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생각들

1. 소설이라는 것을 써보겠답시고 매년 연중행사처럼 선언하기 시작한지 한 오년 쯤 된 것 같은데. 무엇이든 시도에만 그친 채 완성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이라는 것은 나 처럼 그저 써 보고 싶어 한다고 해서 써 지는 것이 아니며, 한 권의 소설을 완성 하기까지에는 끊임없이 다짐하고 또 포기하고 또 숙고할 수 있는 무덤덤한 인내와 강한 정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니까.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게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렸으니, 이제 부터는 '난 아무나가 아니야' 라고 매년 선언해야 하려나보다.

2. 이전의 어떤 글에서 한 요술쟁이는 내게, '당신은 그 요술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오' 라고 못박았지만, 요즘 나는 어렴풋이 그 요술을 알 것 같다. 이전에 나는 여느 사람들 처럼 나도 저녁에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 잠들면 다음날 그저 아무렇지 않게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나에겐 그게 정말 '잘 되지 않는 일'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저 보통의 정상적인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 해도, 그 전날 밤 잠들기 전에 얼마나 아침을 열망해야 하는지를 몰랐었다는 말이다. 스물 여섯 해 겨울이 다 지나서야 아침이 얼마나 찬란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3. 가끔 창문을 열어놓으면, 무엇인가가 '빵' 하고 터지는 소리가 그것도 아주 실감나게 빈 도시안에서 들려오는데, 왜 나는 항상 처음엔 그 소리를 총소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가해자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피해자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차가운 도로위에 눕는 상상이나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떤 때 에는 한꺼번에 '빵 빵' 하고 터지기도 하고, 가끔은 시간차를 두고 '빵-' '빠앙' 하고 울려 퍼지기도 한다. 한꺼번에 빵 빵 하고 울려 퍼지면 틀림 없이 나머지 한방은 확인 사살용 탄알이었을 것이고, 시간차를 두고 울려 퍼지는 두번째 총성은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공포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의 비명소리나 몰려든 군중들의 웅성거림, 경찰차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 따위는 아쉽게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아마 누군가가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가 재수 없게 못을 밟았겠지, 어떤 한심한 작자가 아침이 이렇게 찬란한지 몰랐다며 자축하는 의미로 폭죽을 터트린 것에 불과하겠거니 생각하고 말지만, 매번 저렇게 상상하는 걸 보면 참으로 순진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든다. 이런 상상력이라면 미스테리 범죄소설을 시도 해 봐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4. 끊임 없이 나에 관해 보고해야하는 부모로부터, 끊임 없이 가쉽을 생산 해 내는 친구들로부터, 집단이라는 이유로 무엇인가를 마음대로 평가하고 단죄할 수 있는 조직으로부터, 나 스스로 만들어낸 적들로부터, 그것이 무엇이던간에, 그 무엇엔가로 부터 도망칠 수 있고, 숨을 수 있다면, 비로소 숨통이 트일 것 같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은 결국 끊임없이 아무도 존재 해서는 안된다는 관념을 갖게 하고, 그 관념은 계속해서 의식해야 하는 또다른 감시자를 만들어내 버린다.

+ 5. 아무도 나를 읽으려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나 자신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아무도 나를, 나의 텍스트를 읽지 않는다는 생각은 동시에 아무 것도 쓰지 않게 하기도, 아무 것도 어필하지 않게도 만든다. 고로, 아무것도 어필하지 않고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의식할 필요가 없게 되어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어쩌면 나는 무덤 속에서

이틀 만에 가까워 졌던 친구로 부터 꽁꽁 숨어 버리는 나 자신을 보니 알겠고, 몇달 동안 연락하지 않던 이들에게 다시 연락하고 만나는 나 자신을 보니 알겠고, 일년 남짓 혼자 나와 살다가 다시 집에 들어와 부모님 곁에서 살아보니 알겠고, 이년 넘게 닫아 두었던 홈페이지를 다시 만들려고 생각 해보니 알겠고, 삼년 동안 쉬지않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출근해보니 알겠고, 점점 아래로 아래로 땅굴을 파고 숨으려고만 하는 나 자신을 알 것 같다. 아직 그 곳에서 기어나올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절실한 기분에 생각 없이 그랬을지 몰라도 어느순간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그 곳에서 외롭다며 외쳤을지 몰라도 어느순간 누군가가 꺼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그런 나 자신을 두려워했을지 몰라도 어느순간 그것이 더 편하고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것들을 알게 되고나니 나 이외에 그 어떤 누군가를 그 아래로 끌고 내려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 것 같다. 그 누군가를 끌고 내려오는 일은 쉽지만, 그를 다시 위로 올려 보낼 자신은 없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 곳의 압력과 밀도를 견딜 수 있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에

