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우시다.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을 수행하던 강한 신념이
어떤 일을 계기로 무기력해졌다.
스스로의 어떤 가치- 앞에서 늘상 부끄럽기만 한 의욕들이
어떤 일을 계기로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일' 이라는 것은 없다.

신념이든 의욕이든 간에,
뭔가 무너져버렸다거나, 파괴되었다기 보다는
유실되어 잃어버렸다- 라는 이미지가 더 어울린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존재감이 없다는 느낌.
마치 배역과 대본을 잃어버려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배우가 된 것 처럼
낯설고 불쾌한 기분.

취향의 문제

"도망쳐버리고 싶다 라던가 숨어버리고 싶다 라는 의지-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도망치거나 숨는것을 용납하지 않는 자기 자신 뿐이다."

위의 생각은- 처음 떠올랐을 때 부터 흡족할 수 밖에 없다.
마치 태어날 때 부터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던 계급사회에서 처럼-
저 문장은- '역설' 이라는 혈통을 지닌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기타-스트링과 허스키보이스 라는 조건하에 기타소리는 되도록
궁상맞아야 하고 허스키 보이스는 적당히 건조한 맛이 있어야 한다
라는 식으로 음반을 콜렉팅한다거나
범우사르비아 문고판 세계문학전집을 읽는데, 책표지 컬러가 옐로우-
에서 다크블루- 가 되는 순서로 읽는다던가 하는 짓 처럼-
무의미한 것들을 의미있는 것 처럼 포장하는 프로세스의
또 다른 반복인지도 모른다.

머릿 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이든, 혹은 어디선가 주어들은 어떤 문장이든
그 관념자체가 얼마나 매력적이냐에 따라 취사선택 되어질 수 있으며,
그렇게 콜렉팅 된 관념의 라이브러리가 나의 행동을 지배하거나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면,

일반적으로 믿고 있듯 성격이라는 것이 마치 선천적인 유전인자 탓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하는 일들이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성격조차 스스로의 취향에 따라 선택되어진 것 일지도 모르므로.
(그렇다면 취향은 어디에서 오는가- 따위의 문제가 남는 건가-)

"그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야!"

라고 누군가 금방이라도 외칠 것만 같다-

제목없음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 조차 씌여져야 한다고 느낀다구
마땅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지만 잘 살고 있는 것 처럼
나.여기.있어 라고 하면 너.거기.있구나 라고 이야기해
딱 그 만큼의 존재감이 내게 필요한 전부인지도 몰라

욘석쯔쯔읏

가끔은 내 감수성을 비웃게 된다.

젊은날의 나, 혹은 얼마전 까지의 나, 혹은 지금의 나. 는. 적어도 삶에 운명론-같은 것을 대입시켜 본 적이 없다.(없었다) 나- 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계- 같은 걸 그어 보고자 연필을 집어 본 적도 없다. 비굴하게 굽신 거리며 누군가의 비위를 맞춘다거나, 착한 머리 모양을 하고- '무슨일이든 다 맡겨주세요 대현이가 있잖아요!' 하고 쌩긋 웃고 있다 해도, 한편으로는 아키라-에 등장하는 아키라군이 지을법한 미소를 머금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시상식에서 외친 것처럼 I'm the king of the world!! 하고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뭔가 항상 믿는 구석이 어딘가에 있는 것 처럼- 의미가 심장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키라군은- 과학자들의 잘못된 신념으로 제 몸을 끝없이 생산 하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터미네이터 T1000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용광로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 것 같다.

예를들면 그런 셈이다. 오래전에 본 영화를 또 다시 보면서도 똑같은 장면에서 마치 처음 본 것인양 눈물을 글썽이거나- 키득 거리며 웃고있는 그런 모습- 그런 그의 위선-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는- 그가 그 영화를 이미 두 번, 세 번 아니 뭔가 자신의 삶에 집착하기 시작한 그 어느 순간 부터 몇년동안 매일- 보아왔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지만, 무엇 보다도 그 스스로가 너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를, 우리를, 나를 비웃게 만드는 그런 것.

