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카메라, 광대, 혀

인생이라는 것이 영화처럼 정지된 장면들의 연속이고, 그 순간들의 집합이 우리가 살고있는 시간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마치 한 장의 사진을 손에 쥐듯 생의 낱낱을, 순간 순간을 포착하고 재구성 하는데에 장애가 없고 의심이 없는 자에게- 인생은 아름답다. 마치 일 천 조의 프레임으로 찍어내는 초고속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처럼, 그렇게 아름답다. 이것 다음에 저것이 이어지고, 저것 다음에는 그것이 이어진다 라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생生은 매 순간 낯설고 부담스러운 그런 메스꺼운 장소가 될것이다.

세상에는, 멀미가 날 것 같은 이 생生의 연속을 잘 견디어내는 튼튼한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지속됨이 환멸스러워 이따위의 것 그만두어야 겠다 라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그 중간이 낫겠다며 손가락 끝에 잣대를 세워두고 우물쭈물대고있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 균형 잡기위해 둥그런 깡통 위의 널판지 위에서 뒤뚱거리는 광대들처럼, 진지했던 나의 이십대 또한 그렇게 엎어지고 일어서고 미끄러지고 자빠지기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광대가 중심잡기에 성공하건 말건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배꼽을 잡고 깔깔댄다. 아무것도 모르고 진지하게 중심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 광대도 나요. 그것을 비웃는 관객또한 나다. 게다가 중심을 잡게 되는 것은 차라리 광대가 아닌 깡통 위의 널판지가 아닌가.

순대국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으면, 그 안에서 밥알이며 순대껍질이며 온갖 야채들이 뜨거운 국물과 입 속에서 한데 뒤엉켜 있을진데, 비닐 조가리라던가 작은 철수세미 조각같은 이물질들을 나의 혀는 잘도 골라낸다. 나의 뇌 속에도 마치 그런 예민한 혀와같은 기능을 하는 감각기관이 이상스레 발달되어 있어서, 매번 이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내는 성미를 가지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관념적-혀에게 단 것은 쓴것이고, 쓴 것은 단것이다. 별스런 미각을 가진 그 혀는 단 것만 뱉어내고 쓴 것은 자꾸만 삼키려 든다. 그래서 탈이나는 게 어쩌면 당연지사.


포스트모던 보이

저는 도무지 자라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던 하게-

점진적인 내적 성숙이라던가, 진보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게되었다는 말이지요.
왜냐면 그것을 알게된다고 해도, 각자覺者가 된다해도
나는, 한발짝 나아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다고요.
돌부처가 되는 것 이외에 방도가 없어 보여요. 혹은,
와홀이 되거나, 브릴로상자가 되거나 둘중에 하나인지도.

하는 일이라고는, 혹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수중의 돈을 모조리 써버리는 것 뿐.

모든것에 대해 전 인류가 공감한다고 해도
새로워 질 것은 없겠지요.
다들 생겨났으니 살고있는 것뿐이니까요.

참고로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요술

그저 쓰기만 하면 멋진 시가되는 요술노트와
그저 긋기만 해도 저절로 예술이 되는 요술붓과
그저 뚜껑을 닫기만 해도 뜨끈한 밥을 지어내는 요술밥통이 있을때,

나는, 멋진 시를 쓰고 예술을 하고 밥을 먹어서 기쁠까?
아니면, 요술 노트와 요술 붓과 요술 밥통이 있어서 기쁠까?