그 입구가 열려있는지 닫혀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다시 기어 올라갈 방법을 마련 해 두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누군가가 들어 설 공간은 있기나 한 것인지 이미 그 안에 침입자가 있거나 동료가 있는건 아닌지 그런 것들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무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일기 속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를 외로움에서 구출 해 주기 위한 나의 모든 뉘앙스는 그에게는 일종의 무례함이었다.<그건 누구에게나 그래, 나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어> 라고 나는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를 더 불쾌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진정한 고아로서 인정 받고싶어했고, 더 끔찍한 우수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말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그건 너의 생각일 뿐이야, 너는 완전히 미쳤어> 라는 식의 경멸을 더 듣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혼자서만 완전하고 절대적인 경지에 머물러 있다는 그의 착각을 애써 돕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허영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공감이라는 것조차 거절하는 그를 경멸한다. 누군가의 외로움 앞에서 그가 외로움에 떨고 있고 구출되길 바라고 있다고만 섣불리 가정 해서는 안된다. 더 잔인하게, 고아로서 인정받고 싶어하고 유배지 에서의 더 끔찍한 우수를 상상해주길 기대하는 부류의 인간도 분명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모두들 나를 좋아해- 라는 가정 속에서 사는 것 보다는
모두들 나를 싫어해- 라는 가정 속에서 사는 것이 좀 더 속 편하다고나 할까.
이런식. 이런 테라피.

허용된 세계, 허가된 인간

의도의 진실성, 순수한 동기 그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아무 것도 없어- 내게. 불면이나 두통, 우울이나 슬픔 따위로 그 것을 측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간편할까? 검열을 앞두고 흔한 열정이나 광기를 준비하지 못해서 두려움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어렴풋 깨달았어 애초부터 진실이라던가 순수라는 것들에 확고한 결정이나 목표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언제나, 의미있고 위대한 소망들로부터 현실적이고 건강한 목표들에 까지- 내딛는 한 발자국 마다 그 아래로 끝 없는 심연을 감지하고 비틀거렸지. 단 번만이라도 내 딛는 다음 발걸음에 단단한 지반을 느낄 수 있다면- 지상으로 잡아 당기는 천진한 중력과 그로인한 피로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어. 왜 아직도 나는 허공 위로 팔을 내 젓고, 추락이 예고된 길로만 자꾸 다가가고 있을까- 뜨겁고 재빠르며, 순진한 동시에 난폭하기도 한 감성들로부터 아직, 모든 것이 허용 되는 동시에 모든 것이 부도덕한 그 세계로부터도 아직, 버려지지 않았나봐.

그 모든 것이 헛 소리이며 헛 수고 일지라도-
스스로 죽거나 죽지 않고, 죽이거나 죽이지 않고 도달 할 수 있을까.

움켜쥘 수 없는 것

존재감을 얻기 위해 끊임 없이 움직이는 그 천성. 그 것을 단 한번 만이라도 움켜 쥘 수 있다면, 힘껏 힘을 주어 나 에게서 떼어 내고, 눈이 녹아 얼어버린 저 차가운 도로 위에 내팽개쳐 버렸으면 좋겠다. 설령 그것이 내 심장이었다 하더라도.

진단과 처방

모두가 외롭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웃으니까 아무도 울지 못했다. 지하철엔 사람들이 읽다 만 신문이 있었고 지하철엔 신문이 읽다 만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화가는 '나는 내 작품이 너무 좋아요' 라고 말했다. 어느 사상가는 '나는 원래 나인 것을 먹는다' 라고 말했다. 한번은 웃었고 한번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연은 아름답다고 혼자 고백했을때 자연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자연에게도 아름다움에게도 나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길에 놓인 돌멩이를 발끝으로 찼을때 돌멩이는 왠일인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돌멩이에게 나는 그냥 또 다른 돌멩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지렁이가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고 있을때엔 얼마나 불안할까를 생각했다. 왼쪽으로 구부리고 오른쪽으로 구부리고 매 순간 모든 행동들이 지렁이에게서처럼 나에게도 실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렁이는 너무 위험해서 안전에 처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안전해서 위험에 처할 수가 없었다.