바로 얼마 전에 뭔가 삶의 비밀을 발견해 낸 것처럼 가슴을 치며- 앞날을 다짐하고, 바로 내일부터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거라는 듯 반짝거리는 눈빛이 되었다가도- 금방 또 며칠 후에 같은 오류에 같은 후회를 하면서도, 마치 그것에서 어떤 징조 나 전조를 발견해 낸 것 처럼, 그것이 삶의 중요고 새로운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런 나 자신을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살짝 미소를 머금고- 뒷통수를 쓰다듬고 싶어진다. 적절한 멘트는 짧게 네 절

욘.석.쯪.쯪.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쩌면 평생 나는-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망할! 세상은 너무 지루하잖아!!' 중얼중얼 되뇌거나, 느즈막히 12시쯤 눈을뜨며 '난 역시 조직사회엔 어울리지 않아- ' 라며 한탄한다거나, 왈할라 크림치즈 스파게티와 포엑스를 끝까지 비운 채 뱃살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에게 운동이 왜 타당한지 따위를 설득하고 있다거나- 하는 끔찍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되어있던 지극히 일상적이고, 진부한 고민들이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그런 진부한 고민들에 대한 고민 자체를 진부하게 여기며 바이건스- 바이건스- 바이건스- 하며 익숙해 지기 시작했고, 그런 진부한 고민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 위로, 감수성에 조차 '너도 별수 있겠어?' 비웃음을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뭐 그런게 다 있담.

Wie geht?

행복해- 라고 믿고 있더라도 '행복해-' 라고 말하는 것에 인색한 만큼.
아주 아주 아주 가끔은 '힘들어-' 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진다. 서글프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럴 때 일수록,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라고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오래전 일이지만 911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밤새도록 하염없이 지켜보던 것이 생각난다. 단 몇 시간 동안 몇 천명의 삶이 부서지는 것과는 무관하게 하염없이 땅끝으로 붕괴되는 그 모습이 얼마나 황홀했었던가- 라고 그 누가 고백한 적 있던가? 그 곳에서 희생된 이천여명의 죄 없는 이들과, 죄 없는 그들의 가족들 모두에게 비밀로 할 수 있다면 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의 먼지구름 사이로 건물의 파편들이 끝없이 바스라지며 햇빛에 반짝이고, 철골 구조물이 서로서로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며 서서히 무너져내리던 그 모습이 얼마나 황홀했는지를. 원래 누군가가 먼저 고백하고 나면- 그 다음 사람이 긍정하기는 한결 수월한 것이다.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붕괴의 미학. 조금 억지스럽지만, 관조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붕괴도 아름다울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다- 어느 순간 힘없이 삶을 놓아버리고 관조하게 될까봐.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 새벽에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이런 가설을 세우고 불안해 하는 일이 조금 우스운 일이지만. 아주 아주 가끔 '힘들어-' 라고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 하고 싶을 때면 참 두렵다. 나라는 녀석은 삶이 외롭다거나 힘들다 해서 쉽사리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투정을 부리지 않을 인간이고, 게다가 스스로에게조차 동정 받거나 위로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파이트클럽의 에드워드 노튼 처럼- 그의 가장 소중한 모든 것들을 TNT로 날려버리고 나서 거리를 헤멘다거나- 리빙 라스베거스의 니콜라스 케이지 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고하고 남은 생을 알코홀릭으로 보낸다거나- 폴 오스터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소진해 버린다거나- 앨리엇 스미스 처럼 거의 다 레코딩된 앨범발매를 앞두고 자기 가슴팍을 칼로 두번 찌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글쎄 한 서른 넘어서도 삶이 이딴식으로 지루하다면 모를까.

Es geht-

das Allgemeine und das Besondere

내 자신이 진부하다고 여겨질때, 그 것이 고민스럽게 느껴지던 오래전 어느날- 자책을 거듭하다가 다다른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살짝 포장해서 한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내 삶을 좀 더 치열하게 끌어안지 못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진부하다. 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나 스스로가 진부해진 이유를 외부가 아닌 내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 점에 대해서는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포장을 살짝 풀어 보자면, 내가 내 삶 속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페이소스들에 좀더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관찰할 수 있다면- (혹은 그럴 여유가 있다면) 누군가와 그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감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진부하게 여겨진 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같은 펑션으로서 작용하진 않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진부함이란, 재미의 요소로서 다양한 사건, 사고의 부재를 의미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진부함이란, 그 어떤 기쁨과 희열의 부재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진부함이라는 것은 그 어떤 슬픈 감정들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특별히 고민할 것 없는 나날들엔 진부함 이라는 복병이 슬며시 나 여기있소 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이러니- (라는 단어는 '우울함'이라는 단어와 견줄 수 있을만큼 오래되고 진부해진 단어이지만-) 아이러니 한 것은, 젊은날 젊은 사람들이 만나서 자조적인 말투로 종종 털어놓곤 하는 그런 푸념 -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도데체,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다' 라는 말은 어쩌면 새빨간 (혹은 새하얀) 거짓말일 지도 모른 다는 것. 그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야 하는 이유' 가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내 삶이 내게있어서 진부해져 버리는 것을 못견뎌 하고, 은연중에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억지인)것이다.

