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0, 2017

올빅에는 삼 일째 비가 내리고 있다. 낮 동안은 잠잠하더니, 해가 지고 나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창밖이 시끄럽다. 멀리 보이는 산에서는 전에는 없던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내려온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법.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과연 나는, 좋은 것만 취하려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공교롭게도 오늘 읽은 장자 제물론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있음有에서 생겨나고, 있음有은 없음無에서 생겨났다. 유有를 있게한 무無는, 유有가 없으면 불가능한 무無이기에 이것을 초극하기 위해서는 없음의 없음無無이 있어야 하고, 없음의 없음無無은 없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또 한 번 초극하기 위해 없음의 없음의 없음無無無을 가정해야 한다는... 말장난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나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좋지 않음'을 느끼고싶지 않기 위해 떠나왔지만, 당시 '좋음'은 그 '좋지 않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좋음'이고, 나쁨으로부터 격리된 현재의 좋음은 좋기 위해 또 다른 '나쁨'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 문득문득 내가 이곳에서 무얼 하고있는 것일까-하는 자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내 생에 이러한 생활형태를 가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공동생활을 위한 규범은 있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은 자유인 곳. 생활비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덜 한 곳. 누구도 내가 무얼 하는지 간섭하지 않고, 누구도 내 작품을 평가하지 않는 곳. 마치 누군가 나를 책상에 앉혀두고 덜렁 흰 종이를 주고는 아무 것이나 그려봐라 하고는 나가버린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돌아와 내가 그린 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도 해주지 않는 그런 이상한 기분 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애초에 그런 상황에 던져지는 것과 비슷할런지도 모르겠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이 물론 일생에 마주쳐야 하는 어려움의 대부분이지만, 그 이외의 성취에 대해서는 사실 누구도 뭐라 할 자격이 없다. 다들 자신이 만들어 낸 기준을 향해 달려가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오늘 하루 종일 콘테 그림을 그렸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전에 그리던 그림을 구상해 보려 해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멋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만 잔뜩 있고,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질적인 계획들은 있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진다.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좋은 작업이 나올까.

오늘은 이만 쓰기로 한다. 

February 19, 2017

일기를 저녁 늦게 쓰려다보니 졸려서 중간에 포기하고 잠드는 일이 잦았다. 조금 일찍 창밖이 어두워지면 쓰기로 한다. 그러다보니, 전날 저녁에 있었던 일들은 본의 아니게 기록에 남지 않는다.

어젯밤에는 필립이 독일에서 가져온 보드카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어제도 오늘처럼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다들 집 안에만 머물다 보니 무료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렇게 필립Philipp과 나이Naï, 셋이서 조용한 거실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눴다. 기억에 남는 건, 필립이 기억하고 있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벽이 무너지던 날 가족과 함께 장벽 너머 동베를린 지역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서로 꽃을 주고받던 모습이 생생하고 했다. 통일 이전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들었다. 내 생에도 그런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하게 될까? 옛날 얘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말할 기운이 없었고 또 영어에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상태여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조금 후에는 레지던시를 관리하는 한스 씨와 그의 부인 시모네 씨가 그 자리에 가세했다. 한스 씨는 올빅 사람들에 대한 얘기와 그동안 레지던시를 거쳐 간 작가들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벌써 떠나는 날 서로 어색하게 여러 번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한 모금 두 모금 알콜로 몸을 덥혀가며 조촐한 대화를 자정까지 이어갔다. 

오늘은, 메센에 입주한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특별한 일 없이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이 되니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오늘 한 일들은 대게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일이었다. 날씨 때문에 우울하다기보다는, 여기의 생활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했던 것 같다. 오늘보다 어제 더 생기가 넘쳤고, 어제보다 그제 더 많은 호기심을 가졌었다. 석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 과연 나는 얼마나 변해있을까? 변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변하지 않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모든 것을 흘러가는 그대로 맡길 것이다.

오전에는 잠시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와 글을 썼고, 점심에는 어제 먹다 남은 카레를 먹었다. 낮에는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오는 기차에서 보았던 눈 덮인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천천히 검은색을 칠해 나간다. 해 질 녘에는 비를 맞으며 낚시를 하러 혼자 나갔는데, 몇 번 신나게 바늘을 던지다가 그만 바위 절벽 아래 밧줄에 걸리고 말았다. 이미 깊숙이 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바늘을 풀기 위해 절벽 아래로 내려갈 용기는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바위는 미끄러웠고, 물은 어제보다 더 짙은 검은색이었다. 낚싯줄을 힘껏 잡아당겨 바늘을 끊어내고 허탈하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잊지 말고 한스의 낚싯바늘을 사서 돌려놔야겠다.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각자의 방에서 무얼 하는지, 커다란 집이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계속 그림을 그리던 중 필립이 무언가 물어보러 작업실에 왔다. 뭔가 작업 중이라길래 필립의 작업실로 놀러 갔다. 필립은 지난번 산행 때 얘기했던 사진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공중에 이런저런 물건을 매달고 회전시켜 장노출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굳이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으면서도 하고자 하는 것을 망설임 없이 실천에 옮기는 그의 추진력이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대단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말 즐기는 듯 보여 보기 좋았다. 과연 나는 정말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February 18, 2017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역시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는 우스꽝스러운 꿈이었다. 꿈속에서 굉장히 먼 거리를 빠르게 뛰어다녔는데, 그 때문인지 자고 일어났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마도 어제 비를 맞고 돌아다닌 영향도 있을 것이다. 겨우 일어나 씻고 작업실로 내려왔다. 

정문 현관 앞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한 개비를 다 태울 때쯤, 이곳에 함께 머무는 또 다른 작가 샌드라가 문을 열고 나왔다. 덴마크에서 온 친구인데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많은 것에 궁금증이 많고, 나이는 많지 않아 보이는데, 이곳저곳을 다니며 경험을 많이 쌓은 친구 같았다. 이 친구에게는 조금 독특한 '넉살'이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마치 방송 진행자 같은 표정과 손짓를 지어 보이며, 유창하게 뭔가를 말하는데, 독특한 억양 때문에 알아듣기 쉽지 않다. 담배를 무척 자주 피우러 나가고, 주로 밤에 작업하는 편이라, 가까이하면 왠지 원치 않는 습관이 물들까 봐 나도 모르게 조금 거리를 두던 중이었다. 샌드라는 늘 비니를 머리에 쓰고, 진녹색의 긴 코트를 입고 있다. 어쩌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컨템포러리 아트'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강박을 가진 그런, 속 빈 강정 같은 친구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이 친구는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뛰쳐나온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을 속단하지 말자. 더 적극적으로 궁금해하고, 대화를 나눠보자. 다시 한번 다짐한다. 