트레비스, 트레비스, 트레비스

웃거나 우는 일 보다.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하는 것이 더 어렵다. 어렵지만 그 것을 통해서 느껴지는 어떤 평정심, 어떤 자유로움,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을 느껴본 적 있다면 그것을 위한 노력이 결코 헛수고가 아님을 알게 된다. 침묵을 획득하기 위해 무엇인가로 부터 심각하게 낙심하거나, 상실감에 절망하거나, 애써 그 무엇인가를 초월할 필요는 없다. 낙심이든 절망이든, 초월이든 침묵 이전에 낙심한 표정을 짓기 위해, 절망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초월한 척 하기 위해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냥 입을 닫기 위한 노력과 얼굴 근육을 천박하게 수축, 이완하지 않기 위한 노력, 그것으로 족하다.
한가지 조심할 것은 침묵의 상태를 우울이나 절망 따위의 의미로 조작하려는 나와 나 이외의 세력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 침묵은 긴장감이나 경계심으로부터 비롯되어서는 안된다. 불가에서나 행해질법 한 금언수행 처럼 절대적인 강요 없이, 그저 불필요한 말과 불필요한 감정들을 덜어내면 된다.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면 된다.

가슴 한켠에 쌓여있는 감정들은 왜 항상 해소되어야 할 골칫덩이 이기만 해야할까? 입으로, 손으로 그 짖눌린 감정들을 왜 항상 어떻게든 쏟아내려고만 할까? 급하게 게워낸 그 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알고, 때로는 역겹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 감정들을 감당해내기 힘든 이유는 아마도, 그 감정들이 한번도 스스로 풀어보지 못한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일 것이고, 그 감정들을 정돈하고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엔 너무 약한 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비위가 약한 우리들은 답을 찾고, 정돈하고, 소화시키기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 것을 당장 누군가에게 달려가 게워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혹은 <그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라는 식의 그저 그런 공감을 얻어내면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파리, 텍사스의 트래비스가 <왜?> 냐는 질문 앞에서 입을 다문 이유는 내 생각엔 그렇다. 쉽게 누군가를 붙잡고 토해버리기엔 그 질문들이 너무나 그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그 질문들로부터 한순간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 없이 사막을 헤메는 그의 모습은 가까웠던 모두로 부터 끝 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4년전 그날로 부터, 그 스스로로 부터는 단 한순간도 도망친 적 없는 것이다. 난 트레비스가 된 적도 없고, 심지어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일 뿐이지만, 그가 상실감에 혹은 그저 과거를 잊어버리기 위해 그토록 걷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ego ist kraenklich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 만족해 하며 늘상 자기 자신은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혹은 혼자서도 뭐든 잘 헤쳐갈 것 처럼 무슨 일에나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대할 때에 느껴지는 감정은 미묘하다.

거절할 수 없는 질투심과 함께 그의 자신감과 성공 따위를 곁에서 공유할 수는 없을까 하는 비굴한 기생심리가 공존하는 경우.

감추어진 채 '넌 참 잘났구나' 라는 식의 빈정거림과 '넌 참 훌륭하구나' 라는 식의 입바른 소리가 공존하는 경우.

A와 B가 공존하다가, 어느 순간 그에 대해 냉담해지고 무관심해져야 겠다는 다짐 따위가 생겨나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이기주의자'는 배척 되어져야 할 부류로 취급되고, 그의 힘에 지배받는 입장에서 많은 동정어린 이야기들이 생겨나지만, 오히려 재미난 일은- "이기주의자" 혹은 "이기주의를 실천하겠다고 천명한 자" 그 자신의 감정이 좀 더 복합 미묘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위에서 이야기한 A, B, C의 경우를 따져 봤을 때 우리의 이기주의자가 생각하기에 A의 상황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B의 빈정거림 역시 입바른 소리- 만 골라서 믿어버리는 수고를 한다면 참을만 하다. 그렇지만- C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 속에서 무스타파 몬드가 야만인의 장황한 요구에 대해 한마디로 일축 했던 그 장면에서 처럼 "마음대로 하게" 라는 말로 이기주의자에게 내려질 수 있는 '무관심' 이라는 징계 조치는 A나 B의 경우 처럼 단순히 뻔뻔하게 넘겨버릴 수 없 는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기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에 순수하게 '모든이의 관심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은' 것 그 자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이외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에도, 도움받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보존하고자 하는 이유에도, 혹은 그 이외에 강한 자아를 갖고자 하는 그 어떤 다른 이기주의 노선에도 세상으로 부터의 무관심이라는 종신형을 받는 것에 대한 대책은 없다. (없다 라고 단정지을 자신은 없지만)

다른 어떤 나약한 감성들로부터 강해지고자- 다시한번 이기주의를 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김대현씨의 머리 속에는 오늘도 자꾸만 무스타파 몬드씨의 '마음대로 하게-' 라는 말이 맴돌고 있다.