글쎄 좀 억지스러운가?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분명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도 너무 분명해진다. 해야할 일이 분명해지면 삶은 너무 단순해진다. 마치 고3 수험생처럼- 정해진 목표에 이를 때 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누가 어떤 연애사건에 휘말렸건 말건 너무나 클리어하게 그 것에 다다르는 것에만 메달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고3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확고한 목표 따위를 누가 정해주진 않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어느정도 그 기간을 연장하거나 앞당길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기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당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나의 게으른 인생을 적당히 둘러대도 되고, 어쩌면 그 흐릿한 목표들을 평생 유보시켜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는 지경인 것이다. (글쎄 뭐 글을 쓰는 와중에도 여기저기 반박의 여지가 너무 많아서 좀 의기소침 해지긴 했지만, 그.. 그래도 )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분명한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은 꽤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기피할수 밖에 없는 그런 아이러니... (아 뭔가 멋있는 결론을 기대했지만, 대략 실패다 휘릭-)

잘은 몰라도 인류의 삼십삼퍼센트 정도는 특별히 원하는 것도 그닥 정해진 목표도 없지만 무감각하고 다소 게으르게 재미난 사건들과 더불어 잘 살아갈 것이고, 나머지 삼십삼퍼센트 정도는 확고하게 정해진 목표와 정해진 일정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적당히 성공을 좇으며 그에 따르는 것들에 만족하며 잘 살아갈 것이고, 나머지 삼십삼퍼센트 정도는 '똑같은 일상은 싫어-'라고 불평하면서도 금방 잊고 적당히, 그저 적당히 잘 살아갈 것이다. 구십구퍼센트는 얼레벌레 해결 된건가? 휴;

마지막, 나머지 일퍼센트 정도는- 진부해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페이소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폐인처럼 스스로 고통속을 허우적거리며 인류 예술사의 한획을 긋고 있거나, 전인류를 고통속에서 구제하기 위해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내가 마지막 일퍼센트랍시고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_-;

우우

우울이라는 단어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 부터더라- 무슨 캔디 만화에서처럼 행복한 생각과 기분만 갖자라는 식의 다짐에서 출발한 결심은 아니다.단지, 우울 이라는 감정이 괜히 나에게 있어서만 어느 순간 부터 싸구려 감상으로 전락해 버렸으니까. 그게 언제 인지가 갑자기 궁굼졌다. 별다를 것 없이 비오는 어떤 하루였을 뿐이고, 누군가가 어떤 필연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 난 오늘 우울했으니까.

왼손에 들고 있는 자판기 커피 탓인지. 아니면-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있던 던-힐 탓인지. 혹은, 타들어 가는 연초 끝에 스민 작은 빗방울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지. 하나씩 둘러 보아도 단서를 잘 알 수 없다. 글쎄- 음 확실한 증거 없이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일은 좀 우습지만. 마지막으로 내뿜은 담배 연기가 비가 내리는 풍경 속으로 떠나가며 느껴지는 어렴풋한 어떤 향기와, 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 입안에서 맴도는 어떤 단맛과, 짧게 깎은 머리카락 위로 스치는 바람에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 따위가 일순간 과거의 어떤 날의 감정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 언젠간 친한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소름끼치도록 분명한 목소리로 내 삶의 이니셔티브는 '우울' 인 것 같다고 꽤나 자랑스럽게 말했던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적당한 단어를 정의할 수 있으면 모를까 그 전까진 우울하다라는 투정을 부리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다만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를 듣고 있을때는 좀 예외로 해도 무관할 것 같다.