샌드라는, 오늘 덴마크로 떠난다고 했다. 덴마크에 갔다가 다시 핀란드로 가서 해야 할 작업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는 오슬로의 예술대학원에서 연락이 와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나는 그저 '오, 그러냐' 하는 성의 없는 추임새 대신,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산드라는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돈에 쪼들리며 여기저기 오가며 작업해왔기에, 이제 어느 한 곳에 머물며, 좋은 환경에서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냐고 물으니, 자신이 만들고 있는 에칭 작품집에 관해 이야기했다. 유럽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수집했던 것들을 에칭으로 옮겨 그리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안정적으로 작업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조금은 쑥쓰러운 듯 이야기 했다.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너에게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샌드라는, 자신에게 행복이란,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무얼 할까 고민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 계획과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 샌드라에게 행복과 만족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제 필립의 대답에 이어, 참으로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이었다.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다시 기분 좋게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 구상을 했다. 어제 산책길에 보았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언덕에 올라가서 바라보았던 안개가 자욱하게 낀 피오르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계속해서 풍경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그 이외에 다른 것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는달까. 그만큼 이곳 환경이 주는 영향이 크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동안 풍경화에 대해서 다소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보고 그리는 것일 뿐, 그 안에 어떤 마음을 담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해보지 않았달까... 며칠 풍경을 붙잡고 있자니,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보였다. 단지 손의 표현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 풍경은 주로 다루기 쉬운 콘테로 작업하고 있지만, 담채로도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생과 연습이 필요하겠다.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요리 거리가 다 떨어진 상태였다. 카레를 해 먹기로 하고, 식료품점에서 쌀과 당근, 양파와 감자, 그리고 카레 가루(처럼 생긴) 것을 샀다. 카레 가루가 어디있냐고 직원에게 물었는데 갑자기 서너명이 달려와 찾는 것을 도와주어 깜짝 놀랐다. 쇼핑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식욕이 올라 곧장 주방으로 올라가 요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샌드라가 덴마크로 곧 떠날 참이라며 들어와 황급히 이것저것 챙겨서 나갔다. 한동안 못 볼 것을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에 잘 다녀오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카레는,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는 달랐지만, 적어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니 필립이 낚시를 하러 가자고 한다. 정말 에너지가 많은 친구이다. 

작업실로 돌아와 어제 산책길에 찍었던 바위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테로, 바위의 음영을 똑같이 따라 그리려고 하니, 영 갑갑했다. 한 이십 년 전(이십 년 전이라니!) 미술학원 다닐 때, 헌책방에서 구해 온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의 사진을 보며 이것저것 따라 그리던 때 생각이 났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즐거웠다. 적어도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그런 부분일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으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 

해 질 녘에 되어가자 필립이 낚시를 하러 가겠다고 한다. 소화도 시킬 겸 따라나서기로 한다. 한스씨의 낚싯대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들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로 나가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아마 필립이 말한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을 그저 할 수 있기에 느낄 수 있는 행복 말이다. 집 앞에 커다란 바위 언덕을 돌아 내려가면 작은 오두막이 있고, 그 옆으로 널찍한 바위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낚싯대를 던졌다. 물론 낚싯대를 멀리 던지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그저 낚싯줄이 감긴 작은 도구였을 뿐인데, 어떻게 줄을 풀어내는지 몰라 한참을 씨름했다. 제법 멀리 찌를 날려 보낼 수 있게 되자, 제법 낚시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 십여 분 낚싯대를 던졌지만, 물론 아무소득이 없었다. 필립은 아직도 낚싯줄을 푸는 법을 몰라 심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사십이 넘은 친구가, 신이 나서 낚시를 가자고 해 놓고는, 몇 번 던져보지도 않고 도구 탓을 하고, 이런저런 불평을 하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삼십 분도 채 안돼서 낚시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필립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나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바위 그림을 이어갔다. 완성도 하기 전에 조금 질려버려서 그만두었다. 늘 쓰던 잉크가 그리웠다. 잉크로 다시 다른 바위 그림을 그리다가 또 그만두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에, 마음이 산만한 듯 느껴졌다. 또다시 마음이 조급해지려 한다. 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쩌면 오늘의, 이곳에서의 과제가 아닐까. 

일기를 쓰고, 다시 집중해 보기로 한다. 

February 17, 2017

조금 늦게 일어났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다. 매일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꿈을 꾼다. 전보다 많은 시간을 나에게 집중하며 지내고 있지만, 아직 많은 한국에 남기고 온 많은 것들에 대해 부담감을 가진 듯하다. 몸이 무거웠다. 뜨거운 물로 경직된 몸을 이완시키고 작업실로 내려오니 어제보다 조금 늦은 아홉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어제와는 또 달랐다.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데다가 산허리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있었다. 거기에 철강공장에서 올라온 희뿌연 수증기가 더해져, 온 세상이 젖은 이불에 둘러쌓인듯 축축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젯밤에는 젖은 나무와 이끼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더니, 오늘은 바닷물 냄새가 풍겨왔다. 