The Unknown Social Animal

그는, 그 라는 종種은, 자타불문, 쾌 불쾌, 호 불호. 어느 편에 서 있든 신속하게 그리고 손쉽게 그 스스로의 입장을 합리화 할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난처한 이들을 위한 항우울제의 구실을 해 줄 수는 있으나, 불행하게도 자기 자신을 위한 처방전은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내부에 워낙 다양한 입장과 처지가 혼재하기 때문에 골치아파 하지만, 단순하고 명확한 고민을 가진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엔 오히려 편안해 지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 없이 각 각 다른 위치에서 다른 방향으로 떠나려 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그 스스로를 어딘가에 잡아 가둘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낙천주의자의 미소를 가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엔 허무주의자의 한숨을 짓고 있고, 또 어느 순간엔 비관주의자의 냉소를 가지는 사람이다. 어떤 것 이든 긍정할수도 또 한편으로는 쉽게 부정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스스로의 입장과 의견을 달리하게 되고 어떤 결론도 확고하게 남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 앞에서도 다짐을 한다거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그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정신병자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그를 치료하는 심리학자에 가까운것인가? 내일이면 죽을 사형수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성직자에 가까운 것인가? 구호를 외치는 선동자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그가 서있는 단상 아래의 수 많은 군중에 가까운 것인가? 그를 규정 해 주고, 정의 내림을 통해 구제 해 주기엔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라는 종의 개념이 너무 무디고 낡아 빠진 것은 아닌가? 이 시대의 인류학자들이 너무 게을러 빠진 것은 아닌가? 그것에 부합 하지 못하는 그를 위한 구제책은 없는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결정적 비쥐엠

10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일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런 것이다.
아니, 이런 것이어야 한다.

<안녕>
아무 것도 버릴 것 없다는 듯, 빈 목소리로 그가 나에게 인사한다.
그의 허전한 첫 마디는 많은 것들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염두해두지 않고서, 나는 그의 인사를 받는다.

<안녕->
어쩌면 조금은 가볍게- 하지만 지나치게 반가운 기색 없이
조금은 느리고 차분하게, 그렇게 말한다.

반가워-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와 만나지 못했던 시간보다 그와 함께 있었던 날들이 내게 더 생생하니까.
잘 있었어? 라고 물어보고도 싶기도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잘 있었던 만큼, 녀석도 잘 있었으니 서로를 찾지 않았겠지.
연락을 하기 싫었던걸까? 따위의 생각은 집어치워야 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일 없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정말 잘 지냈던거야?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지만,
그냥 슬며시 오른손 위에 턱을 기대고 가만 생각해본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 말은 대단한 무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않은 고민들을 애써 즉흥적으로 지어내게 만들면 안되니까.
보고싶었어- 라는 말은 거짓말 같지 않은 미소로 대신한다.
정말로 보고 싶었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만날 수 있었을테니까.
바빠서 어쩔수 없었다는 푸념를 하게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게 한 10분 쯤은,
서로에 대한 쓸데없는 의문과, 지나친 호기심이 가라 앉도록
그렇게 차분히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무말도 생각나지 않아서 조금은 곤란을 느낄 때 까지.
아- 그 순간을 우리가 참아낼수만 있다면!
우리가 잘 알던 음악이 어디에선가 흘러 나올것이다.
아마, 그 다음 10분 동안은, 큰 소리로 웃을 수 있겠지.
밤이 새는줄 모르고 떠들어댈 수 있겠지.

영원, 이라는 한마디 말, 아니 그 관념은-
우리를 언제고 위험에 빠뜨릴 준비가 되어있지만,
우리는 그 관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대범함이 없다.
항상, 그 한마디 말, 아니 그 관념 때문에 우리를 잃고만다.
사랑이라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관념만 남기고 사람은 잃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영원이라는 관념만 남고, 너를, 우리를 잃어버린다. 영원히.

우리는, 정말. 영원- 한 누군가를 위해.
10분 동안 말하지 않을 수 있는 무덤덤함을.
10분 동안 웃을 수 있는 숨겨둔 쾌활함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참. 그 전에,
우리는 우리를 미소짓게 만들수 있는
결정적 BGM을 가져야 하지.


조용한 Real

Fishmans의 Long season을 듣고 있다보면
식물 처럼 다른 방식으로 호흡하게 되는 기분이랄까
멈춰 서서 더이상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처음엔 무심코 듣다가 어느 순간 몬테키의 드럼 솔로가 시작되면
나중에 사토오 신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까지 약 10분 동안은
언제나 그 부분에 빠져든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다
라는 사토오 신지의 말은 참 멋있지만
노래에 지루함을 표류시키고 싶었다는 말은 거짓말 같다.