점멸등 點滅燈

좌회전 신호대기중, 앞서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콘코오드 승용차가 보인다. 깜-빡 깜-빡 깜-빡 방향지시등은 아직 녹슨 기색없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내 오랜 메트로오 계기판에서도 귀엽게 따-깍 따-깍 거리며 이비트의 기계음이 들린다. 문득 앞차가 깜-빡 깜-빡 깜-빡 열한번쯤 깜빡이는 동안 나의 메트로오는 고작 아홉번쯤 따-깍 따-깍 따-깍 거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

처음에는 도저히 서로 같은 유격으로 깜빡거리기는 어려울 듯 느껴지다가도 슬며시 라디오헤드의 신보에서나 들을수 있는 불협한 엇박의 리듬을 만들고, 가만히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순간부터는 그 콘코오드와 나의 메트로오는 마치 오랫만에 만난 노년의 재즈 아티스트들 처럼 느리게 느리게 서로의 비트-를 맞추어 나간다. 애초에 서로 다르게 설계된 그들 일지라도 그 순간 만큼은 완전하게 교감하듯 그렇게 멋진 잼을 이룬다. 신호가 바뀌고 콘코오드가 먼저 떠난 그 텅빈 도로에서 나와 나의 메트로오는 잠시 황홀했던 그 잼콘서트를 잊을수 없어 악셀레이터를 밟는 것도 잊은 채 그자리에 서있다.

내가 열두번 슬퍼할때 네가 열세번 슬퍼하도록 고안되었다면, 우리 둘 사이의 각자 다 른 유격이 스치듯 교통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짧은 것일까. 금방 비틀어지다가도 조금만 기다리면 언젠가는 다시 같은 속도와 깊이의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좌회전 신호대기 시간 만큼의 짧은 여유만 가지고 있더라도 조금 더 쉽게 다시 만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누구가 너와 나를 같은 교차로에서 멈추고 출발하게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Moral boundary

특별히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조금만 둘러보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마치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세상 속에 나만 부당하게 던져진 존재인 것 처럼 외로워하고 몸을 사리는 것은 조금 우습다. (고도 볼 수 있겠다) 예를들어 길을 걷다가, 대형 음반 판매장 쇼윈도우에 걸려있는 커다란 스피커에서 Kings of Convenience 의 신곡이 아무렇지않게 흘러나온다거나 하면, 마치 그 음악은 나만이 소유하고 있던 것인데 이따위로 공개되어버려서 정말 실망이라는 듯, 그닥 흥겨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 순간부터 좋아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결심을 해버리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문장이 좀 길어서 예를 든 효과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시말하자면, 고독한 자아(혹은 고상한) 로 남고자 하는 그 유혹이 너무 강한 나머지, 돈키호테처럼 아무데에서나 내 왕국의 깃발을 꽂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종의 사사로운 영토싸움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나 자신의 오류와 무상한 허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대를 걸고 응원하는 산초 빤사 조차도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망상과 허영은 쉽게 치유된다거나 건전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보통 그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그의 주변에 벽을 쌓고 그 스스로를 가두었다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차지만. 사실은 모르는 일이다. 위대한 유산의 노라 딘스무어처럼 그에게 위로받고 위로해줄 수 있는 에스텔라가 있을 수도 있고, 웨더링 하이츠의 히스클리프 처럼 마음껏 가학할 수 있는 헤어튼 언쇼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 그가 그 안에서 괴로워 하는지, 즐거워 하는지, 혹시 숨겨둔 위안자가 있는지 또 언제쯤 그 스스로 택한 유배생활을 끝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자신 이외에는

수고스러운 명령

너는 내일 까지 우주로 부터 훔쳐낸 파편을 숨기고 유배 된 기만을 구출하여 준비 된 유목을 떠나 거절 못하는 코끼리 사냥에 입술을 깨물며 되도록 지나치게 탄식하고 풍요로운 오후를 배신하여 실증난 그림자의 휴식을 위해 젖은 땅을 헤집고서 아직 식지 않은 우주의 파편을 묻고서 우리와 유니온 해라.

keep100%pure

절대적이고 완전해야 <만> 한다. 그렇지 않을 바엔 지금 까지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더라도 포기하는 편이 낫다. 라는 심보가 있다. mmmg가 조금 얄밉다. 꼭 맞는 슬로건을 선점해버렸으니-

어쨌든 그 심보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은 점 점 더 커져만 간다. 그 훼방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우습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나 자신 뿐. 뻔뻔하게도 나 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양 시치미를 떼고 있는 나를 마주치게 되거나 하면 정말 짜증스럽다.