2007

나는 지금, 언젠가 네가 말했던 <희생>에 대해 생각 해.
스물 여덟 겨울, 내가 아직도 꼬맹이였다는 걸 알 것 같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해야 할까는 더이상 생각 않고,
지금 당장, 무슨 일에든 땀에 흠뻑 젖어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

셋 둘 하나

눈 내린 고적한 사찰에 내가 남긴 발자국.
그 흔적 조차도 그것을 비질하는 이들에게는 번잡함일테지.
강박이라던가 조급함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잊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평화라면 죽는것과 다를게 무엇이 있겠어.
숭고함 따위를 운운할 필요도 없겠지.
아버지의 주검을 마주하는 일처럼, 말이 필요없는 일들이겠지.
완전한 하나를 찾는 게 목적이었다면 누군가가 말하듯 속편하게
셋, 둘, 하나! 줄여나가면 될 거 아니겠어.
인식론적 선천주의라던가 하는걸 운운하면서 말이지.
우리에게 낯선 언어를 주고 사랑을 말해보라고 해.
텔레비전 앞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되지 않으려고,
촌스럽지 않으려고, 또는 기껏 넘어지지 않으려고,
뜨겁고, 떨리는 것 따위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특별히 변명하고 싶지도 않을 때는 있잖아-
역사란 참 가벼운 거야.

세가지 불쾌한 명제

내가 나에게 관심이 없어도 나는 매일을 산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슬픈 통찰이다.

세계 없는 주체가 아닌, 세계도 주체도 없는 영혼-
그것이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외로운 상황이다.

그렇게 외면당한 영혼의 마지막 비명, 죽음-
그것이 인간이 취할 수 없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

우리의 균형감각에 대하여

나는 너에게서 한 없이 가벼운 영혼을 보았다.
너는 나에게서 한 없이 가벼운 영혼을 보았다.
나는 너에게서 끝 없이 가벼워지려는 의지를 보았다.
너는 나에게서 끝 없이 가벼워지려는 의지를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았고 서로의 우정을 과시했다.

나는 너에게 단 1그람의 존재감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단 1그람의 존재감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 1그람이 너의 균형을 파괴하고 떨어지게 할 수 있으니까.
그 1그람이 나의 균형을 파괴하고 떨어지게 할 수 있으니까.
그 1그람이 너에겐 이 세계 전체의 무게만큼 무거울 수 있으니까.
그 1그람이 나에겐 이 세계 전체의 무게만큼 무거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더 없이 가벼워진 나는 너에게 아무런 존재감이 없게 되었다.
더 없이 가벼워진 너는 나에게 아무런 존재감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히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었다.

Oh mercy mercy me

진짜에 대한 규명이 불가능하다면, 가짜에 대한 비난도 불가능하지 않나요. 제가 가짜라는 말은 아니에요. 우리는 진짜를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기위해 한번쯤 가짜가 되어야만 하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사람들은 가짜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 너무 애쓰는 것 처럼 보여요. 이런 날씨엔 마빈 게이의 음악이 좋겠어요. 들어보셨나요. 멀씨 멀씨 미. 우리에겐 카테고리를 나누고, 규명하고, 정의하려는 고질적인 습성이 있는가봐요. 구조주의에 대해서 한번쯤 공부해봐야 할 것 같아요. 고상하고 우아하게 투정 부리고 싶어서요.

어쩌면 당신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포함한 이 모든 논의들이 시시해져 버려서, 혹은 그것을 입밖으로 말하는 것 조차 시시해져버려서 죽어버린게 아닌가 하고. 회의주의에 뛰어드는일은 누구나에게 참 쉬운 것 같아요. 인생은 아이러니이고, 육체는 비극, 비극은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사랑받는 장르이니까요. 그런데, 회의주의자에게 가장 슬픈 일은 말이죠. 이 세상이 따분하고 시시하다는 각성쯤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는거에요. 그리고 그 누구나가 따분하고 시시한 생을 멀쩡하게 살고있다는 거에요.

만약에 생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일이 이 버스에서 저 버스로 갈아타는 것처럼 간단하다면. 그리고 그렇게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그 쪽으로 가보고 싶지 않을까요. 죄책감같은걸 느낄 필요없이 말이죠. 플라톤이든 니체든, 부처든 더이상 따분해지지 않으려고 윤회를 믿어야 했던건 아닐까요. 이 모든 생을 또다시! 반복해야한다면 적어도 지금 뭔가 해야할것만 같거든요.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찾아 듣는다거나, 읽어보지 못한 책을 펼친다거나. 보고싶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거나. 하면서 말이죠.