회사를 그만둔 덕분에 메신저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웃으면서 -정말 좋아요- 라고 이야기 하거나,
힘들게 -싫은데 어쩌죠- 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은데,

더블샷 아메리카노가 평소 보다 깊고 진해서-
오늘은 정말 맛있어! 라고 시시한 감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거나
듣고있던 long season을 13:27초 까지 휠을 디디리리릭- 돌려서
제발 눈 감고 한번 들어봐봐봐. 라고 강요하고 싶다거나할 때엔 좀
싫다.

돈을 좀 더 모으기 위해 회사를 나가야 할지도 모르니 딱히 좋다고 할 수도 없고, 커피도, 휘시만스도 애초에 혼잣말로 충분할테니 딱히 싫다고 할 수도 없다. 좋은 건 너무 좋아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니힐리스트가 되어버리고, 싫은 건 또 너무 싫어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옵티미스트가 되기도 하고.

그렇다, 너무 잘 컨트롤 하는 나머지 지루하다.
그래서, 휘시만스가 좋나보다. 조용한 real 이라던가.
그러면, 내일은 홍대앞 空中キャンプ.

끝으로 미안합니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다" 라는 말은 얼핏 보기엔 도덕적 '양심' 이라던가, '이타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 처럼 여겨진다. 흰색 소나타 뒷 유리에나 붙어있을 법한 '내탓이오' 라는 천주교의 슬로건 처럼 말이지.

하지만 여기 악크로스더유니버스에서 해석하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다'라는 말의 뉘앙스는 이러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건 들에도 마치 나 때문에 벌어진 일 처럼 여길수 있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이야기"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니냐고 묻는 이들을 위해 뉘앙스를 조금 더 예리하게 바꿔보자면 이렇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도 마치 나의 크나큰 <영향력> 때문에 일어난 것 처럼 여길 수 있는 우리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이야기" 여기까지도 뉘앙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없다면- 힝.

고로,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린다" 라고 하는 것은 양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일들에 자신의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고 모든 사건들이 자신이 영향을 끼침으로서 벌어진다고 믿는 <허영>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일반화 하기>나 <진부하게 하기>에 좀 더 소질이 있는 사람은 "우리는 원래 외부의 모든 것 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투영해 보고자 하는 습성이 있는 것 뿐이고 그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 라며 투덜 거릴지도 모르겠다. 쳇-

어쨌든 장황하게 그 은폐된 <허영>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 한 이유는, 우리가 종종 서로에게 '미안해-' 라는 쓰잘떼기 없는 고백을 나눌 때에 그 것이 그 <허영>이 정체를 드러내곤 한다는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다. 그 정체란, '미안해' 라는 고백을 누군가로부터 듣게 될 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쾌함의 정체이고 '미안해' 라고 누군가에게 고백할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또다른 미안함의 정체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결정으로 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너의 결정으로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고 가는 '책임'과 '사명'의 전가를 통해 끈적한 '정' 따위를 느끼고 싶어서, 혹은 어떻게든 '엮어짐'을 통해 외롭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미안하게 하고 미안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흠

그래서, 우리 악크로스더유니버스 에서는 '미안해' 라는 말 속에 숨겨진 저 '오만함' 과 '허영'을 지탄하는 바 이며, 경멸하기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랑해' 라는 말에 숨겨진 말초적이고 무책임한 '공격성'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 경계하고 경멸하기로 오늘 이 자리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시해서 고맙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새벽 두시에 독서실이 끝나면 늘 단짝 친구 둘과 같이 걸어 오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어느 날은 너무 고3스럽게도, 서로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넌 꿈이 뭐니?
나? 난. 소파 하나만 있으면 돼. 아주 편안하고 큼지막한 소파. 몸이 거의 파묻힐 정도로 편안한 것으로. 색깔은 좀 촌스러워도 되는데 모양은 좀 단순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책상은 한쪽 벽을 모두 덮을 만큼 넓어야 해. 한 두 달 쯤 정리를 안하고 책과 물건들이 쌓여도 넉넉할 정도로. 앗참 노란 빛이 나는 스탠드도 있었으면 좋겠고... 아아 절대 형광빛은 싫어. 그리고 나머지 벽은 모두 책장으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어. 천장 까지 닿는 그런 붙박이식 책장 말야. 색깔은 책상하고 같은 어두운 갈색으로. 돈? 돈은 한달 내내 사고싶은 책들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면 돼. 그리고 일주일에 영화 한 두편, 일주일에 하루밤 정도 친구들과 술마실 수 있을 정도의 용돈. 그 정도면 돼. 정말이야. 앗참 그래 월세 낼 돈도 있어야겠다. 그런데 나 남자치고 너무 야망 같은게 없는거 같지 않냐?