70%이든 100%이든 처음엔 적당히 스스로를 따돌리면 되테고, 발각된다 해도 워낙 뛰어난 기지와 말주변으로 타당한 정당성을 찾아주고 위로 해주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욘석이 이제는 그런 입바른 소리는 지겹다는 이야기다.

그날 우리 대화에서 처럼 어떤 <룰을 만들어 간다> 와 같은 맥락으로, 일반적인 어떤 도덕률과는 상이할 수도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한 상벌규정 을 집적 하는 일에만 점점 더 집중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 룰의 전면적 개편이 얼마 진행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용인되고 칭찬할 만한 일이, 친구에겐 배신으로, 부모님에겐 불효로, 집단 속에서는 왕따로, 취급되버리는 경우가 생겨나곤 하는 일이 놀랍거나, 수치스럽거나, 불행하게 느껴진다거나 하지 않다는 것은. 내가 만들고 있는 이 룰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있다는 것일까?

정말 좀 더이상의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다.

인생이란게 그런거 아니겠어?

벌써 조금 익숙해진 그런 망설임. 그저 외롭다고 느끼고는 징하게 투정을 부려야 하는것인지 아니면 애써 확보한 홀로된 시간 이라 여기고 즐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씀. 사실 어쩌면 망설일 여지랄 것도 없이 심심하다 라는게 중론 이지만, 그래도 괜히 뭔가 선택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한다면 좋겠고 지금 현재의 상황이 모두 내가 원하고 내가 선택해서 라고 생각하고 싶다.

혼자 지내다가 아얘 정말 잊혀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목적은 혼잣말이었기 때문에 잘듣지 못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넌 그럴 사람이 못 되 쯪쯪-' 라고 결론 내려버린다. 그러면 또다시 뾰루퉁 한 표정으로 뭔가를 변명하고 싶어지지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스스로 비판하고 스스로 변명하고 있는 그 자체가 '쯪쯪 넌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야 욘석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그만 입을 다물고 슬쩍 웃어보인다.

사실 어떤것이든 선택할 필요조차 없는지 모른다. 선택을 해야하고 그 선택에 대해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건 언제나 타자를 의식한 상황속이고 타자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그저. 그... 그 그 그저 그 뿐이다. 그래 그.. 그 그 그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지만. 타자를 의식하지 않는 때에도 자기 자신을 말하자면 타자 인 것처럼 두고 따져보기도 하지 '야 김대현 얘 이래도 되는거니? 왜저래?' '몰라 냅둬'

쿠키를 뚝뚝 끊어물고서는 손도 대지 않고 우우- 거리는 입모양으로 깨물고 있다보면 어금니 뒷편에 버터 향이라고 해야할지 버터 맛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는 그 어떤 따뜻함이 가득 고이고는 광대뼈 아래쪽 깊숙한 곳에서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을 수 없다. 셔플 플레이 인 주제에 그럭저럭 좋은 곡을 들려주고 있는 아이튠즈를 기특해 하며 '야 야 그것도 좋지만 이것도 한번 들어봐' 하고 괜히 참견했다가 흐름을 끊어버렸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좋다고 적극 추천해주고 난리법썩을 떨었으면서도 생각보다 너무 착한 음색과 발랄한 멜로디를 들려줘서 사실 잘 안듣게 된다. 어디서 읽으면서 공감하기도 했지만 착하기만 한건 역시나 지나치게 매력없다 라고 다시 공감해본다. 인생이란게 그런거 아니겠어? 가끔이렇게 싱거운 일로 인생 들먹이는건 의외로 참 유쾌하다. 애석하게도- 후후.

레파토리.

계약으로 맺어진 어떤 사회 집단과의 관계에 있어서

충성도 결여.
의무감 결핍.
책임감 부족.

나는 집단과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하면서 이 곳에서 어떻게든 떠나야 겠다 라고 마음을 먹게 되거나. 또는 세상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있는데- 난 뭐람. 나 또한 집단속에 잘 융합 되도록 바꾸어야 겠구나 싶기도 하고. 그게 과연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지-. 감-이 잘 오지도 않고. 물론 세상사 일반론에 대한 무조건적 치기어린 반발심의 작용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철들어라- 라고 한소리 들어야 할 대목. 그렇지만 평범하게 사는게 어렵다고 해서 꼭 경외감을 가진채 숙명이랍시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은 아닌 것 같고.

