다며 기뻐하더라. 혼내주고싶다기보다는, 뭔가 일깨워 주고자 하는 마음에 팔로우를 했더니 대뜸, 죄송하다 한다. 계속 습작을 하며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본인만의 작품을 갖게 될거라는 격려로 일단락 되었지만,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동양화를 공부하다보면 화가들이 일가를 이룬 작가의 화풍을 모방하는 일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인 것 처럼 여겨진다. 문화 수입 경로가 그러하듯 주로 한국의 작가들이 대륙에서 유행하는 화풍, 화제, 준법 등을 들여와 그리곤 했다. 물론 겸재나 추사의 경우 처럼 역으로 중국 문필가들로부터 존경받는 일도 있었다. ‘화풍’, 지금으로 말하면 ‘스타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너그럽게 공유될 수 있는 있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여겨졌다.

당시에는 표현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화제, 즉 그림의 ‘주제’ 역시도 수없이 공유되고 전래, 임모되어 왔다. 일테면, 단원 김홍도가 어느 봄날 한가롭게 강가에 나가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가 절벽에 위태롭게 피어있는 매화 한 줄기를 바라보며, 스승인 강세황의 화풍을 모방하여 멋지게 그림을 그리고, 두보의 시 중 한 구절,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을 그림 위에 적어 놓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보의 후손들이나 강세황의 자손들로부터 저작권 문제로 고소를 당한다거나, 주변 화가들로부터 지탄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뭐랄까, 누가 더 독창적으로 표현했는가-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얼마나 몰입하여 기운생동하게 표현했는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으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기 보다는,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정신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랄까.

한 구절, 한 마디 비슷한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작가로서 자격을 운운하는 요즈음의 각박한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뭔가 좀 씁쓸한 기분이다. 아마도 근대에 저작권이라는, 지적재산권 개념이 생겨나면서 부터, 이후 자본주의 발전과 맞물려 공고화, 세분화되면서 지금의 극단에 이른 것일 게다. 자기의 창작물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해진 이유를 생각해보면,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명예도 한 이유겠지만, 저작권은 결국 창작물을 통해 얻는 '수익'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그토록 예민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저작권에 대해 비교적 느슨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업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지고, 전업작가-로서 생활을 이어나가려다보니, 나 역시 저작권에 대해 좀 더 예민해지고 엄격해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을 살고있는 작가로서 자본 논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몇백년 전, 서로 다른 분야에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좀 더 자유롭게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시절이 더 낭만적이고 좋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 글은 표절을 장려하기위해 쓴 글은 아니다.

나의 마음 나의 기분

마음은 커다란 공터. 나는 그 위를 지나는 유목민이다. 마음은 내것이 아니다. 마음 속으로 뜨겁고 차가운 기분이 드나든다. 그래서 그 기분도 내것이 아니다. 기분은 내가 서있는 마음 위로 내키는대로 불어오고 스며들었다가 또 증발해버리고 만다. 극지로부터 불어오는 삼엄三嚴한 바람, 허무와 우울, 불안이 나를 떠밀고 옥죄고 무너뜨린다. 적도로부터 불어오는 낙관적인 바람은 여유와 기쁨, 사랑을 싣고 와 나를 들뜨게 하고 춤추게 한다. 나는 마음 위를 유랑하며 다양한 기분을 맛본다. 그 어느 것도 나의 것은 아니다.

지속 가능한 멈춤

가끔 이 세상 전체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가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찔한 기분 만이 아니라 형광등이 껌뻑이는 것처럼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오후. 창밖으로는 소풍나온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건너편 카페에서 매일같이 틀어놓는 유행하는 음악 따위만 들려올 뿐이다. 매일같이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보던 가족들도 요즈음은 나를 가만 내버려두는 눈치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가 일하던 회사에도 이젠 가지 않고, 요즈음엔 딱히 맡아서 하는 작업도 없지만, 한 두 달 생활할 만큼 받아야 할 돈이 적게나마 있어 이렇게 가만히 있다고 해서 구박할 사람은 없다. 좀 쉬고 싶다고 입버릇 처럼 말했었는데 막상 쉴 수 있게되니 다시 불안이 찾아온게다.

이럴 때면 강박적으로 내가 마치 어떤 중요한 의무들로부터 무책임하게 이탈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기분에 휩싸일때면, 주변에서 오는 온갖 소음은 물론 정적마저 나를 책망하며 것 같아 귀를 닫고 숨고 싶어진다. 이미 은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더 숨을 곳이 없나 찾고 있다. 마치 검정에 검정을 더해 더 검은 색을 만들려는 것처럼, 암흑 속에서 더 어두운 구석을 찾아가려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좀 더 어릴 적에는 미래 보다는 과거의 일들에 더 얽매여 있었다. 그 얽매임에 괴로워했다기 보다는, 그 기억들을 되새기고 뒤적이며 유의미한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오히려 즐거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데에 더 많을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예전보다 지금은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중요한 무언가를 행여 잃어버리거나할까봐 노심초사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앞에 놓인 인생에 선택할 수 있는 가지수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여겨져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주 오랜만에 가쁜 숨을 고를 수 있는 지대에 와 있다. 이리로 내가 자발적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이런 시간이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쉼을 지속하고싶다.