그 때에 난 분명 매일 미술학원에 나가서 석고상을 그리고 있었고, 일반 대학도 아닌 미술 대학을 가기 위해 그토록 고생하고 있었으면서도 왜 그런 엉뚱한 꿈을 이야기했을까? 단지 또다른 친구가 뉴욕처럼 대도시에 가서 일하는 게 꿈이라고 이야기 했었기 때문에 괜한 반발심에 일부러 소박한 꿈을 이야기 했던걸까? 그 건 아니다. 그 이전에도 공책에다 상상속 그 방의 전개도 따위를 그리곤 했었으니. 그렇다면 미술대학에 가는 건 가는 것이고, 꿈은 또 그 것과 별개라는 이야기인데, 그러고 보면 미술 학원에서 실컷 디자인을 전공해서 동양화과를 가게 된 것도, 동양화를 기껏 전공해 놓고 웹디자인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별 생각 없었다는 것이지.

넌 그런 시시한 꿈 가지고는 만족 못할 족속이야- 라고 생각했던걸까. 밤새 철 없는 애 처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자니, 앞으로 남은 생이 두렵기 까지 하다. 살아 온 습성대로, 뭔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적당한 수준으로, 원하지도 않는 일들을 계획하고, 적당히 정력을 쏟아 부으며 살게 되는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고민은 정말 닳고 닳아서 더이상 근처에도 가지 않고 싶었는데. 이제 모든게 정해졌다 싶을 때에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릴적 꿈이 너무 소박해서 눈물나게 고마울 지경이다.

말코비치 말코비치

너에 관한 나의 생각도 너의 나에 관한 생각도, 나의 나에 관한 생각도 과잉이이지만 또 인구가 과잉인 만큼, 이미지도 과잉이고, 멜로디도 리듬도 과잉이다. 과잉이기만 하면 모를까- 그 모든 과잉이 버퍼링 할 여유도 없는 리얼타임이라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마치, 내가 담아낼 수 있는 감도는 고작 100쯤 되는데- 자꾸만 어딘가로 떠밀려가고 있어서 무엇 하나 촛점도, 거리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겠는 그런 기분.

왠지 그런 지친 미스터김에게 눈치 없는 누군가는 도산공원 근처에 있는 '느리게 걷기' 라는 웰-빙 카페에 가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라는 책을 읽으며 강타의 '느리게 걷기' 라는 음악을 들어봐- 라고 권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내게 유용한 느림테라피 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만연된 트렌드로서의 가치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게 된다.

매년- 그 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관련 책자가 베스트셀러 코너를 잔뜩 차지하게 되는 것 처럼, 내게 소중하고 중요해 보였던 가치들도 그렇게 어느 날 마케터들이 물건을 팔아먹기 좋은 키워드로서, 컨셉으로서만 이용되어지다가 단물 다 빠진 껌처럼 금방 또 진부해져 버린다.

전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시대적가치나 갖가지 -이즘들로 부터 초월하고 싶은 욕심은 없다(있긴 해). 하지만 그런 과잉들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독특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말의 여지 조차도 뺏겨버리는 기분이 들 때엔 참 슬프다.

물론 사람마다 달라서(망할)- 어떤이는 '필사적으로 독특해지기' 로서만 존재감을 획득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일반화되기'에 진정한 의미로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나처럼 전자인 경우엔-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이, 내 생각과 우리 모두의 생각이 비스무리해서 그게 그거고, 거기서 거기 라는 식의 결론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이다. 마치 어딜가나 말코비치씨들이 말코비치 말코비치 라는 말만 하는 세상에 온 것처럼 괴상망측한 기분이 드는 그런.

이런 푸념을 털어놓는 지친 미스터김에게 또 어떤 눈치 없는 누군가는 이런 진부한 충고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린 그저 우리 자신인 것 뿐이야. 우린 각자 스스로가 자신만의 것을 찾아야 해!' 라고. 그렇다면 나는 굳이 우리의 무스타파몬드씨를 인용할 것도 없이 '그러렴-' 하고 대답할 것이고. 그 또한 먼 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러시던가-'

어쩌면 세심하고 터프한 누군가가 이렇게 타일러 주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독.특.해 진다는 것이 뭐가 얼마나 대단한 것 이길래 그러니? 또 진-부-해 진다는 것을 혐오해야 할 이유는 뭐니? 그저 너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그 '진부함' 이라는 단계로 끌어내리고 싶다는 치기어린 동기- 그거 아냐?