어쩌자는건지 도무지...
써놓고 보니 저런 이야기는 수도없이 해왔던 것 같은데- 흠.
앞뒤가 안맞나- 결론을 내리기 싫어서 유보하고 있는건가.
누구든 좀 같이 얘기해보아야겠다.


모종의 협약.

사람들을 만나면 한두번씩 서로 묻고 대답하곤 하는 그런 어떤 분명하고 커다란 목적이 있고 사람들 에게도 나 자신 에게도 특별히 이야기 하지 않는 흐릿하고 작은 목적이 있다. 하나의 목적에는 마땅한 이유와 현실적인 감각과 이성적인 논리가 필요하며 다른 하나의 목적은 은폐된 몽상과 그때 그때 변하는 부유하는 감상의 총체이다.

아폴론적인, 디오니소스적인- 하며 그리이스 신들을 여기에까지 굳이 데려오지 않더라도, 오늘 같은 날 문득- 아침에 눈을떠 창문을 열어 보고 나서 비가 오는 소리를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 둘 사이에 맺어진 모종의 협약같은 것을 어렴 풋이 알 수 있게 된다.

확고한 듯 이야기 되어지는 현실계의 이성적인 목적들이 사실은 어떤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사소한 어떤 감상적인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고 올바른 이성적인 어떤 계획들이, 어떤 감추어진 불순해 보이는 목적의 수단이었을 뿐이라는 그 깨달음 때문에 배신감이라던지 굴욕감 따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런 날엔 살짝 비를 맞게 된다고 해도 괜찮아- 라고 이야기 하듯
나 자신에게- 진정 무엇이든 괜찮아- 라고 이야기 한다.
어쩌면 그저 무엇이든 위로하고 싶은 심사.

응? 음...

나 자신을 변호하는데에 익숙하고, 그런 치밀한 정당화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런 모든 위로의 프로세스가 나 자신을 위해 일종의 치료로서 정당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는것. 그것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의 내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적당한 논리로 정당화 하고, 하나 둘 그것이 내 정체이다 라고 정의내리는 일련의 과정들이 홀로된 나를 위해 좀 더 강해지는 길이라 여기고 안심하곤 하지만. 왜. 왜. 왜. 강해진다고 느끼는 동시에 점점 나약해 진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걸까?

음- 약점과 나약함을 개선하기 보다는 그것을 더 단단한 것처럼 가공하고 포장하는 데에 더 노력하고 있기 때문인거구나.. 어쿠 진부한 결론이 되어버렸다.

부자상봉 -추락하듯 포옹하기

대기는 만족할수 있을만큼 차가왔고 약간의 오한 조차도 어지러울 정도의 황홀함으로 느껴졌다. 날개는 튼튼했고 내가 긋는 궤적은 우아하기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엔 날개짓을 멈추고도 몇분씩 고도를 유지하며 날 수도 있었는데- 그 순간 만큼은 진정 '인간 개체는 독립적이어야 하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유기된 채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라는 생각이 정말 맞는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끔찍한 추락은 꼭 그 순간에만 일어난다. 늘 그런 황홀한 순간에 끔찍히 현실적인 중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형편없는 몰골로 늙고 연약한 지축 어딘가 를 향해 정면으로 꼴아 박곤 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이 부자연스러운 상봉이 매일 그렇게 반복된다.

나는,
착한 아들로서의 의무와 이미지를 끊임없이 배반하고 살해하고 도망치도록 고안되었는데 왜 자꾸만 끔찍히도 지긋지긋한 이 지상위에, 아버지라는 이름의 후덥지근한 현실 위에, 어머니 라는 이름의 끈적끈적한 모성 위에, 떨어져 붙잡히고 날개마저 빼앗긴 채 일방적으로 베풀어 졌다는 그 은혜라는 이름의 돌무더기를 어께 위에 잔뜩 쌓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렇게 방목하였느냐고, 왜 그렇게 끌어안느냐고, 이 모든 모순의 총체를 무엇하러 고안했느냐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발설 할 수 없는 것 조차-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다.

