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4, 2024

서른시간 가까이 이동하고 드디어 도착한 파리. 지칠대로 지쳐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도 날씨가 좋아 걷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지난주까지 눈 비에 추운 날씨였다는데- 맑게 개인 날씨에 도시 전체가 발광하는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일은 작품표구를 해야한다. 무사히 끝마칠 수 있기를-

January 17, 2024

아침 먹을 때 소곤소곤 내리던 눈발이 어느덧 함박눈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각자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눈 구경 한참 하다가 또 못 참고 나가서 눈 사진도 찍고 집 앞에 눈 쓸고 들어왔다. 봄꽃 틔워 낼 생명수가 땅속으로 충분히 스며드는 너그러운 겨울

December 30, 2023

”큰 눈이 내리면 여기에 다시 와보자!“ 하고 봄에 약속했었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네. 아직 남아있던 졸린 기운이 미끄러운 언덕길을 조마조마 내려가다 보니 금세 달아나 버렸고 이내 설레는 마음만 가득 채워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쌓인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우린, 와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애들처럼 눈을 돌돌 뭉쳐 눈사람 눈강아지 눈고양이 만들고 기념사진 찍고 돌아왔다. 오늘처럼 올 한 해 실컷 잘 놀고 한껏 잘 살아낸 우리가 자랑스럽다.

묵향

박한샘 작가의 추천으로 국립극장 계정을 팔로잉하고 있다가 겨우 표를 구해서 볼 수 있었던 <묵향> 공연. 작업으로 바빠 하루만 놀아도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요즘인데도, 이 공연만큼은 시간을 쪼개서라도 보고싶었다. 이미 스틸컷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설레는 기분. 국립극장도 처음이었고 한국무용 공연도, 현대무용 공연도 오랜만이어서 더욱 신이 났다.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나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도록, 형형색색 꽃을 형상화 한 것인지, 나비를 형상화 한 것인지, 내가 꽃인지 나비인지, 무대위에 빨갛고 노오랑 점들이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야말로 꿈처럼 달콤한 환상적인 무대였달까. 대나무를 그려낸 무대에서 겨우 졸음을 물리쳐냈다. 아마도 여성 무용수들의 손짓 발짓을 따라가다보니 무엇엔가 홀린 듯 잠에 취해버린 것 같다. 무용수들의 현란하고 절제된 동작도 황홀했지만, 재해석된 민요와 다양한 전통악기의 연주들이 압권이었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것이, 무대 위에 인물의 배치였다. 대칭되는 장면이 거의 없고, 여기에 셋, 저기에 다섯, 그리고 하나, 하나- 하는 식으로, 마치 산수화를 처음 배울 때 돌무더기를 배치하는 것처럼 화면이 예쁘게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 인사 할 때조차, 치밀하게 신경 쓴 듯하여 입꼬리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년애도 내후년에도 다시 보고싶은 공연! 다음엔 졸지 않기.

December 4, 2023

서랍 속에 잠들어있던 오래된 시그마 DP1 Merrill 카메라를 꺼내 먼지를 닦아내고 배터리를 교체하고 손목 스트랩도 달아주었다. 2012년에 출시된 카메라인 걸 보니, 십 년 전쯤 쓰던 카메라인 모양인데 화질은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다. 십일월은 전시 준비로 바빠 아내와 가을을 만끽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올해는 이러했으니 내년엔 이렇게 한번 살아보자- 함께 계획하고 다짐할 수 있어 행복하다.