과연,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회복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거나,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로 해석되고마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오래된 이야기이니까. 그저 역사상 많은 논의들을 참고하시라. 라고 발단이 되는 문장 첫머리에 깔끔하게 주석을 달아놓으면 그만이지 않을까. 너에 대한 논의, 나에 대한 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나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기 다른 질감과 맛을 가진 스시-에 대해서, 70년대와 90년대에 각기 다른 레코딩 방식에 대해서, 아이포드와 소니에 대해서, 잿더미 위에서 피어오르는 매퀘한 연기에 대해서, 종로거리에 깔린 보도블럭에 대해서, 무료로 나눠주는 주간지의 제본방식에 대해서 하루종일 수다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거나 너와 나와 관련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정말이지 생경한 이야기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만질 수 있다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정말 신비롭지 않니. 정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걸까?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낯설음과 어색함에 대한 이야기이지. 나는 어쩌면- '너'의 얼굴을 보면서 미래를 새삼 깨닫게 될지도 모르고, 너에게 귀기울이지 않은 채 나를 구원하는 일에만 몰두할지도 모르고, 너를 만지면서도 절대로 닿을수 없는 너를 신비롭게 여길것 같거든. 이제 막 19세기의 망령들로부터 빠져나온듯 피곤하고, 이제 막 20세기의 따스함속으로 기어나온듯 너절한데, 미래이고 21세기인데다가 무한이기까지 한 너를 내가. 죽거나 잃어버리는 일없이. 나에게 복귀가능한 상태로. 얼굴을 마주한채 만나고 이야기하고 만질수있는것일까?

한편, 우리는 앉거나 누운채로 지금 이렇게 깨어있음을 불안해 하고있잖아. 이 무용한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견뎌내고자 있는걸까?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몰두하거나 관람할것 없는 절대적인 무료함 속에서, 너도 지금의 나처럼, 빛과 인식이 불가능한 이 어둠속에서 눈을 껌뻑거리며, 내가 참여하지 못하는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아니면 끊임없이 관련하면서, 무無가 무無를 생산하며 그저 그렇게 <있는> 그 광경을 지켜본적이 있니? 바쁜 오후로부터 돌아와, 그저 그렇게 내가 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영원히 잠들수도 없고 영원히 깨어있어야할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그저 그렇게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공포스럽지않니? 어느날 태어나, 자라고, 사람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어른이되고, 아버지가되고, 늙어 죽어가는것. 그토록 자연스러운 과정들에 대해서, 그토록 어려운 수사로 포장해야했을까. 구제불능. 그렇게 진화할수밖에 없는건가. 헛수고. 그저 먹고살기위한 방편에 불과한것. 그래- 언제나 극복해야할 대상은 바로 그 불과하다-라는 망할놈에 형용사뿐이지.

너와 내가 여기 이곳

그런게 어딨어? 라는 식으로-
넋놓고 찾아보아도 그런건 없다.
반사도 반영도 아닌, 투영되어지는 것도 없다.
내가 바라보는 나, 없는지도 모르는 너.
멋대로 써놓은 짧은 문장들 속에도,
'나' 라던가 '너' 라고 하는 구멍만 존재한다.

거꾸로 거꾸로만 퇴행하듯 자란 우리는
감각없이 분리된 신체를 가진 유아가 머물다가
결국, 어떤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리거나
언어와 의미로서의 상징계 이전의 그 무엇
Es 로 돌아가 버리는게 아닐까.
너무 일찍. 너무 늦게.

그런게 아니라면 우리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을 느낄 방법이 없으니까.
실감나게- 그것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차라리 <없다> 라는것은 실감나서,
다함께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를
논해야 할까보다.

