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해지려고 내가 더럽다고 말하면, 더러운 모두가 내게 더럽다고 고백할 것이다. 더러는 자기가 더 더럽다고 주장할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욱 더 더러워져야 할지도 모른다. 너무 더러워지려고 해서 가짜의 더러움으로 더럽혀 나보다 더 더럽다고 말하는 그들보다 더 더럽게 보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더러움은 진짜의 더러움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것은 진짜 더러운 것이다. 더러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보여줄 수 있는 더러움만이 진짜 더러움일 것이다. 진짜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보여주고 나면 나는 깨끗해질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모든 것보다 더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깨끗하려하는 그 마음조차 더럽기 때문에 깨끗해지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더럽다고 깨끗이 말하면 깨끗할수 있으나, 내가 더럽다고 깨끗해지려고 하면 더러워지는 것이다.
나는 고독을 얻기 위해 문을 닫고 숨었다. 드디어 고독을 얻었다고 소근거리자 그 소리를 내가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다시 문을 열고 반대편으로 가 숨었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니 내가 고독을 얻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나는 문에다 대고 고독을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고독을 얻었다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믿지 않았다. 나는 고독을 보여주기 위해 방을 새로 만들어 나를 떠밀고는 고독에 대해 말하면 고독할 수 없으니 고독 속에 조용히 홀로 있으라- 말하고는 나를 가두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 안에 고독과 함께 내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고독한 나는 내가 가두었으므로 나는 내가 고독을 얻었다는 것을 나는 믿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내가 고독하게 나를 가두었다는 것을 믿었다. 나는 고독 속에 갇혀있는 나를 꺼내 그것을 믿게 하고 싶었지만, 고독 속에 있는 나는 약속대로 홀로 조용히 고독과 함께 고독하게 있었다.
주어 버려
사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줍던 손을 멈추고 행간으로 숨는다
말하는 그대로가 다 이루어지다니, 이러다 자칫 성공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권태마저 흥미로운 것이었는지 금방 씻은 손을 씻다 또
씻고 상처가 다 나으면 자비로움에 감사하며 말해야지 오 주어도
모른다고 욕망이 다 바닥날때가 있는지 보일라를 켜고 정신을
건조하게 어머니의 투정과 친구의 허영에 대답하지 말아야지 또 주어
아무렇지 않다 하다가 아무렇지 않다 쓰다가 대담하게도
처음부터 다시 말 하는 것을 다시 다 배워볼까 결심해야지
늙은 나무가 되는 것이나 밑둥을 움켜쥐는 것이
다 다 아무렇지 않으니 나에게 양해를 구해야지
버젓이 사는 것에 대해 일일이 고백하고
말해야지 주어 주어버려
140자 념념념念念念
남부럽지않은, 교양있는, 안정적인, 쿨- 한, 있어보이는 삶을. 마치 원래 가지고 있었던것마냥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런것들을 추구하면 할수록- 어째 점점 불행해지는 느낌이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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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격의, 일생일대의 무언가를 만들려고만 하지않는다면 작업들이 한결 좋아질 것. 무엇과도 승부를 볼 필요는 없다ㅡ. 고 한번 또 마음을 먹어본다. 중얼중얼 깊어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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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로의 얽메임은 또 다른 주체의 시작이며 또 다른 차원의 현재. 죽음, 고통, 미래 따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향유나 노동을 통한 망각조차 불필요한- 천상의 빛과 영원의 세계로의 구원... 네, 이제 그만 잘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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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있는듯 없는듯 가까이에 있고 싶을뿐 특별하게 하고싶은 말. 같은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감상하는 것으로 족하고 애써 갖고 싶지는 않은것과 같은 이치. 어설프게 마시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면. 이라니.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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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거대한 존재를 가정해놓고서, 트위터는 그 거대존재의 사유이고 구글은 기억이며 페이스북은 그것들을 연결시켜주는 신경망 같은거라 생각한다면, 그 존재는 스스로를 어떻게 자각하게될까? 