150% wacko

무엇에든 150% 과도하게 몰두 해 있는 wacko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지를 실험해보고 반영해 볼 수 있게 하는 뻔뻔함으로 무장된 자아와, 온갖 야유와 빈정거림 조차도 자양분으로 여기고 삼켜버릴 수 있는 둔감함, 그리고 자신이 하고있는 일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특별한지를 이리저리 재보며 따지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렇다고, <나는 무엇엔가에 과도한, 이상한 사람이 되고싶어요>라고 이야기 한다고 해서 진정 wacko가 될 수 있는건 아니다. 동시에 그들을 동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만의 특별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고, 이 세상에 없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기 위해 애쓰는 이(많고 많은 그저 그런 사람들) 들에겐 더더욱 그러한 괴짜들의 '짓'거리에서 매력과 흥미를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질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규적, 정상적, 정식의, 정기적 교육을 정도껏 정도대로 정정하게 받아온 이들에게 있어서 <누구 앞에서든 상관 없다는 식의 뻔뻔함>, <비난에 둔감할 수 있는 강심장>, <성공하고 출세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여유> 라는 것은 도저히 '습득'할 수 없는 '생득'적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점점 더 '동경'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부함, 이라는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대안으로 <과도함에 선이 있다>라는 플랜카드를 꺼내 들었는데 말만 다를 뿐, 결국 어릴적에 즐겨 듣던 짐 모리슨이나, 커트 코베인에게 품었던 난폭한 동경과 다르지 않아서, 전혜린을 읽거나,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의 사춘기적 동경과 다르지 않아서, 재미난 영화나 소설 속에 꼭 한명씩 등장하는 괴짜 캐릭터들을 아끼던 그 마음과 다르지 않아서, 민망. 했다는 이야기.

슬퍼할 이유를 찾다

희생이라던가 헌신이라는 가치는- 공교롭게도 그것이 그의 이기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지 애써 그 것에서 숭고함이나, 고결함이라는 가치를 쥐어짤 필요는 없다- 라고 그는 이야기 하고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진실성에 대한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아마도, 그가 그 스스로를 얼마나 그것에 희생하는가 또는 헌신하는가. 즉, 그가 얼마나 그것에 대해 이타적으로 보여졌는가 의 문제일 것이다.

진정성이나 진실성이라는 지고지순한 (동시에 지리멸렬한) 가치는 누가 더 진정한 마음을 가졌는냐- 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누가 더 감정적, 도덕적 우위에 서 있느냐를 따지게 될 때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사랑' 을 두고 서로의 진정성을 논하고, 경쟁하고, 평가하는 전인류적 이슈를 생각해 보았을때 (나를 포함하여) 그 이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척도인 '헌신' 혹은 '희생' 정신을 위의 이야기에서 결론지은 대로, 그저 어떤 개개인의 기호嗜好 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가정도 가능할 수 있겠다.

A 당신은- 평소에 희생을 즐기시나요?
B 네 전- 누군가에게 헌신 할 때가 가장 만족스럽더군요
A 아 어쩐지 전- 당신이 절 사랑하시는 줄 알았지 뭐에요?
B 하하 죄송해요 제가 너무 헌신을 즐기다 보니 그런 오해들을 많이 하곤 하죠.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내게 중요하다는 어필-을 하기 위해- 혹은 감정적 우위에 서기 위해 위에서 실컷 평가 절하한 '헌신' 이라던가 '희생'이라는 가치를 이용하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이 '이용' 되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이상, 더이상 어떤 순진함이라던가 순수함을 이야기 할 자격은 없다. 또 슬퍼할 자격도, 외로워할 이유도 없다.

스스로에게 슬퍼하거나 우울해 할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우울한 것 보다 더 아쉬운 일은 내게 있어서 pathos의 원천이 되었던 것 들이 하나 둘, 가치를 상실하고 무의미해져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pathos의 죽음이 또하나의 pathos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고르세요