October 25, 2023

미술관엘 가면 나는 왜인지 온갖 억울한 일이란 일은 혼자 다 겪은 사람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또 세상 시니컬한 사람이 되어 입을 비죽거리며 비평을 늘어놓기 일쑤다. 특히 산-사람의 전시를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인격이 미성숙해서 숨겨둔 열등감이 발현하는 탓일 것이다. 그래서 전시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닌데, 이제라도 좀 마음을 고쳐먹고 착하게 작품을 감상하려 노력한다. 아내와 함께 전시를 보기 시작한 이후, 그의 감상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한 이유이다. 아무튼 그런 태도로 아내와 함께 관람했던 최근 전시들은 다 좋았다. 오늘 유근택 작가의 전시도 그러했다. 일면식도 없긴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학번 선배의 전시이다보니 작품에 더 관심이 갔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면 그 작가가 ‘한국적’인 이라는 수식어의 굴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먼저 보게 되는 것 같다.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들 열에 아홉은 본인이 마치 한국적인 것을 계승 발전시켜 세계에 그 위상을 널리 떨쳐야 할 것만 같은 소명 의식을 갖게 되는데, 그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 같은 노래를 다 외워 부를 수 있는 게 자랑이었던 우리 세대에게는 더더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런 사명감을 조금씩은 다 갖게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민족주의적 시각이 세계적 레벨의 작가가 되는 데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데에 ‘한국적인’, ‘동양적인’이라는 한 겹의 포장지가 이목을 끄는데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한국적인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적극적 해명과 설득이 있지 않고서는, 되레 불필요한 한계를 스스로 지우는 셈이 될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기보다, 한국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며 직면하게 되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버티며 생긴 상처와 굳은살, 맷집 같은 것이, 한국에서 버텨낸 작가로서 자연스레 갖게되는 ’한국적‘인 무엇이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유근택 작가의 작업에서 그런 맷집과 굳은살,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동양화니 서양화니, 한국적인 것 따위 지긋지긋하니 제발 나한테 묻지 마쇼-라는 듯한 태도 말이다. 같은 학교에서 같은 전공을 배운 사람으로서, 작품 너머에서 작가가 종이를 두드리고 짓이기고 해치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어떤 해방감을, 쾌감을, 자유를 느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화면 넘어 그대로 나에게도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자유로움이 무척 보기 좋았고 부러웠다. 아내도 같은 전공인지라, 그 마음을 알고 거대한 분수 그림 앞에 서서 함께 감탄하였다. 나는 멋진 화초 그림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작가에게 열렬한 축하의 인사를 전하였다.

장욱진 전시 관람

아내와 덕수궁미술관에서 장욱진 전시를 관람했다. 작년에 국제에서 열린 유영국 전시에 이어, 올해 호암미술관 김환기 특별전, 그리고 장욱진까지, 잘 공부하지 못해 몰랐던 근대 한국 작가들 전시를 연달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일본에서 서구 미술을 배웠고 전쟁을 겪었으며, 유화로 구상과 추상을, 한국적인 무언가를 추구한 것은 비슷하지만, 미술을 대하는 태도도, 작업 방식도 조금씩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장욱진의 삶은 김환기에 비해 야망이 없고 안분지족하며 도인처럼 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런 분방하고 유유자적한 삶 자체가 그의 야망일 수도 있겠다. 사진 속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작업실에는 세 딸과 아내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을 것만 같다. 괜히 소주 한궤짝 들고 찾아가면, 러닝셔츠를 입고 나와 ‘아이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하며 반겨줄 것만 같은 푸근한 인상. 쪼그려 앉아 목판을 파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해의반박 解衣般礴‘! 과연 그렇네- 맞장구를 치며 그의 호방한 먹작업을 보고 감탄했다. 나는 아마 김환기처럼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고픈 야망이 커서- 장욱진처럼 호방하고 자유롭게 작업하지는 못할 것만 같다. 그렇지만 그 둘이 내 친구라면 아마 장욱진 집에 더 자주 놀러가고 더 그리워할 것만 같다.

해의반박

남산 서예 수업 이학기가 시작되었다. 단산丹山 선생께서는 학기 말에 도서관 전시장에 작품을 걸어야 하니, 마음에 드는 글귀를 정해오라고 하셨다. 아직 깨우친 것도 얼마 없는데 무슨 작품인가- 싶으면서도 괜히 욕심이 났다. 지난 학기에는 스승께서 써주신 글귀 해사후소繪事後素 를 써봤으니, 이번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의반박解衣般礴 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다. 선생님도 ‘좋다, 조금 어려울 테지만 써보라’ 하신다. 안진경이 쓴 글자들로 모아 놓고 그냥 써본다.