또 그 존재의 일부인 나는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을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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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평면을 아무 이유없이 채우기로, 혹은 남겨두기로 결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음 그 자체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한다는 강박. 혹은 '없음', '없음이 있음'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가보다. 하는 생각이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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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빨래들을 빨아널고 방청소, 화장실 청소- 더운물로 샤워하고 어머니가 싸주신 신김치랑 라면으로 점심식사. 이 평범한 일요일이 정녕 내것이 맞나, 가져도 되나 싶을만큼 좋을줄이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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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청년 원희와 고갈비를 뜯어 먹으며 얼어죽을 진정성 타령을 한바탕 늘어놓고는 끄덕끄덕 고분고분 그래도 진정성이 짱이다 서로 치켜세우며 흐뭇한 표정으로 귀가. 달은 여전히 무심했고ㅡ 그냥 그렇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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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사진들을 정리하고보니. 요사이 사람을 꽤 많이 만났구나 싶기도 하면서, 그자리에서 했던 말들이 하나 둘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왠지 점점 창피한 일들만 늘어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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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애와 자학을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하다보면, 아웅다웅 하고있는 그 한심한 두 자아를 관전하며 혀를 끌끌 차고있는 또 다른 내가 보인다. 그 관객의 입장에 익숙해지다보면 내 의욕도 내것이 아니고 내 절망도 내것이 아닌게 되어버린다. 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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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취학아동을 위한 집중력 향상 색칠공부 교제들처럼, 그림 안에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칠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두는 것은 산만한 나 자신을 위해 배려해 둔 공간들인데, 색칠하기에 몰두하게 될수록 생각이 많아지기만 한다. 정신을 끌 수 있으면 좋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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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준비에 여념이 없으신 옆방의 작가님과 가로등 밑에서 오붓하게 담배를 피우며 인사를 나누는 자리, 자꾸만 건네받은 질문과는 상관없는 얘기들을 늘어놓고있는 내모습. 말하기 듣기에 장애가 있거나 외롭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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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면서 부끄러운 줄 몰라도 되는 것과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는것을 잘 판단하는게 중요한 것 같다. 스스로에게 뻔뻔해지고있는 것인지 당당해지고있는 것인지 그 차이를 분명하게 잘 알고있어야한다ㅡ. 는 생각이 문득 또. 아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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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은지 그른지 의심이 지나쳐 매사에 진행이 너무 더디다 싶으면, 옳고 그름을 정의하는 기준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타자들에 있지 않나 의심해봐야한다. 미천하더라도 스스로 판단하는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알아야 시작할 수있다. 나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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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쉬하고 시크하고 나이스하고 쿨한 동시대의 멋쟁이 도시의 처녀총각들은 그 이면의 부끄럽고 덜떨어지고 구차하고 감상적이며 찌질한 마음들을 죄다 어디에다 숨겨두고 털어내고 소각하는 것일까ㅡ 하고 보니 아침. 오늘도 건강검진 받으러가긴 글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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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십삼일, 급여님께서 친히 내 국민계좌로 들어오셨으나 하루도 머물지 아니하시고 나가버리셨다는 후문이다. 이제 겨우 닷새가 지났을 뿐인데, 나는 아직도 그분이 다녀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하염없이 빈 계좌만 바라보고 있... 