현상상념

이런 기분 느껴본 적 있어?
어느 날, 어느 순간, 아주 오래 전에 낯익은 어떤 노트에 모스 부호를 두드리듯 무심코 떨어뜨린 상념들이 문득 생각이 난 거야.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메모를 찾고 싶어서 방 여기저기 흩어지고 쌓여있고 끼워져 있는 비슷하게 닳아있는 비슷한 색의 노트들을 뒤적여 보지만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때 느끼는 그런 그리움 말야-. 어쩌면 이 일련의 행동의 단초는 그 메모 속에 있다기 보다는 메모를 찾아 책상 한 켠에 노트를 두두둑 쌓아두고 한 권씩 정신 없이 넘겨보는 그 행위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좀 더 솔직해 져보면 이런 행위는, 어떤 삶의 중요한 단서는 지금 내 옆에 쉽게 찾을 수 있는 공책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다고 여기는 병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 보기도 해. '결단코없어' 라는 병 말이지. 꽤 오래된 병인데. 증상은 이런 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또 다른 노트 한 켠에 적어 두어야겠다.

휴-머니티.

스스로를 슬프게하고
스스로를 기쁘게하고
스스로를 추방하고.
스스로를 구원하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 앉아 있는 검은의자를 의심할 수 있는 정도의 단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외부와 관련 없이, 나 스스로의 감정과 행동들을 <제어> 할 수 있다면.

매일 매순간 변하는 날씨처럼, 변해가는 것들에 쓸려다니지 않을수 있기에
<강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혹은 처한 환경의 변화들 속에서, 일말의 감수성이든, 감정이든
이른바 '울컥-' 하는 그런 것들이 없는, 철저히 제어된 감정과, 통제된 행동으로
점철된 삶이 과연 행복할까 하는 의미로 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나는-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는걸...

명석하지 못해서인지, 뭔가 빠뜨리고 있거나, 뭐가 뭔지 구분을 잘 모르겠다.

위의 생각들의 논조는 꼭 '아무리 그래도 인간적이지 못한건 너무하잖아?'
라는 듯 한데 그렇다면. 인간성 이라는건, 지켜내야 할 대상인건가. 아니면.
획득해야할 어떤 것인가. 헉. 무슨. 성선설 선악설 이야기라도 하겠다는건가 ;;;

Save Our Ships, Save Our Soul

속고 속이는 일이 공공연한 일이라고 누군가 처음 일깨워줄때
혹은 스스로 눈치챘을때- 태어나서 처음은 아닐지 몰라도 세번째
혹은 네번째 허탈함 정도는 되는것 같애-

나 스스로 이미지를 자꾸 만들고 있는것 같아서 홈페이지를 한번
닫았었는데- 결국 생각해보면 말야-

이미지를 만들고 거짓을 꾸며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죄책감
자체에 오류가 있더라고? 뭔가 사람들이 그 거짓말에 잘 속아 주어야
죄책감이든 느끼기나 할텐데 사실 내가 만든 이미지대로 내가
의도한 이미지 그대로를 사람들이 가져가는 것도 아니더라구.

다. 대상속에서 자기가 보고자 하는것만 보게 되는것이고-
자기가 규정한 한마디 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정의 자체를
맹신해버리기 일색이고- '이해'라는것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는지를
알고나면-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될일인 것 같애.

나도 널 오해하고 있고 너도 날 오해하고 있는 오해가 넘쳐나는
세상이라면.(이렇게 온라인을 통한 소통에 있어서 말이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를 누군가가
정말 진지하고 투명하게 바라봐주길 바라는것 자체가 욕심인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 욕심을 버리면- 아예 허탈함 그 자체를 인정하게 되고
슬픔 자체를 이해할수 있을지도 몰라 :)

너의 sos의 의미가 어떤건지 이제야 발견했어-

네가 찾는 진짜 '나'라는건 어쩌면 혼자서 찾을수 없는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 요새는, '나'라는걸 규정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비교할만한 대상이 필요할테니까. 뭔가 정교하게
나의 모태를 비추어 볼수 있는 각별한 친구가 필요할른지도 몰라.

조금은 살짝 피식 웃음이 나오는 생각이지만-
어제는 우주미아 운운하면서 홀로됨만이 당연지사 인것처럼
이야기 했는데 '나'를 찾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떤 '너'가 필요하다는
그런것이...

가끔 내 생각들은 너무 '모순'을 지향하는것 같애 어쩔때 보면 -_-
멋있어 보이기라도 한다는건가..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