해의반박은 ‘화가라면 그림을 그릴 때 옷깃을 풀어 헤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그려야 한다-‘는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 에 나오는 구절이다. 동양화 전공자라면, 학교에서 이런 글귀를 배우지 않더라도, 붓을 다룰 때 긴장하고 규칙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면 얼마나 초라한 필선이 나오는지를 알기에 어쩌면 ’긴장을 풀어야 한다‘ 는 것은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 같다. 체득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선긋기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호방한 필력을 갖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물과 먹을 머금은 기다란 붓을 움직여 세상 온갖 것들을 표현한다는, 그것도 망설임 없는 호방한 필치로 그려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거의 묘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해의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있겠지- 하며 다른 우물을 파는 데에 집중했던 것 같다.

사실 그림을 그릴때에 그렇게 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작가도 있지만, 다른 한편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험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내야 안심이 되는 작가도 있다. 그것은 서양이나 동양의 차이도 아니고 화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것 뿐이다. 해의반박 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그렇게 격의없이 옷깃을 풀어 헤치고 다리를 빧고 그릴 수 있기까지, 붓을 다루는데에 두려움과 긴장이 없을만큼 수련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있는 것일테다. 그래서 동양화가 어렵다… 하여간, 해의반박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언젠가 그런 태도로 붓을 휘휘 저어도 작품이 되는 그런 경지에 다다르고싶다-는 마음을 담아 서예 작품의 주제로 삼아본다.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강아지가 밤산책을 가자고 보챈다.
그래, 산책가자!

성묘

김제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다녀왔다. 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은 것도 많고 또 이게 힘드네 저게 힘드네 소주한잔 기울이며 철없이 하소연 늘어놓고 핀잔도 듣고 싶은 시절. 인사만 드리고 올라오기 허전해서 아내와 담양엘 다녀왔다. 볕은 뜨거웠지만, 곧게 뻗은 대나무 그늘아래 있으면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전라북도의 다른 소도시들과는 다르게 어딜가나 여유롭고 단정하고 깨끗한 거리가 도시의 품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던 담양. 소쇄원 광풍각에 드러누워 한참 더위를 식히고 죽녹원으로 가 해질무렵까지 걸었다. 울창한 녹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탓인지- 지쳐있던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신기했다. 며칠 전 아트페어를 관람하고는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잔 것과는 다르게도- 뽐내지 않는 자연은 참 좋은 구경거리. 예술은 자연을 닮아 좀 더 뽐내지 않고 있음을 닮아야 하는 것일까-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전라남도 여행하고 왔다고 하니- 남원을 여행하고 온 줄 아신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친할머니께서 남원 출신이라고 얘기하시는데 처음 들어본 얘기였다. 그제야 김제 출신인 아버지의 냉철한 성품과 남도 출신인 어머니의 푸근하고 여유로운 성정이 좀 더 잘 이해가 되는 듯 했다.

September 4, 2023

어제와 오늘의 산책. 정신없이 뛰노느라 풀숲에서 차키를 잃어버렸다. 열쇠를 찾아 컴컴한 잔디밭을 샅샅이 뒤졌는데 영 잃어버린 듯하다. 백로가 다가온다고 잔디마다 알알이 맺힌 이슬 때문에 더 찾기가 더 어려웠다. 방울이는 주인맘도 모르고 오랜 산책이 신나기만 하다. 그래, 포기할 건 포기하자- 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감동적인 하늘. 높은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 만끽하러 오늘 또 나왔다. 아내와 함께.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July 19, 2023

지난 주말 아내와 다녀온 동해. 이번엔 강아지와 함께여서 더 특별했다. 영서지방엔 비가 많이 내려 안타까운 일이 많았지만, 우린 그런 소식도 모르고 잘 먹고 잘 돌아다녔다. ‘방울이를 데리고 멍비치 라는 곳엘 기본다. 양양에서 근무하는 아내의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예약해둔 숙소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다.’ 정도만 정해놓고 출발한 여행이라 그런지, 둘 다 무척 여유롭고 홀가분했다. 오며가며, 또 다녀와서 아내와 나눈 이야기 한조각 한조각이 다 각별히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다가올 전시준비에 벌써부터 조급해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July 6, 2023