이만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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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전시 큐레이터 선생님과 미팅. 결국, 그리고싶은 대로 그리면 되고 하고싶은대로 하면 되는거였다. 그러고보니 하늘도 저 하고싶은대로 춥다가 더웠다가 마음대로구나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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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움츠러들거나 또 활짝 열리거나 할때마가 주변 세계도 함께 쭈그러들었다가 다시 말끔하게 펼쳐지는게 확연히 느껴진다. 그게 겁이난다. 변덕스러운 마음탓에 세계가 구겨지지는 일 없도록 마음을 잘 가다듬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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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있을때에는 혼자서 뭔가 대단한 미션을 비밀리에 수행하고있는 듯 비장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데, 다음날 햇볕아래 사람들과 부데끼며 일하고 걷다보면 간밤의 다짐과 생각들이 너무나 무용하게만 느껴진다. 대체 뭘 위해? 라는질문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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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낡게 만든 낡지 않은 새것들. 일부러 어리숙하게 만든 어리숙하지 않은 똑똑한 것들. 그런 것들이 너무 많아서 불만이었는데, 누구도 뭐라하지 않으니 다들 알고도 모른척 그런가보다 싶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시대를 살고있는 기분. 새삼. 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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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꺼풀을 닫아 금새 빛을 차단할 수 있게 고안되어있는데, 왜 귀는 쉬이 닫을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
잠들기를 그만두고 이불 돌돌말아 머리만 쏙 내놓고 밝아오는 창밖을 관찰하며 잠시 누워있기로. 밤이 짧아 서운하다. 매미가 처음으로 운다.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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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던 것처럼 있고싶다
식물을 잘 키우고 싶다
기지개를 뻗을 때 처럼 찌릿하게
멈추어 자라는 것들과 유대를 나누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함께 부스럭 거리고 싶다
거미가 내려앉아도 놀라지 않을만큼 정지하고 싶다
햇볕이 닿으면 깜짝 놀라고 비가오면 젖어버려 짙은 색을 내고 싶다
정지해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점점 움직이고 천천히 흔들리는 것들은 아름답다
정지해있는 줄 알았는데 점점 자라나는 것들은 아름답다
자라나는 것을 자라게 해주는 숨소리는 아름답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만큼 작아지거나 거대해지고 싶다
그 형체를 볼 수 있을만큼 작아지거나 거대해지고 싶다
그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을만큼 작아지거나 거대해지고 싶다
무성하게 나무로 가득찬 숲에서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눈을 감고싶다
겨울 새벽 차없는 차가운 빈 도로에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장맛비를 맞고싶다
너의 몸 너의 무릎 너의 팔꿈치 그리고 너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사이에
크고 작게 그림처럼 둥글게 맺힌 반쪽짜리 곡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싶다
백미터 출발선에 서서 출발 신호와 함께 퇴장하고 싶고
내리막길을 혼자서 내려가는 축구공을 걱정없이 바라보고싶다
새벽이 다 끝나갈 무렵 블라인드를 내리고 잠들고 싶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살고싶다
나와 관계가 있는 별들에서 살고싶다
그 별에서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나와 관계가 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살고 있던 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별에서 나와 관계가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싶다
그렇게 아름다운 별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엔
마치 내가 없었던 것처럼 있고싶다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잊어버릴 만큼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고 싶다
마치 원래 그렇게 있었던 나무처럼
소외되고 잊혀진채 무한하게 바라보고싶다
어른 생활
바람이 없어도 나는 자꾸만 펄럭였다
물이 없어도 나는 둥둥 떠내려 갔다
말이 없어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없어도 나는 나이를 먹었다
기억이 없어도 나는 잊어버렸다
그리움이 없어도 나는 그리웠다
슬픔이 없어도 나는 슬퍼했다
어둠이 없어도 나는 숨었다
아무도 없어도 나는 있었다
내가 없어도 나는 있었다
그러자 나는 무료했다.