산책을 가면 좋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러 갔다가 필립을 만났다. 늘 뭔가에 들떠있는 표정의 필립은, 상기된 표정으로 하이킹을 가자고 했다. 그제야 무심결에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래, 그러자.’고 말했다. 막상 다시 작업실로 내려와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그대로 차분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기도 했다. 장자를 읽었다. 제물론 2편, ’이것’과 ‘저것’에 대한 이야기.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필립이 분주하게 옷을 차려입고 와 방 문을 두드린다. 한 두시간만 운동 삼아 나갔다 오자는 심산으로, 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지난번 산행과는 달리, 필립의 발걸음이 빨랐다. 조금 전까지 짜증 나는 일이 있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 역시 자신이 있었던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필립은 끊임없이 중간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산에서 물이 흘러내려 절벽에 매달린 채 얼어버린, 허연 고드름을 열심히 찍었다.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짓눌려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깨진 잿빛 암석과, 자신의 차가움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얼어붙은 하얀 얼음의 대비가 눈길을 끌었다. 어떤 곳에는 아침부터 내린 부슬비가 제법 큰 물줄기가 되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찍는 사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깊은 밤 산에서 찍은 장노출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사진처럼, 밤인데도 거대한 암석이 붉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감탄했지만, 왠지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이 아닌 것처럼 힘이 없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내가 신경 쓰였는지, 필립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학교생활 동안 전통적인 기법들을 더 많이 배웠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미술대학 교육에 대해, 교수법에 대해, 분위기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종종 무의식적으로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내가 처해 있던 분위기를 안좋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좋지 않은 말버릇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점차 높아지고, 길은 더욱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도 강해져 방수가 안 되는 내 점퍼가 다 젖어버렸다. 나는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런 얘기를 망설임 없이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필립은 그대로 좀 더 올라가기로 하고 나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작업실로 향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혹은 어떤 목적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를 잡아끌면, 나는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중간중간 멈춰서 풍경을 바라보고, 뭔가 유의미한 것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좋은 쪽으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비에 젖어 무거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허기가 져서 마지막 남은 토마토소스로 요리를 시작 했다. 요리하다 연인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다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화를 내고, 미안해하고, 다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늘 그랬듯이. 오전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었던가 보다. 나는 그저 피하고 싶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다시 과거에 고정시키려 하는 모든 것들을 떨쳐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먼지를 털어버리듯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알고 있다.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다툰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그림을 그렸다. 다행인 것은, 그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콘테를 종이에 안착시키며, 아침에 읽었던 장자의 말을 떠올려 본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를 말한다. 양극이 동시에 머무는데, 그것을 어떻게 일치시키며, 또한 조화시킨단 말인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은 장자를 처음 읽었던 10대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예전보다는 더 가깝게 와 닿는다. 적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만큼은 이제 정확히 알 것 같다. 

Grieg

꿈에 시달렸다. 많은 아는 사람의 얼굴이 등장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잠이 모자란 기분이었지만 한국에서만큼 떨쳐내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일어나야 할 이유가 더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일어나 창밖의 풍경을 다시 보고 싶고, 상쾌한 기분을 맛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못한 샤워를 하고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부지런한 필립이 나보다 먼저 나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어제 제임스 터렐의 전시가 어땠느냐는 질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아쉬웠다고 한다. 한국에서 올라프 엘리아슨 전시를 관람했을 때 나 역시 사람이 많아 아쉬웠다고 호응했다. 자연스럽게 여러 대화로 이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몇 해 전 오스트리아에 머물며 외국 친구들 사이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의 작가라면, 어쩐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는, 연대감 같은 게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대화 중에 나는, 이곳에 오니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또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며, 서로 격하게 공감했다. 어휘가 부족하고 문법이 제멋대로여도, 마음이 통하는 경우엔, 이렇게 대화하기 쉽고 편안하다. 이곳에서 무엇을 할 계획이냐 묻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필립은 자기가 방콕 레지던시에 있을 때의 경험을 얘기해줬다. 가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고, 그러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재료와 도구로 비디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나보고 새로운 컬러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안될 것 뭐 있나!

오전에는 이곳에 오기 전에 끝마쳤어야 할, 벽화를 그리고 디자인했다. 직접 칠하는 대신, 이미지를 디자인해서 그들이 완성하도록 할 계획이다. 어서 새로운 그림을 스케치하고,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조금 하기 싫은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무엇도 급할 것 없다. 

점심 무렵에는 레지던시가 속해있는 올빅Ålvik 마을의 공업박물관(민속박물관에 가까운) 을 방문하기로 했다. 내가 없을 때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흥미가 생겨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를 인솔해 준 사람은 Bjørn Otto 씨였다. 목소리가 좋다-했는데, 알고 보니 노래하는 음악가였다. 다 함께 (오늘 아침에 Mai 라는 친구가 떠났다!) 마을 초입에 있는 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이며,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살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시대별로 각기 다른 방이 꾸며져 있었다. 호기심 많은 작가들 답게, 건축에 대해, 장식에 대해, 사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오토씨는 흔쾌히 설명해주었다. 

올빅이라는 마을은 지금은 관광객들이 종종 찾는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공업단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노르웨이가 몹시 가난했던 20세기 초반, 처음 수력발전을 위해 공장이 들어서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철강 산업이 발달하면서, 마을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나치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당시 송수관을 폭파시키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잔해가 전시되어 있었다. 공장 근로자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타자기와, 각종 실험도구, 빛바랜 사진들을 구경하며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져보고 물어보았다. 

박물관 2층에는 1920년대, 40년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방이 꾸며져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생활용품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아궁이의 역할을 하는, 석탄으로 음식을 덥히는 가열기구가 있었고, 그 열을 오래 가두기 위한 여러 주방용품,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시설들... 물건마다 그런 모양이어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응접실로 보이는 어떤 방 한쪽에는 작은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는데, 산책을 하며 본 풍경들, 잡지에서 본 사진을 따라 그린 그림, 만화책에서 본 그림, 등 재미있는 스케치가 많았다. 박물관에 가면, 어떤 '사람'의 흔적을 느끼기 쉽지 않은데, 그림을 보니 확실히 어떤 개성을 가진 인격체가 살았다는 것이 실감 나게 느껴지는 듯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처럼, 나는 한참 동안 그 스케치북을 들춰 보았다. 

박물관 견학은 생각보다 굉장히 유익했다! 오토씨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나중에 든 생각은, 박물관 보다, 자신의 집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 뮤지션이기도 하면서,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를 레코딩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교회 건물로 쓰던 곳을 집으로 살고 있다더니, 과연 집 한가운데에 커다란 연주회장이 꾸며져 있었다. 그의 스튜디오와, 그가 수집한 악기들을 보고, 들었다. 그라모폰에서 만든 오래된 축음기를 시연해주기도 했는데, 처음 들어본 기계식 축음기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기로 작동하는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목관악기에서 나는 듯한 따뜻한 음색이었다. 작년에 오슬로의 가정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집 안에서의 생활을 사랑하는 듯했다. 아무것이나 대충 사들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세심하게 물건을 들이고 관리해 온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가 내어준 커피를 마시며 이곳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또 누구에게도 무해한 그런 대화였다. 오토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른 작가들과 좀 더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함께 있는 이들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한 친구인 것처럼 느껴졌다. 