무엇이든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말은 참 속편한 생각이야.
그건 꼭 정확히 아무 것도 책임지기 싫다는 이야기랑 같은 얘기거든.
가만보면 그 무엇이든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은. 그 무엇도 한가지로 결정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긴 해. 그 무엇도 정해진 것 없다, 세상을 규정하려 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면 마치 세상의 모든 각박한 것들 로부터 초월 해 있기라도 한것처럼 보이고- 멋있어 보인다나...그래서 일련의 나-를 관찰 해 보건데 어느날 문득 만난 니체 식의 허무주의가 촉매가 되어 위버멘쉬니 뭐니 하는 말에 홀려 풍덩- 하고 온몸을 투신하기게 된 것이지.왠지 좀 유별나보이지 않느냐? 라는 치기어린 정열에 불타 아무것도 결정 된 것 없는 그 영역으로 내 등을 슉- 떠밀어 버리고 의뭉스러운 두리와, 우유부단한 뭉실이가 만나서 두리뭉실 이라고 이름붙이면 딱 좋을 인격을 형성하게 된 사연인거야. 그런데 왠걸?이 세상엔 결정 할 것이 너무도 많고 일분- 일초 내에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고작 듣는 소리가. 아이쿠 욘석 일 빨리빨리 잘하는구나-
그래, 디자이너로 한번 뭔가 일취하고 월장해보자고 마음먹었으면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이윤이많이 남는- 쪽으로 머리를 잘잘 굴려서 결정도 잘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보자. 라고 결론을 내려버릴까 싶지만.당장 내 옆자리의 디자이너에게 '난 그래서 이 색깔이 좋아' 라고 말하면서도- '그래서' 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고 꾸며내는 것이 너무 억지스럽게 느껴지고, 오늘 당장 그녀에게- 그에게- 무엇이 더 좋다고, 무엇이 더 싫다고 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걸.어쩌겠어, 다 골랐니? 네가 고른게 그거니? 사실 난 3이든 4이든 상관 없이 니가 좋다면 나도 좋아. 좀 시원하게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구.

Nice day for a sulk

매번 언젠가 와본 듯한 낯익은 길목을 지나치고 있는 기분.
모든 것이 결국 꼭 같은 레파토리로 진행된다.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말은 결국 가정일 뿐이지.

불규칙한 어떤 것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쪽이
더 인간을 안심하게 만들지만.
반면 자기 자신의 삶이 일정한 궤도의 끊임없는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지같다.
니힐리즘에 투신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것 같다고
괜히- 생각해본다.지나온 궤적을 슬쩍 살펴보고 하나의 그럴듯한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악한 경우 그 패턴은 그때그때 그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분석되고 재조합되어 고안된다.

때로는 비극을 위해 슥슥 적당한 플롯을 마련하고
그럴듯한 슬픈 증거들을 끄집어내어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휴머니스트가, 때로는 로맨티스트가,
때로는 니힐리스트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으로,
그런 영악한 계책들이 모두 내 머릿속에서 짜내어 졌다고 믿기는 힘들다.
혹은 실지로 그렇다고 믿더라도 나 스스로에게 조차 모르는 척 되내인다.
What the hell is going on?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라고 외치던
전혜린씨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다.
'항상 변한다는 그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라는 금언은 누구의 것 이었더라?

진부하더라도 무슨말이든 적어봐야지 싶었으므로
무효.

Muddy

같은 상황을 두고-
어떨 때에는 고립되었다는 생각에
피난민 행색으로 동정을 구하기도하고
어떨 때에는 해방되었다는 생각에
대단한 정복자라도 된 냥 오만하게 굴기도 한다
같은 상황을 두고- 필요에 따라서 변신하는
약아빠진 자아

무료입니다.

목적이 단순하고 명료해질 수록- 감정적인 생각과, 강박적인 관념들 또한 단순해지고 무시되곤 하나보다. 날씨따위를 탓하며 감상에 빠진다거나, 부모님과의 다툼으로 하루종일 고민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귀찮게 여겨지는 그런 현상.

무엇이 옳다- 라는 건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그냥 그럴때- 라고만 느껴진다. 왜 이런 결론을 내리는지 조차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그런 계절인가보다.

조금은 다른 느낌의 무료함. 가만히 멈춰서서- 출발하기만을 기다릴 때 느껴지는 어떤 정적인 무료함이라기 보다는- 이미 달리고 있지만- 나의 궤도, 나의 속도와 같은 정도로 달리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상쾌한 기분을 동반한 무료함인 것이다.

몇몇편견들

누군가를 기꺼이 시간을 내 만나서 성심껏 이야기를 들어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그 누군가가 나를 평하는 것이 사뭇 달라진 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때,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얻어지는 허영심은 꽤나 싸구려 값어치이구나 라는 불편한 편견 하나.

어떤 그 무엇인가가 내게 얼마만큼 중요한가 혹은 내가 얼마나 그것을 열망하는가를 가늠해보고자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잃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 것과 결별했을 때 느껴지는 상실감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따위로 평가하고 싶어하지만, 그런 슬픈 감정 자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언젠가 한번 쯤 해보고 싶었던 배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관심이 없다더라. 라는 불미스러운 편견 하나.

격정은 어쩌면 그만큼 열정적이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강박의 표출이거나, 아직 값아야 할 감정적 부채가 남아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감정적, 감상적이지 않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으며 무심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는 오히려 지나친 감상보다 더 순수할 수 있다. 라는 불완전한 편견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