아내와 함께 아침을 준비하는데 아내가 꽈리고추찜의 간을 보라며 한 입 물려주었다. 지난번에는 조금 눅눅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엔 꽈리고추의 아삭한 식감이 적당히 남아있어 양념에 그 특유의 향이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더욱 맛있었다. 나는 대체로 향이 독특하고 강한 채소를 좋아하는 것 같다. 민들레 잎과 쑥갓처럼 쌉싸름한 것에서부터, 깻잎과 두릅, 고사리와 참나물처럼 고유의 향이 있는 그런 나물과 채소를 좋아한다. 내가 어떤 입맛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도, 또 어떤 것이 맛있다고 말하고, 그 음식들을 제철에 맛보게 된 것도 다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부터다. 아마도 어렸을 때 우리 집 밥상에도 여러 제철 음식들이 올라왔었겠지만, 이십 대 초반에 독립한 이후, 내가 어떤 맛과 향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너무 오래 살아왔다.

아무튼 다시 꽈리고추로 돌아와서, 오늘 아침에 그것을 한 입 깨물고 그 향을 느꼈을 때, 무언가 특별한 느낌을 느꼈다. 마치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을 통째로 베어 무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지난주에 초당 옥수수를 쪄먹었을 때도 그랬고 유월 하순, 장인 어른댁 텃밭에서 땅에서 바로 캐낸 감자젼을 부쳐 먹었을 때도 그랬다. 아마도 매년 이맘때면 나는 어디에서든 아내가 만들어 준 꽈리고추찜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제철 음식의 미덕은, 그 식물이 저 나름의 우여곡절을 다 이겨내고 스스로 일궈낸 최상의 상태를 맛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요즘 자주 하는 말이지만, 삶이라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다시 시작하는 기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아내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이렇게 제철 채소를 맛볼 수 있게 된 데에는 아내 덕분도 있지만, 그 모든 작물을 손수 키워서 수확하고 또 깨끗이 씻어 보내주시는 장인어른 덕분이기도 하다. 장인어른의 이백 평 남짓 텃밭에는 오늘도 온갖 나무와 채소들이 자라난다. 당신의 철두철미한 계획성과 성실함 덕분에 단 함 뼘의 공간도 낭비되는 곳이 없다. 아마도 이번 주에는 수박이 잘 익었을 터. 장인어른께서 어릴 적 아내에게 때마다 좋은 채소와 과일을 맛보여 주신 덕에, 이제는 내가 그 좋은 것을 누리고 있다. 어느 때에 어떤 과일이 익어가고,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그때 먹을 수 있는 것을 꼭 챙겨 먹을 것.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많은 것 중에서도 가장 멋진 유산이 아닐까.

July 5, 2023

수면다원검사라는 걸 받았다. 최근 몇 개월 부쩍 코골이가 심해져, 이제는 아내의 잠을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낮동안 아무리 아내를 기쁘게 해도 밤에는 본의아니게 원수가 되어버리니, 무슨 수라도 써야 할 판이다. 나는 나대로 깨어있는 동안 늘 졸음이 쏟아져서 종이 위에 선을 긋다가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니 큰일이라면 큰일이다.