작업실로 돌아와, 저녁까지 벽화 도안을 마무리했다. 내일부터는 정말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일은 필립과 산을 오르기로 했다. 작업은 내일 모래부터 하기로 한다.)

*
작업하는 내내 노르웨이 작곡가 Edvard Grieg의 음악을 들었다. 바그너처럼 비장한 느낌도 있고, 쇼팽처럼 서글픈 느낌도, 드뷔시처럼 낭만적이기도 하다. 선율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Bergen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혀있다고 하니, 베르겐을 방문하면 그의 묘지를 찾아가봐야겠다. 

Trollhovden

일곱 시에 일어나 (일곱 시라니!) 아침을 먹고, 간단히 산책을 했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갈 필요 없이, 그저 건물 밖으로 나가면 거대한 산과 바다가 기다리고 서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주 먼 곳이 다가와 있는 기분이랄까. 시시각각 다른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달리 말하자면 이곳 풍경은 바라보는 주체를 멈추게 한다. 걷다가, 일하다가 넋이라는 것을 잃게 하고 그곳을 향해 서서 바라보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가서 나에 대한 찬가를 지어 바치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거대한 산(다음 날 Hans 씨에게 물어보니 Trollhovden 라는 이름의 산이었다. Troll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산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걸까?)을 그렸다. 대학에서 처음 동양화를 배울 때, 먹빛으로 형형색색의 자연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고민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찍어놓은 사진과 눈앞에 보이는 산을 번갈아 보며 정교하게 그려나가다, 나중에는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 풍경을 그리는 마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혹은 좀 더 정교하게, 어쩌면 좀 더 감정을 담아 그려볼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 무렵에는, 옆방의 Naï 라는 작가가 찾아와,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의 전시장에 갈 예정인데 함께 가고 싶은지 내 의향을 물었다. 생각해보고 알려주겠다 했지만, 이미 집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전시에 대해 조금 찾아보니, 특정한 시각에만 드는 자연광과 제임스 터렐 특유의 색감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전시의 요要인듯 했다. 하지만, 인간의 재주로 창박의 저 눈부신 자연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생활하는 작가들과 친해질 기회를 놓쳐 아쉽긴 했지만, 이 공간을 더 즐기기로 한다. 

풍경화 하나를 마무리하고 다시 산책을 나갔다. 한스 씨가 건물 앞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몸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다 챙기고, 또 아이들을 매시간 돌보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산책하러 가기에 좋은 코스가 있느냐 물어보니, 어제 안전수칙에 대해 설명할 때처럼, 아주 상세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마을로 나가려던 참에 독일에서 온 작가 Phillipp을 만났다. 아침부터 나와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한다. 산정에서 무슨 세례라도 받고 나온 사람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산 위에서 바라본 풍경의 잔상이 남아있는 듯했다. 나중에 함께 올라가기로 약속하고 Ålvik 마을 중심가로 향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읍' 정도 되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백여 채 남짓, 삼각형의 지붕을 한 집들이 길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옹기종이 서 있었다. 새들과 친해져 보려고 빵부스러기를 챙겨 나왔는데, 까마귀며 까치며, 멀찌감치 다가오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래며 달아났다. 고양이도 개도 낯선 동양인을 보고는 경계하듯 어디론가 숨었다. 언젠가 친해질 날이 있으리라. 

한스 씨가 알려준 길을 따라 인적이 드문 마을 오솔길을 걸었다. 근 몇 년간 이처럼 '해야 할 일들'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있었던가? 내키는 대로 걷고, 마음 가는 대로 멈춰 섰다. 사진도 찍고, 풀숲에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주머니에 넣었다.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갑자기 물길이 열릴 때처럼,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무엇이든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낯설고 생소한 기분. 다른 어떤 것에도 깊게 마음을 쓰지 않았고, 온전히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구상하고, 그리고, 걸었다. 그렇게 조용히 오늘 하루를 보낸다.

불안

불안은 미래로부터 온다. 예정된 기일, 영속적 계약, 항구적 관계들 속에서 오가는 약속들,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 자유의 샘을 얼어붙게 하고 어떤 형태로든 변신 가능한 기쁨의 활기를 꺾어버린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사람들은 보장된 미래를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희생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불확실성을 최대한 늘리는 쪽을 택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인데, 그 조심스러움은 나의 미래가 하나의 상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작동한다.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미래가 나를 불안에 떨게 한다. 

약속은 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발생한다. 아무것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영혼은, 애초에 약속 따위가 만들어질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그럴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피해 주지 않는 이 자유인은, 그래서 타인에게 불쾌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껏 폐를 끼치며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정을 쌓아가게 마련인데,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기를 꺼리는 결벽증을 가진 자는 본의 아니게 타인들을 '누'를 끼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자유를 위해, 남들이 저지르는 적당한 양의 '누'를 가늠하고 딱 그만큼을 끼치며 살아간다. 깨끗하기 위해서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는 순백의 몸을 만들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처럼 적당히 몸을 더럽히는 편이 나은 것과 같다.

추운 겨울밤,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 위를 고양이 한 마리가 건너간다. 인적이 드문 공원묘지 쪽, 차량의 출입을 막는 돌덩이 뒤에 고양이가 숨어있다. 어떻게든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길 건너로, 따뜻한 숨을 곳이 많은 곳으로 유인하고싶어 다가간다. 고양이는 내게 다가오는 듯싶더니 이내 다시 횡단보도 쪽으로 달아난다. 갑자기 멀리 언덕으로부터 버스가 전속력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고양이를 구출하기 위해 다가가면, 고양이는 도로로 내달릴 기세다.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되려 고양이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위로를 해준다는 게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도움을 준다는 게 더 큰 위험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다행히 고양이는 버스보다 먼저 길을 건넜다. 고양이는 내 도움 없이도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를 인지하고 피할 능력이 되는 듯했다. 교차로를 건너는 법쯤은 알고 있다는 듯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길을 건너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사람이든 고양이든, 누군가를 돕기 전에, 그가 정말 도움을 원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슬럼프 혹은 매너리즘

더위를 먹었는지 목줄에 메인 개마냥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샤워만 다섯 번.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얼음만 찾아 마시니 식도가 얼얼해지며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침부터 벽에 큰 종이 한 장을 붙여놓았다. 당장 그려야 할 그림이 있다. 밑그림도 다 있으나, 도무지 시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더위는 핑계일 뿐, 그리기가 싫었다. 그리기 싫다는 느낌이 든 것은 아마도 처음일까. 하고 싶은 것이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상업적인 요청에 의한 그림을 그릴 때도 일이라 느꼈던 적 없었는데 이제 제법 일처럼 느껴진다. 다 돈 때문이다.