이런 파편적인 글 말고요
그리스 시대의 원자론자들은 과연 지금과 같은 극세極細-극미極微의 과학 기술의 발달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 세상 모든 물질은 결국 쪼갤 수 없는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을것이다.' 라는 말은 그저 어느 풋내기 백수가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던진 호언은 아니었을까? 전 세계 에너지를 다 끌어오는 한이 있어도, 기어코 그 궁극의 알갱이- 를 '관찰'해보겠다는 듯 혈안이 되어있는 지금의 과학자들을 보면, 음뭐랄까- 순진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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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울고 웃고 할 수 있는 그런, 우리에게 안전한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거나 만지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또 돈으로 사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가 가득 찬 세계다. 세계가 내앞에 새롭게 들어선 것인지, 원래 있던 그 문에 내가 우연히 들어선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내 예감에 이것은 원래부터 있었으며 나와 더불어 자라왔다. 이 세계의 장점은, 서로 교감하고 있는 존재자들과 그런 일종의 접지상태를 그저 향유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서로 닿아 있지만 만지고 있지는 않고, 서로 교신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이 세계의 성립-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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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나와 무관하지 않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 참 멋있다 생각했다. 무관한 세계로부터 무관하지 않은 세계로 무한하게 열린다고 하는 이미지는 멋있다 생각했지만, 반대로 무한하게 희석되어 공중분해 된다고 생각하면 왠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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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것은, 타인들과의 상대적 구조속에서 항상 끝없이 해면을 이루고 출렁이는 일종의 면적. 공간에 대한 추상 일 뿐입니다. 자기동일성은, 그것들이 흩어지지 않게, 뜬금없이 불필요한 기억들을 망각해 나가며, 중복되는 상들을 통합해나가며, 스스로 나라는 이미지가 중첩되어 농도가 짙어진 하나의 겹쳐진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망각하고 통합해 나가는 그 주체가 당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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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한다기 보다는, 글쎄요. 작가 흉내를 내고싶은 것 뿐인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에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흉내내기 뿐인지도 모르죠! 작가님 소리도 듣고싶은 것 같고.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산다죠. 풋- 가끔, 전시를 앞두고 있답시고 무슨 대단한 사업이라도 벌이는 양 투덜대고 있는 내 꼴이 우습기도 해요. 오! 어쩌면 이러한 자조섞인 멘트 역시시 '작가' 흉내내기의 한 방식인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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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찾다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저 해야한다라는 주체 없는 명령들밖에 남지가 않아요. 살아야 한다 라는 것에서조차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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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빼기 나누기. 나에게서 다른사람들과 닮은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누는거에요 나는 그들과 다르게, 계속해서 경계를 긋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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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한가요?"