자연스러운 것이라곤

아, 틀림없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산다는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질뿐입니다.
문득, 느낀다. 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대교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오직 그 순간에만 느낌이라는 것을 갖게됩니다. 그 느낌이란, 뭐랄까, 아무렇지도 않다 하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면 저는 슬며시 웃고, 입을 다물고, 그런 저 자신을 발견하고, 그런 저 자신의 관객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느낌들에 대해서는 뭐라 더 설명할 방법이 없군요.
저는 세명의 다른 동료들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동료들로 말할것 같으면, 올 한해 제가 큰소리로 웃는 소리를 듣는게 소원이라고 말하곤 하는 그런 살갑고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 한명은, 프랭클린 코비사의 다이어리를 줄곧 소지하고 다닙니다. 다른 한명은, 던힐 일밀리를 하루에 세갑 가까이 피운답니다. 그에게 팔밀리 던힐을 피워보라고 권해봤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또 다른 한명은 존경하리만치 말 수가 적고, 유머감각은 없지만 잘 웃는 그런 사람입니다. 유머감각이 없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날 저는 큰소리로 웃어보이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저의 그런 호언장담에 그들 모두가 즐거워 했습니다.
산다는 것, 웃기거나 슬프고, 만족스럽거나 불쾌하고, 자랑스럽거나 창피한 순간들. 그런 느낌들. 그런 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느낌들을 갖는다는 것. 그렇다면, 산다는 느낌은 좋은 기분일까요? 당신에게도 삶은, 산다는 것은, 그런 좋은것인가요?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것인가요.
틀림없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사는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모든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질뿐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라곤 고작 이런 고백들 뿐이겠지요.

소화가 덜 된

나를 좀 내버려 둬. 라는 불만섞인 하소연은 그 대상이 없다.
그저 시끄럽지않게 살아있는것 만으로도 하나의 저지름이다.
의욕을 갖지 않으면, 홀로 단정하게 지워질수 있을것 같지만.
미안해- 라고 말해야만 하는 일종의 감정적 부채는 늘어난다.
설득하는 일에 피로를 느끼고 부조리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착해지고 싶을때에는요

그에게 동정 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그에게 배려 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그에게 설교 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그에게 어른 일 수 있는 기회를 줘라.
그에게 심판 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그것이 예의 라 하는 것인가보다.

굴착

이 땅굴 안에서 나가는 방법은,
위로 올라갈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아래로 파내려 가는 것이다.
라고 홀로남은 또다른 동료에게
나는 힘차게 외칠 수 있을까?

불순하고 맛있는 인사

나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가 있는지를 다른 이에게 설명하는 일이란,
소중한 감정일 수록 더이상 진부해지지 않도록 감추어두고 내 안에서만
되새김질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 처럼, 아쉽고 불안하며,
내게는 건전하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입 밖으로 그것이 나오는 순간,
오염되고 불순해져버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를 칭찬하거나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허영에 달고 맛있는 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벽을 오늘 하루만 모른척 할 수 있고, 그 금기를 단 한번 어길 수 있다면
몇년이 지났는데도,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으며
그래서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이 사람에게,
아직 남아있는 묵은 레파토리를 이야기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이 사람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전하고 싶어진다.

이 사람에게 만큼은,
내 내면의 부조리에 대해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에게 그것이 결론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그 고마운 전제가 확고하기 때문일테고
심각한 표정으로 정의내리거나 심판하는 대신에
서로를 약올리고 키득거릴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일게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말들이 입술에 침이나 바른 말
일수도 있다는 유쾌한 불신도 존재

이사람은 내게,
슈타인 박사의 니나 부슈만도 아니고,
히스클리프의 캐서린도 아니고,
와타나베의 나오코도 아니고,
제시의 셀린느도 아니다.