올해는 그림을 꽤 팔았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팔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할인도 해주고, 묶음으로 팔기도 하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붙잡고 적극적으로 팔았다. 그걸로 상반기를 먹고 살았다. 그토록 오래전부터 바라던 삶이, 그림으로 먹고사는 삶이 가능한 일임을 확인한 터라 기쁘기도 하고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목돈'이라는 걸 꿈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번 만큼 (기다렸다는 듯) 나갈 곳도 점점 많아지기만 하더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게 아니라 십 년간 정성을 다해 숙성시킨 와인을 쏟아붓는 느낌. 맥이 빠진다. '목돈'이라는 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더 약아빠지고 얼마나 더 절실하게 매달려야 할지는 눈에 보이지만,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다.

그리고 싶은 그림보다 그려야 할 그림이 점점 더 많아진다. 어쩌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없는 것일까. 창작 의욕을 잃어버리고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매너리즘이라면 매너리즘이 맞고, 발전이 없는 것이 슬럼프라면 슬럼프가 맞겠다. 무엇이 되었건 멈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구상하고 그리는 일이 아니라 돈벌이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오늘도 전시장에서 소개받은 웬 사모님께 연락이 와, 어떤 그림을 사겠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팔 수 있을지 짧은 순간에 재빨리 궁리하는 나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그림을 팔아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막상 그림을 팔고, 환산된 금액을 손에 쥐고 나면, 그 그림을 그린 것이 마치 (수중에서 금방 사라지고 말) 돈을 위해 그린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기운이 빠져버린다. 그림은 갖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지만, 계좌에 들어와 있는 환산된 금액은 늘 불안하게 한다. 그림은 두고 있으면 사라지지 않지만, 돈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월급을 받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나에게 큰 의미가 없는 노동력의 댓가로 받은 돈은, 먹고 마시는데에 써도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이 아닐까) 하지만, 그림을 팔아서 번 돈은 다르다.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 걷어내야 할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산한 가치를 팔아 생긴 이득은, 더 큰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만 쓰면 좋겠다. 아무튼, 올 여름은 정말 끔찍하다


오월 칠일 토요일

아침부터 볕이 좋은 날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책상 앞에 한참 앉아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구상한다는 핑계로 소파에 드러누워 두 시간을 보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창밖을 내다보니 다섯 시가 돼가는데도 해거름이 아직 멀었다. 해가 정말 길어졌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태양 빛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커다란 지구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사는 이곳은 이내 태양 반대편 어둠 속으로 감춰질 것이다.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태양계 전체의 거대한 회전 운동을 떠올려 본다. 그 장엄한 움직임을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슬프게 느껴진다. 그것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다만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 살아 가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처럼 다음 주까지해야 할 일 때문에 고민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창밖에 느린 걸음으로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수많은 행락객도,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도 부질없는 존재로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잠이 이마에서 코를 타고 솔솔 내려온다. 리오타르니 발터벤야민이니 유명 철학자의 말을 빌려 기획된 전시에 그림을 출품하기로 했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거절하지 못해서 해야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며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전시-라고 요약하면 될까… 아무튼 그런 내용의 전시란다. 사랑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어느 먼 나라 철학자의 자기연민에 찬 생각들이 어느 날 최신 철학으로 소개되어 번역되고 이 나라 젊은 독자들의 손에까지 들려 읽히게 된 것이리라. 그래 맞는 이야기다- 공감하여 이렇게 전시로 기획된다. 한 철학자의 주관이 책으로 만들어져 이 사람 저 사람의 정신을 매개로 흐르고 흘러 나에게까지 당도하는 그 모든 과정을 상상해보면 그 또한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이다. 졸음을 이겨내려고 나오니 광장에는 오월의 맑고 깨끗한 풍경을 배경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커다란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학생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는 연인, 개를 데리고 나온 노인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늘따라 내 눈에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슬프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귀가

저녁 여섯시 무렵이면 낮동안 동쪽 산너머에서 하루를 보낸 기러기들이 날아온다. 아침 여섯시엔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 꼬박 열두시간 동안 저 산너머 어딘가에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볕도 쬐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단체로 귀가하는 것일게다. 기러기들이 시옷자 대형을 유지하며 많게는 백여 마리, 적게는 수십여마리가 함께 노을지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알려진대로 기러기들이 시옷자 대형을 유지하는 것은 선두의 기러기들이 뒤따라 오는 기러기들의 공기 저항을 최소화 시켜주어 최대한 멀리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날아가며 끼룩끼룩 시끄럽게 내는 소리는 선두의 기러기들을 응원하는 소리라고 한다. ‘응원의 목소리라니, 너무 인간적인 발상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인도 기러기는 무려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 8,900킬로미터를 비행하기도 한다고 하니, 과연 힘내라는 응원이 필요하다고 할만도 하다. 장거리 비행을 위해 오랜 세월 그러한 것들을 스스로 터득하고 전수해 온 기러기들이 참 영묘하게 느껴진다. 여기 파주의 기러기들도 이제 봄이 오면 다시 조금 포근해진 시베리아로 날아가 여름을 날 것이다. 그렇지만 왜? 매년 그렇게 얼어붙는 고향 땅을 떠나 따뜻한 곳으로 내려왔다가 왜 이곳에 더 머물지 않는지 갑자기 의아하게 느껴졌다. 제 고향 땅이 그리 춥다면 애써 멀리까지 내려와 먹을 것이 더 풍부해질 여름, 가을을 기다리지 않고, 또는 제 고향보다 포근한 겨울이 기다리는 이 땅에 정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다시 귀향하는 것일까?