"아니요 오직 잠. 뿐이에요. 잠을 잘때만 편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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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혼자 있으려고 하지만, 그리움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뿐이에요. 내가 죄라도 지었나요. 거절할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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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글자를 처음 배울때, 종이가 찢어지고 연필심이 부러지도록 손가락에 힘을 꽉 주던 그런 모습처럼- 나는 아직 이 세계가 찢어지도록 선명한 뭔가를 새겨넣고 싶은 충동이 있는가보다. 누덕도사의 수제자 머털이가, 스승님 말씀을 거스르고 무술대회에서 재주를 부리다가 왕질악 도사의 전기 지짐이를 당하던 그 장면을 잊을수가 없다. 뭐 좀 알았다고 깨방정 떨지 말라는 중요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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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때에는 아무래도, 전류가 잘 통하듯, 각자의 AT필드가 허술해져서 마음과 마음이 더 잘 전해질 수 있는 장이 형성되는가 싶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낭만적일 뿐 실용적인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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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비극적 죽음에 너도나도 눈물을 쏟아내며 감추어둔 마음들을 드러내어 고해하는 장면을 보며, 중학교 1학년때 얼떨결에 따라갔던 교회 여름캠프를 떠올렸다. 너도 나도 갑자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왠지 모를 두려움에 고개를 파묻어버렸던 그때 그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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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완전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친절하고 진취적인 사람들과 헤어지고싶다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떠나고싶다
모두로부터 외롭고 모든것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일수록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 처럼
베풀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내놓는다
안정적이고 건전한 생활로부터 도망치고싶다
계획적이고, 차근차근 이어지는 생활을 망쳐버리고싶다
뜨신 배를 두드리며 웃고있는 나의 모든 삶을 빼앗고싶다
언제 땅으로 꺼져버릴지 모르는 얇고 얕은 세상일수록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처럼
안전하고 즐겁고 어른스러우려 한다
진지한 것은 낡고 촌스럽다
눈물은 진부하고 웃음은 헤프다
젊은이는 늙은이 앞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늙은이는 젊은 사람들 앞에서 혀를 차며 젊음을 동경한다
누구도 유일해서는 안되고 누구도 동일해서는 안된다
나는 언제나 소중하고 나는 어디에서나 흔하다
복잡한 다짐
나는, 하나의 광원에서 쏟아져나와 지구상 모든 곳에서 뭉게뭉게 떠 있다가, 거대한 입김들이 셀로판지에 새겨놓은 지도를 따라, 다시 흩어져 이완되어, 우주의 나이만큼 오래된 안전한 리듬을 타고 다시 응어리 져, 뭉쳐 져, 잠시, 여기, 지금,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그래도 나인것처럼 그렇게 있었는데, 이제는 잘 보이게 싹둑 잘라놔도, 각기 다른 색의 옷가지를 걸쳐놔도, 값비싼 물건들과 친구를 해도,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어도, 딱딱하게, 무겁게, 다정하게, 대단하게, 매일매일, 순간순간, 기억하고, 감추고, 가두고, 묶어두어도, 자꾸만 먼지처럼 흩어지고, 증발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아서, 이제는 그냥 얼음을 입에 넣고 또각또각 잘근잘근 씹어 혀로 돌돌 쩝쩝 굴려 녹여 호오 하고 입김을 만들어 그것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 처럼, 불편함을 무릅쓰고 조각조각 슥삭슥삭, 문질러 비벼 가루로 만든다음 훅 하고 불어버릴 작정이다.
나는 내게
낮이 기운다
낮이 내게 기운다
나는 낮을 기운다
낡은 낮을 기운다
밤이 울린다
밤이 내게 울린다
나는 밤을 울린다
숨은 밤을 울린다
하루가 진다
하루가 내게 진다
나는 하루를 진다
무른 하루를 진다
귤과 나
귤을 먹으며, 귤의 세계를 생각한다. 귤은 귤 바깥의 세계를 영위한다. 귤은 귤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다. 귤은 나처럼스스로의 내부를 돌보지 않는다. 내가 귤 한쪽 궁둥이에 구멍을 내고,나의 일부를 흘려보내면 그제서야 귤은 상처를 자각하고 나와함께 귤의 내부로 흘러들어간다. 나는 귤의 내부에서 귤의 알갱이가, 알갱이의 수분이, 수분의 입자가 된다. 귤은 나로인해 비로소 귤의 나를 자각하게 되지만, 귤은 귤의 바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귤의 내부의 중심의 가운데에서 나는 더 힘을주어 귤의 바깥의 외부의 겉을 향해 뒤집어 깐다. 그러자 귤은 다시 또 나의 입의 목구멍의 위장의 내부의 중심의 안쪽을 향해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나는 귤의 바깥에서 귤의 내부를 외부로 만들어, 그 외부를 나의 내부로 집어넣는 동안 그것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귤을 다 먹고나서 나는 내 안에 들어앉아 두개의 구멍으로 들이치는 바깥 세계를 구경했다. 나는 내 안에서 다시한번 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귤은 나에서 시작하여 끝난 지점이었고, 귤에서 시작해서 멈추어야 하는 지점이 나였다. 또한 나의 안쪽의 바깥이 귤이었고, 귤의 내부의 외부가 나였다. 세상은 귤 아니면 나, 나 아니면 귤이었다. 귤의 세상은 나이고, 나의 세상은 귤이었다. 나와 귤을 합치면 전부가 되었고 전부는 이상하게도 안과 겉이 따로 없었다. 귤과 나는 그것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전부에 걸터앉아 서로를 먹고 또 먹었다.