저녁 8시, 종합 병원 1인실로 안내되어 앉아있으니 의사가 들어와 한 시간 동안 코골이의 위험성에 대해, 검사의 목적과 가능한 치료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한 십여 분 정도는 의학적인 이야기를 했고 나머지는 지독하게 의사 말을 듣지 않는 아저씨들에게 쌓인 불만을 털어놓고 훈계하는 데에 할애했다. 나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듣고 보니, 수면의 질을 개선하는 일에 왜 이토록 소홀히 해왔는지- 이제라도 찾아오길 참 잘했구나 싶었다. 하여간,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자는 동안 코골이로 인한 저호흡 (심해질 경우 무호흡) 시간이 길어지먼 잠을 깊이 못 잘뿐더러 뇌에 산소 공급이 줄어들고 기억력 감퇴와 치매, 그로 인한 각종 심장질환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그러니 수술을 통해서건 기계장치의 도움을 받건, 개선하는 것이 무조건 맞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삼분의 일 정도는 무의식이 잠자는 행위를 통해 -활동아닌- 활동을 하는데, 내가 낮 동안의 의식적인 활동을 위해 노력하고 지불하는 비용에 비해, 밤동안의 무의식의 잠을 위해서는 너무 무심했구나 싶었다. 어릴 적에도 밤은 소중히 여겼지만 잠은 가능하면 자고 싶지 않았더랬다. 고집스럽게 밤을 새고 아침밥을 먹고나서야 기절하듯 골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제라도 밤과 낮의 조화,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맞춰보려는 시도를 하게되었으니 참 다행이다. 치료 과정의 고통이나 불편함보다는, 이제 나의 무의식이 경계 없이 우주와 교감하는 일에 더 이상 아무런 방해없이 자유롭게 연결되고 떠다닐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기대가 된다.

Jun 29, 2023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남산도서관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서예를 배운다. 수강생이 스무 명 남짓인데 그중 제일 산만한게 나-일 정도로 수업 분위기가 좋다. 대학 졸업하고서야 비로소 서예의 중요성을 알고 인사동 골목골목 서예 선생님을 찾아다녔지만, 불안정한 생활과 끈기 부족으로 늘 배움을 포기했더랬다. 아내가 서예를 꾸준히 써왔기도 하고 또 주변에 훌륭한 서예 선생님이 계시지만, 또 포기하고 말 것이 두려워 우물쭈물 시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 서예 프로그램을 보고는 이거다 싶어 시작하게되었다.

어렸을 때는 서예를 잘 배워서 그림과 어울리는 화제를 슥슥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붓을 운용하는 묘미나 한문을 익히는 과정을 즐거움을 알기도 전에 남들에게 보여주고 생색낼 생각만 했던 것. 나이를 먹다 보니, 그런 것보다 아주 느리더라도 단 하나의 작은 깨달음이라도 확실하게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욕심나는 것들에 대해 이제라도 좀 더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관계에 있어서도, 인생을 대할 때에도, 태도의 전환이 중요한 것 같다. 완벽한 결과에 대한 환상을 쫒기보다, 매일 조금씩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지반을 다지는 것에 집중할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 그런 태도- 를 갖게 되길

May 13, 2023

도쿄로 돌아와 고토구에 있는 비지니스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국립신미술관에서 루브루전을 보고 오모테산도 거리를 지나 요요기 공원을 걸었다.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덕분에 숲의 향기가 짙게 베어나왔다. 몇년 전에는 혼자 걸었던 길을 아내와 함께 걸으니 좋았다.

May 12, 2023

교토와 나라 여행,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지역이라 그런지 마음이 더 편했던 두 고도古都. 수백년 된 역사를 가진 가게들이 즐비하고, 그 역사를 칭찬하면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며 손사레를 치는 가게 사장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골목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어 놀라웠고, 수백년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점이 무척 부러웠다. 성지순례하듯 고매원 본점을 방문하고 신난 우리들! 교토-나라 여행기 끄읕!

May 10, 2023

몇년 전에는 관객으로 둘러보았던 아트부산을 이번에는 개인전을 여는 작가의 자격으로 오게되다니- 감개가 무량. 부산에 나를 잡아당기는 어떤 좋은 기운이라도 있는 것인가-. 언제의 어떤 나의 카르마가 영향을 끼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의 과거와 현재의 일들에 고마움을 느끼며-

March 31, 2023

절정이었던 어제와 오늘의 공원. 요즈음 자꾸 다짐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너무 좋다고 호들갑 떨지 말자는 것. 절정의 순간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계절에도 아름다움을 찾아 느낄 수 있는 어른으로 늙어가길. 아내 덕분에 매년 꽃놀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