머리가 나빠서? 아니다. 기러기들은 그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들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얻고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기 때문일게다. 자유로운 성정의 그들에게 이해타산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적인 습성이 없는 것이 당연할게다. 자유롭지 않으면 그게 어찌 새일 수 있겠는가. 아니면 기억력이 나빠서? 그것도 아닐게다. 기러기들에게는 인간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뻗어가는 단순하기만 한 선형의 시간이 아닌, 아닌 환형의 시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엔 이곳에 왔다가, 여름엔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일 뿐, 다음 다음 계절에 대해, 내년에 대해, 또는 내 후년을 미리 걱정하여 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러기들이 매년 돌아오고 돌아가는 이유가 자유로운 습성이나, 환형의 시간개념 때문이 아니라면, 어쩌면 시베리아 땅에서만 먹을 수 있는 아주 맛있는 곡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신년만감, 이미 봄이다

“나는 1월이 되면 벌써 봄이 온 것만 같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에이, 곧 또 추워질텐데 뭘.”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맞는 얘기가 아닌가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내 마음의 계절이 비로소 봄인가 싶으니 말이다. 그러한 환절의 몽롱한 기운과 봄의 간지러운 징후들이 내게 이미 찾아 와 있으니 말이다.

기운을 차린 태양이 매일매일 더 높은 궤도를 그으며 지나는 것처럼, 나역시 나만을 위해 나지막이 던지던 하루치의 기운을, 이제는 함께할 누군가를 위해 더 힘차게 쏘아올린다.

겨우내 바짝 얼어붙었던 땅이 슬며시 긴장을 놓고 말랑말랑 해지는 것처럼, 나역시 거추장스럽게 입고 있던 잘 맞지도 않는 옷가지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쓰고있던 망측한 가면 따위는 이제 벗어버렸다.

식물들이 지난 가을부터 내 준비한 겨울눈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터뜨리고마는 것처럼, 나역시 그간 애지중지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보살피던 나의 그림들을 더이상 비늘잎으로 감추어두지 못하고 세상에 하나 둘 피워 내보내고 있으니-, 분명코 내게 봄은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다가올 여름을 준비해야 할게다.

온듯 만듯 뜨뜻미지근한 온기만 전해주고 가는 봄의 심드렁한 햇살이 아니라, 세상 미치지 못할 곳이 없을 만큼 멀리 온기를 전할 수 있을만한 든든한 햇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단단해진 뿌리로 담아두었던 우수와 퇴적되어있는 자양들을 모두 빨아들여 정수리까지 힘차게 올려 보낼 추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을 부끄러움 없이 활짝 열어두고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수분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아-, 벌써 가을인가'하고 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겨울에는? 다시 찾아올 겨울에는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긴 잠을 잘 것이다.

모든 것이 설레기만 하는 서른일곱의 봄이다.

집에 가고싶은 마음

저녁 일곱 시, 합정에서 파주로 가는 고속버스. 두껍게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차창에 김이 잔뜩 서려있다. 가지런히 묶어놓은 커튼 매듭이 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리창을 톡톡 건드려 알 수 없는 무늬를 만든다. 사람들은 의자 깊숙이 처박힌 채 말 없이 앉아있다. 도로 가의 가로등과 신호등을 지날 때마다 주황색 초록색 빨간색 불빛이 입구로부터 출구쪽으로 보란듯이 스윽 스윽 자취를 남기고 지나갈 뿐이다. 여기 오십여명의 승객들은 모두 ‘집에 가고싶어'한다. 모두가 한 마음인지라 말이 필요 없다. 거대한 ‘집에 가고싶음'이 버스를 집어삼킨 것이다. 자유로를 빠져나와 교하를 지나며 승객들이 하나 둘 내릴 때 마다 '집에 가고싶음'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종점에 도착하면 마지막으로 '집에 가고싶음'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그저 바깥을 떠돌아 다닐 뿐. 집에 가고싶은 마음은 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절대로 집을 가지지 않는다.

여수

어느 밤, 우리는 여수로 떠났다. 바다를 보러가자! 는 한마디 말이 우리를 움직였다. 몇 시간 뒤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 보다도, 파주에서 여수까지 400km 가까이 달려야하는 이 충동과 무모함 자체를 우리는 더 반가워 했다. 그녀는 나에 비해 결단력이 있지만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떠나길 좋아하지만 많이 망설이는 편이다. 이렇게 다른 성향인데도 오늘처럼 마음이 맞아 떨어지면 우리는 정말 거침이 없다. 여수에 가서 돌산 갓김치를 먹어보자- 는 다소 황당한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계획도 없었기에 여행이라는 말 보다는 ‘도주'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쫒아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엇 하나에도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 지리멸렬과 그로인한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우리의 적이라면 적이었다. 네 시간 여, 긴 시간 동안 떠나가며 우리는 쉼 없이 대화를 나눴다. 각자 읽고 있던 책에 대해서, 불순한 세계에 대해,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 종교와 예술에 대해 어느때 보다도 더 즐겁게 얘기했다. 다른 의견이 있어도 조화롭게 서로 이야기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우리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여수를 한참 앞에 두고 우리는 지리산 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호젓이 화엄사 경내를 산책하는 것을 상상했지만 무리한 탓인지 정오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떳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화엄사에는 화엄華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호객꾼들 뿐이어서 적잖이 실망했다. 지리산 노고단에 가려는 것도 포기하고 우리는 다시 여수로 향했다. 여수로 가는 목전에서 다시 멈추어 순천에 들렀다. 오늘처럼 스산한 날씨에는 늪지 구경이 제격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비싼 표값을 치르고 들어간 생태공원에는 아이처럼 이것봐라 저것봐라 소리지르는 어른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우산을 챙겨나오지 않아 비를 쫄딱 맞고 말았다. 다시 힘을 내어 여수로 가기로 한다. 여수 시내로 들어오자 산등성이를 굽이 돌아 갈 때마다 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친 김에 끝까지 가보자 하여 육로로 연결된 최남단 돌산도로 향한다. 바다 위에 불쑥불쑥 솟아있는 섬을 돌고 돌아 향일암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다가 월요일 저녁이어서 우리 이외에는 관광객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힘이 들었지만 잠시 내려 남해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안개가 들어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다를 면 한 해안가인데도 수면이 호수처럼 잠잠하여 마치 연주자도 관객도 다 떠난 공연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손님들을 기다리다 지쳐 하나 둘 문을 닫는 가게들 때문에 풍경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완벽하게 맑은 하늘 아래로 탁 트인 바다 풍경, 멀리서 불어오는 짭짤한 바다 내음, 그것들을 온 몸으로 느끼며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는 모습. 아마 그런 장면이 처음에 떠날 때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기대했던 장면 그대로에 쏙 들어가 있으면 그대로 좋기도 하겠지만, 예상치 못한 이 우울한 풍경도 그대로 우리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찾아오는 서로의 우울에 대해, 당황해 하며 애써 기분을 전환시키려 한다거나 탓하지 말자-는 다짐을 얼마 전에 했던 터라, 여수 밤 바다의 차갑고 비릿한 풍경도 괜찮았다. 옷깃을 여미고 우리는 향일암 아래 가장 풍경이 좋은 가게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아홉시도 안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11월 초하루