더 많은 말은 아껴야지.
생일 축하해. 그리고 고맙습니다. :)

안웃겨

어떤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에게서 고작 '웃기는 이야기' 를 기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좀 더 흥미로운 사람은, 볼펜 하나를 사는 데도, 필통 속의 연필과, 지우개와, 샤프와 색을 맞추기 위해 쓸데 없이 고심하는 별난 편집증을 가진 사람이라던가, 영화를 고를 때 무조건 영화 제목이나 포스터의 퀄리티만 가지고 판가름 하는 별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슬픈 연기에 재능이 있는가를 묻고있는 괴짜라던가, 즉석에서 몇 분 동안이나 무엇인가에 대해 박식하게 설명해놓고도 결국 거짓말이었다고 유유히 털어놓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사기꾼 내지는 변태, 혹은 몽상가나 편집증환자, 나르시스트나 돈키호테- 그런 사람들이 내겐 좀. 더.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변태도, 사기꾼도, 몽상가도, 환자도, 시인도 아닌 나는 재미난 농담도 하나 모르는 참 따분한 사람이지 않은가 싶다. 아마도, 스스로를 위해서 만큼은 부지런하다가도, 누군가를 위해서는 한 없이 게으-른 그 태도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고로, 누군가를 웃기는 재미난 그들이야말로 진정 이타적, 헌신적인 사람들인 것.(이란 말인가?) 허읍. 나도 witzig 한 사람이고 싶긴해.

지트로엔 리모나데

언젠가는 고백 하고 싶은것 처럼 언젠가는 고백 받고 싶어. 네 손이 닿지 않는 곳 어딘가에 있는 그 공책. 그 공책을 꺼내서 가장 난폭하게 휘갈겨 쓴 페이지를 펼치는거야. 그리고 아래에서 두번째 줄에 유배된 그 단어를 한번만 다정하게 읽어줄수 있겠니. 호주머니 속에서 엄지 손가락을 꼭 움켜쥘 때 처럼 다정하게, 영장류의 커다란 동공을 바라볼 때 처럼 슬프게. 크리스탈의 외로움을 훔쳐보거나 불 꺼진 엘리판트를 쓰다듬을 때 처럼 먼 목소리로. 잘 봐. 파퓰레이션은 이제 의미 없단 말야. 우리는 정점에 있었던 거라구. 공책 한가득 진동하는 싸구려 볼펜 냄새에 익숙해 져야한다구. 어쩌면 노란 나트륨등 아래에서 포장마차를 하시던 우리 작은 이모처럼 현명해 져야 할지도 몰라. 아- 새벽 네시 도로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시속은 얼마나 서글픈지. 그것도 모르고 나는 버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거야. 지트로엔 리모나데!

일종의 속죄

더럽고 또 더럽다.
당신이 나의 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의 적이기 때문에 나는 숨고 또 숨어야 한다.
당신의 주변에 서 있더라도 당신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존재감 없이.
입을 꽉 다물고, 생각을 해야된다.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생각을 통해 구제 해야만 한다. 당신이 아닌 나를.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나를 구제할 수 없도록.
나는 나를 구제해야 한다.
더러움 속에서.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 것도 선언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다짐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 것도 다짐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 것도 비난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

태어난 적 없었으면
이렇게 귀찮은 생을 원하지도 않았을텐데.

결손 의지

필름이 남아있지도 않은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육십분 후에 꺼지도록 맞춰놓은 모과이의 음악은 벌써 끝이 나 있는데도 나는 깨어있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두려 해도 자꾸만 라이프치히 차가운 공기가 슬그머니 그것을 밀고 들어오려는 통에, 나는 계속 담배를 돌돌 말거나, 냉장고에서 몰래 차가운 우유를 훔쳐 먹으면서 온기를 유지한다. 어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노이즈도 그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누어 끼고 듣는 것 만으로도 그 순간부터 그 것이 내게 결정적 비지엠이 되어 버리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 서랍 속에는 5센트 짜리 동전 한 개와 2센트 짜리 동전 아홉 개, 그리고 1센트 짜리 동전 아홉 개가 차곡 차곡 쌓여있지만 그 것으로는 까칠한 브롯헨도 살 수 없고, 로우펫 프레쉬 밀히도 살 수 없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시간에, 아무 것도 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계절에도, 아무 것도 토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공복에도, 내게는 왜 모든 것이 가능하게만 느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