“인생의 비밀은 아마도…”

하고 언젠가 빨래를 널다가 은연중에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적이 있다. 듣고있던 이가 무슨 얘길 했냐고 물었지만 ‘인생의 비밀은 아마도'라는 서두가 너무 거창하고 또 애매해서 대답하지 못했었다. 생각난 김에 다시 고쳐 얘기해보자면 인생의 비밀은 바로 이 '쉼'을 계속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삶을 이끄는 동력이 타인에게서 촉발된 것이 아니며, 아무 목적없는 이 '쉼’ 속에 모든 창조적인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쉼은 나로 인하지 않은 다른 모든 것의 멈춤이다. 다시 말하면 '마침'의 의미로서의 쉼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정지이다.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지연시키고 싶다.

靈感

의 한자풀이는 ‘심령의 미묘한 작용에 의한 느낌'이라고 한다. 시쳇말로 '느낌적인 느낌'이라는 말 만큼이나 의미가 모호하다. 영감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다보면, 사람들은 이 '영감'님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계시와 같은 무엇인가-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영감이라는 것은, 손에 잡힐 듯 나타나는 개별적인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쓰고싶고 그리고싶게 만드는 어떤 근질근질한 기분이나 상태에 가깝다. 하늘이나 땅과 같이 안정적인 지대가 아닌, 공중의 뜨뜻미지근한 어딘가에 둥둥 떠있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다. 대기중의 뜨거운 공기와 찬 공기가 한데 뒤섞여 불안정한 구름층이 만들어내는 것처럼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러한 기분, 상태라는 것은 불면의 상태에서 잠을 청하려 하면 더욱 잠을 잘 수 없는 것처럼, 일부러 도달하려 하면 더 멀어질 뿐이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을 마주보게하고 그 둘을 붙이려 할 때처럼 다가가려는 노력 자체가 다가감을 방해할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무구한 순간, 샤워를 하거나, 똥을 싸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하는 무욕의 순간들에 더 자주 그런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순간에 보이는 이미지라는 것은 모서리가 분명한 어떤 완성된 형태들이라기 보다는 꿈에서 보이는 것 처럼 생성되는 과정으로서의 모호한 이미지들이다.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곧바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허망하게 사라져버린다. 창작 활동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그 허한 공간에 최대한 오래 들어앉아 있으려는 부단한 노력과도 같다. 보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관찰을 방해하는 환영들을 계속해서 포착해 내려는 부질없는 노력이다.

창궐

하는 바이러스를 보고 있자니, 생명을 규정하는 것은 ‘지속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베르그손의 말이 옳다-싶다. 생존을 위해 단 시간에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제 기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변종’ 바이러스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다. '살아있음’ 이란 무엇인지를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죽고 살며 말하는 존재가 바이러스 아닐까.

그럴싸

구월에 있을 그룹전에 ‘기다림'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해야해서 요며칠 여러모로 궁리중이다. 만들다 만 조각을 가지고 영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여러가지 흥미로운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제법 그럴싸- 하겠군.'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는 잠시 후, 앞선 생각에서 '이렇게 저렇게'라던가 그럴싸-하게'라는 말이 걸려 마음이 불쾌해졌다. 여기서 '이렇게 저렇게-'라는 것은, 어느 미술관에 설치된 영상 작품들에서 보았을 법한 그런 형식을 말한다. 그 형식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화면은 무엇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모르게 알쏭달쏭해야 하고, 테이크는 최대한 지루하고 길게하여 관객들을 빨리 떠나게 만들어야한다. 편집은 최대한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모르게 난잡해야하고 너무 세련되어서도 안된다. 관객들은 무지몽매해서 그런 영상 앞에 앉았다가 티켓값이 아깝지 않도록, 그 어떤 감상이라도 가져보려고 알아서 무진 애를 쓸 것이다…

미술관에 걸린 영상들은 대게 그렇다. 장담하건데 아티스트는 분명 더 세련되고 친절하게,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테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지루하고, 무의미하고, 거칠게 만든 것일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영상 작품도 그런 어떤 '예술적'으로 '그럴싸-'한 형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혹은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그 '그럴싸-'함이 예술을 더 저속한 무엇으로 만드는게 아닐까.

싶다.

동동

마음이란 건 대체 무엇인지, 사람들은 종종 그것의 무게나 부피를 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느니 무겁다느니, 또는 좁다느니 넓다느니 하는데 실체도 없는 것에 물리적인 척도를 가져다 붙이는 건 결코 좋지 않은 습관인 듯 하다. 마음이 무거우니 산책을 하면 조금 가벼워질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신선한 공기로인해 뭔가 부폐하고말 것 같은 그 눅눅한 생각들이 날아가버린다거나, 걷기를 통해 그런 무거움이 조금씩 떨어져나가 결국 가벼워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이라면 아마도 ‘답답한 마음’ - '산책’ - '가벼워진 마음’ 이라는 상식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일 것이다. 이왕 마음에 어떤 물리적 지위를 주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의 무게나 부피 보다는 운동성을 더 강조하고싶다. 그것은 아무런 크기도 갖지 않다가 순식간에 팽창한 채로 들어오며, 표면에 아무런 돌기도 나있지 않으면서 찌르는 듯한 마찰을 일으킨다. 마음의 내부는 텅 비어있는 듯 투명하지만 이 세상 어떤 기체보다도 더 무거운 밀도를 가진다. 그것은 죽거나 죽지 않은 고양이처럼 있기도하고 없기도하다. 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마음은 이미 이곳에 또는 다른 세계에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