깊은 잠에서 깨어나 가뿐한 몸을 이끌고 아침 놀을 구경하러 옥상에 올라가 본다. 볕이 지평선을 넘지 못해 아직 공기는 차갑다. 나지막한 동산 위 구름이 먼저 해를 맞이해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시끌벅적 가악-가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니, 서쪽으로 뒤늦게 기우는 달을 가로질러 오리 떼가 날아온다. 아마도 임진강 너머 북쪽에서 날아오는 참인 것 같았다. 해 뜨는 저편에 맛있는 아침 거리라도 있는지, 열댓 마리씩 수 백 마리가 무리지어 날아간다. 아직 잠이 덜깼는지 아니면 들떠서 그런 것인지 시옷자 대오가 영 맞지 않는다. 어느새 보랏빛으로 흠뻑 물들어있던 구름이 옅은 주황빛으로 변하더니 산의 우듬지 너머로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공기는 차갑지만 볕을 받는 얼굴로부터 온기가 전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11월 초하루, 때이른 추위지만 파주의 겨울 위세에 대해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온 터라, 올것이 왔구나 싶어 오히려 반가운 기분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한겨울 이불 속 포근한 온기와, 끝나지 않을 듯 길고 긴 밤을 사랑한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생각과 감정들에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가며 추억하기에 좋으며, 다가올 한 해에 벌어질 일들의 단초들을 붙잡고 온갖 상상을 펼쳐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 것이다.

이천십오년 시월 사일

파리에서 Drawing Invisible 이라는 제목으로 그룹전에 참여하게 된 건 데미안이라는 친구 덕분이다. 올 봄인가 자기는 파리의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큐레이팅하는 전시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며 메일을 보내왔다. 루마니아 전시가 먼저 잡혀있었기에 조금 망설이고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런던 전시를 제안해왔던 스테파니씨를 통해 직접 의향을 물어와 덜컥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데미안이라는 친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렇다고 초면인 스테파니씨와도 그리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어서 전시에 참여하겠다고 말 해놓고도 많이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시월에 네개의 전시를 치르는 살벌한 일정이 잡히게 된 것이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으로 들어오자마자 (무려 택시를 타고) 찾아간 곳은, 파리 전시를 주최하고 또 재단을 설립한 에마뉴엘씨의 스튜디오였다. Montreuil이라는 생소한 파리 외곽 지역에 있었기에 세번 째 방문하는 파리였지만 조금 긴장이 되었다. 적어도 백년은 넘어 보이는 삼층짜리 건물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뒷뜰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나 있었고 방치된듯 보이지만 잘 가꾸어진 화단을 지나자 흰색과 회색으로 깔끔하게 단장 된 스튜디오 건물이 나왔다. 공장을 개조한 건물인지 긴 벽 위에 간단히 지붕이 올라와 있는 단층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나를 맞아 준 사람은 곰같은 덩치를 한 중년의 사십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아저씨였다. 뭐랄까 용이 나오는 판타지 영화 속에 등장할 법한, 인간계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성의 성주같은 이미지였다. 낡은 티셔츠에 달라붙는 검은 바지, 그리고 가죽 자켓까지, 은퇴한 록커같이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덩치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눈가에는 주름이 멋있게 새겨져 있었다. 악수를 청해 붙잡은 손은 무지하게 억새고 단단했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이런저런 일들로 시달렸는지 큼지막한 책상 위는 각종 유리병과 담뱃갑, 서류들로 가득했다. 여행은 어땠는지, 전시는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이 공간은 어떤 곳인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연신 수줍은 표정을 하며 설명해주는 모습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팡데옹 근처에 사는 데미안을 만나기 위해 우버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얼마 안되는 시간에도 벌써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엠마뉴엘은 작가는 아니지만, 파리에 두어군데의 장소를 가지고 패션,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고있다고 했다. 열 일곱살 스무살이 된 아들과 딸이 있는데 어린 딸은 예술에 관심이 많아 다행이고 아들은 경영쪽에 더 관심이 많아 아쉽다고 했다. 데미안과는 데미안의 아내, 마야를 통해 알게되었는데 그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 듯 했다. 마야는 동양철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녀의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일본에서, 또 중국에거 어떤 일을 했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일을 더 하고싶은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데미안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보통의 다른 유럽의 집들과 달리, 한국으로 따지면 반지하 창고같은 문을 열고 데미안과 그의 아내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패션모델을 했으면 어울렸을 법한 장신에 미소년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어주는 데미안과 그의 품에 안겨있는 작고 동글동글한 그의 아들, 말로우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아내 마야 역시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친구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서로 볼을 대고 인사를 나누고 나에게도 역시 따뜻한 환대의 의미로 안아주려고 한 것 같았으나 내가 멈칫하고 손을 내밀어 서먹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예전에 비엔나에 살 적에 느꼈던 훈훈한 마음씨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뉴욕에서 만났던 다소 새침했던 친구들이 떠오르면서, 다시금 유럽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것 같았다.

tumblr_inline_ny297pQxCN1qboguy_500.jpg

세상에 둘도 셋도 없을 이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곳은 또 어찌나 아늑한지, 파리에서도 가장 유서깊은 고블린 근처의 이 건물은 지은지 900년은 넘었을거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전에는 방직, 염색과 관련된 장소였고 지금도 그와 관련된 학문을 가르치는 유서깊은 학교가 있다고 했다. 방이랄 것도 없는 작은 거실과 그에 연결된 작은 침실, 그리고 안뜰로 연결되는 문이 이 집의 전부였지만, 그 둘이 살기에 부족할 것 없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팔개월 된 아기를 위한 용품이래봤자 색색의 작은 블럭과 고양이 인형, 접이식 유모차가 전부인듯 했다. 무엇 하나 과한 데 없이 소박하게 사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700여 쪽의 전시 책자를 편집하고 있다기에 적어도 여러명의 편집자와 함께 일하고 있을거라 생각했고, 엄청난 스트레스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할거라 생각했는데, 중요한 사람이 왔으니 다른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시종일관 너그러운 모습이었다. 거실 한편에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사이좋게 와인을 한 병 꺼내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가끔씩 프랑스어로 엠마뉴엘과 데미안이 대화를 나눌 때면 대현을 위해 영어로 얘기 하라며 핀잔을 주는 마야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전시 얘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안되는 영어로 그림과 철학, 문학에 대해서, 좋아하는 작가들을 열거해 가며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피곤해지면 급격히 떨어지는 내 조악한 영어 실력도 유창하다 칭찬해주며 열심히 들어주고 또 대화를 이어가 주는 마음씨들이 고마웠다. 데미안과 마야는 사년 동안이나 다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랑을 했다고 한다. 놀라워하는 내게 사년 동안 들고다녔다던 낡은 여행가방 두 개를 내게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엠마뉴엘은 다른 약속이 있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가면서도 내가 집에 못찾아갈까봐 무진 걱정을 해주었다)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으러 나섰다.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하나, 애기가 함께 갈 수 있을만한 곳은 어디인가, 또 일요일이라 문을 연 곳을 찾는 그들의 모습이 불안해 보이길래, 눈에 보이는 피자집을 보며 나는 피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들도 다행스럽게 여겼는지 근처에 맛있는 피자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피자집에서도 여전히 대화는 즐거웠지만, 졸려서 보채기 시작한 말로우를 품에 안고서 먹는둥 마는둥 하는 마야가 안쓰러워 나도 이내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이며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위에 가지런히 놓고 열심히 입가심을 했다. 데미안도 그런 아내가 신경쓰였던지 내 사인을 알아채고는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부리나케 계산을 마치고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지하철 역 앞에서 몇번이고 돌아가는 길을 확인시켜주던 이 사랑스러운 부부와, 이번에는 나도 프랑스식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바쁜 일정에 대한 부담감이 싹 가시는 듯한 아름다운 파리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둔-탁

가벼웠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또 하늘을 붕붕 날아갈 것 하다가 심해로 무겁게 침잠한다. 들쭉날쭉한 기분을 날씨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화창하고, 그렇다고 계절변화를 탓하기엔 완연한 여름이다. 그러니 궁색해진 호주머니 사정이나 탓해야겠다.

변화무쌍한 마음을 다잡는데에는 그림그리기, 색칠하기가 최고의 방편이었으나, 요즈음은 통 먹히질 않는다. 그건 아마도 요즈음의 마음이 잘 보이지 않아 다 낡아빠진 옛날의 것들을 여태 그리고있기 때문이리라

색즉시공 공즉시생. 허나 색은 너무 현실적이고 또 눈에 잘 보여 도저히 공하다 말 할 수 없다. 완고하게 여기 ‘있다'고 말하는 듯, 여기에서 저기로 드나들며 나를 움직이는 마음을 그저 눈가리고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마음의 무게에 비해 몸이 차라리 더 가벼운 듯 하다.

최상의 정신감응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완전해질수록 말이 점점 필요 없어짐을 느낀다. 물론 무엇인가에 대해 의욕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각자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마음에드는 단어를 선별해가며 긴 문장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말 보다는 몸짓이나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고 읽는 일이 많아졌다. 무언가 표현하기도 전에 서로의 생각을 알아채는 정신감응의 신비도 이제 우리에겐 일상이 되어버렸다. 생각을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하기도 전에 그것을 알아채버리기 일쑤다보니, 단어 하나, 음절 하나 정도로도 의사전달에 불편을 못느낀다. 게다가 요즘엔 새로운 소리에 대한 탐구심마저 높아져, 바깥에서 희안한 소리가 들려오기라도하면 경쟁하듯 그 소리를 흉내내고 서로 낄낄거린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그 소리들을 문자로 기록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 노트엔 아마 ‘으읗!’, '흐읍!’, '끄억!’ '뿌-후으!’ '흐어어어-’ '흐-! 으어ㅓㅓㅓ!’ 하는 식의 괴상한 외침들로 가득할 것이다. 정신적 교감의 측면에서 복잡한 말로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 보다 '끄윽끄윽-’ '흐어어엉-’ 하며 소리내는 것이 더 고차원의 의사소통이라면, 그러한 '외침’, '울음’, '지저귐’, '짖음'을 이미 사용하고있는 동물들이 어쩌면 사람들보다 더 완전한 교감을 이루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식물들은 작은 흔들림이나 떨림만으로도 타자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는 최상의 정신감응의 경지에 이르러있는지도 모를 일.

Draw a Curtain

미시간 음대에 다니는 Rachel 이라는 친구가 내 그림 중 Draw a Curtain이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음악이라며 링크를 보내주었다. 작곡에는 문외한인지라, 나로서는 어떻게 이런 곡을 창작할 수 있는지 감탄스럽기만 하다. 내가 그림을 창작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유추해보자면, 음악을 작곡하는 일도 아마 마음 속에 떠오로는 어떤 환영을 기록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눈을 감고 그녀의 “Appulse”라는 곡을 듣고 있으면, 무대위로 고개를 푹 숙이고 느린 걸음으로 등장하는 한 사람이 보이고, 곧이어 잰 걸음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사람이 보인다. 나중에 등장한 이 인물은 무언가 갈급한 표정으로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인물 주변을 잽싸게 맴돌며 탐색한다. 버드나무처럼 흐느적 거리는 인물1의 알 수 없는 태도에 참다못한 이 성급한 인물2은 인물1의 손을 붙잡아 이리저리 흔들고 또 비틀어본다. 인물1은 성가신 인물2의 집적거림에 참을 수 없지만 딱히 저항하지도 않고 여전히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나부낀다. 인물2는 그 힘없는 몸짓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성과인 것으로 착각하고 더욱 우악스럽게 인물1을 잡아 채고 넘어뜨린다. 그것이 폭력이 아닌 유쾌한 춤이라 믿고있던 인물2는 어느 순간 자신이 그동안 인물1의 껍데기를 붙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근황

간밤에 다녀간 폭풍우 덕에 공기가 맑다.

바람이 시원하다.

연달아 네개의 해외 개인전이 잡혔다.

마음이 바쁘다.

식목일에 파종했던 시금치를 수확해 파스타를 해 먹었다.

맛이 있었다.

학생들로부터 스승의 날이라고 케잌을 받았다.

뿌듯하다.

앞산 나무들이 짙은 초록빛을 띄기 시작했다.

이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