거시적 미시적 사랑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피부로 실감나게 느껴보고싶다. 몸이 산만큼 거대해지면 지구 회전축에서 멀리 떨어진 적도 부근에 드러누울것이다. 무릎 사이로 지나가는 구름도 만져 보고, 엄지발톱 부근에 자란 털이 바람에 부대끼는 것도 느껴보고싶다. 지구가 나를 꼭 끌어안고 있으면 달이 나타나 슬며시 잡아당기는 것도 느껴보고싶다.
마음이 전해지는 것을 피부로 실감나게 느껴보고싶다. 몸 속 낱낱의 신경세포들 보다도 더 작게, 전기를 켜고 끄는 뉴런 보다도 더 작게, 더 작게 작아져서 궁극의 떨림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무한히 분쇄되고 싶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구름같은 전자들을 따라서 너의 마음 속에 있다가 우주의 마음속에 있다가 지구의 마음 속에도 가보고 싶다.
Jai guru de va om
액션영화보다 더 빠르고 호러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SF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이 세상 뉴우스들은 이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제, 이 세계는 나와 관계없고, 나를 해칠 수도 없는,한편의 스펙터클한 영화일 뿐─ 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아나로그 티브이시절 우리를 경악시켰던 토막살인사건따위는 공포영화의 소재로서도 이미 진부해져버렸고, 이웃나라에서 벌어지는 랜드아트급 자연재해나 전 지구적 환경재앙 소식에도 억! 소리나 하려는지. 이 작은 나라에서조차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한다는데- 그게 현실이라는데- 누가 믿을 쏘냐.
이미 더럽혀진 형들과 아버지들은, 어린 동생과 아들 딸에게 그런 현실에 뛰어들라 하고 과감하게 동참한 이들에게는 너도 이제 어른이구나─ 하며, 공범이 된 막내를 따스하게 맞이할것이다.
한편의 스펙터클한 영화를 보면서, 잔인한 장면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로맨틱한 장면에서 싱긋 웃다가 주인공의 죽음에 눈물짓지만, 영화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극장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홉시 뉴스를 보면서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고 헤헤거리며 웃다가 가끔 울상을 짓곤 하지만, 뉴스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목드라마를 기다린다.
영화가 끝나고나서, 영화 속 악당들에 분노하고 세상 끝까지 그들을 찾아내 끝장내겠다는 멍청한 사람이 없는것처럼, 뉴스가 끝나고나서 살인자를 처단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없고 집을 잃은 북극곰들을 찾아가 위로하려는 사람도 없다. 막장인 이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사람도 ─ 많지 않다
세계는 '아직도' 앞으로만 나아가려 한다.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저항하지 않는다. 자이 구루 데 바 옴- 하고 외던 주문도 효력을 다했다. 나띵 고나 체─인지 마이월드─ 라고 하지 않았나
무작정 평화를 외치던 우리의 존레넌이 무고하게- 컨피덴셜하게- 살해당한 그 즈음부터- 모던에 포스트-를 달고 달리던 서구는 이제 볼장 다 봤다는 듯 동양에 눈을 돌리고 있다. 엘리트 출신 서구가 동양 고전에 흥미를 느끼는 동안, 늦깎이 복학생차림의 동양은, 단물 다 빠진 서구의 최신 유행을 복습하기에 바쁘다. 이런 형국을 두고, '도를 아십니까?' 사람들 말마따나─ 지금은 우주의 기운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기우는 형세이니─ 우주의 가을을 준비해야합니다. 라고 말하는게 어쩌면 더 속편한 일인지도
하여간, 여하간, 우리에게는 그저, 진짜같지 않은 이 세계와는 다르게 온전히 돌아올수있는 세계가 필요하다. 부르면 대답하고, 만지면 만져지는 가깝고 실감나는 그런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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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Boney M
리얼한 순간
무심코 걷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는 것처럼
무한한 속도로 달아나는 그
순간에 여如의 세계가 있지
싶다
이따위 무거운 몸으로는
손가락 하나 끼울 수 없는
종말을 고하며 열리는 그 틈, 그
순간에 물物의 세계가 있지
싶다
순간에 리얼이 있지
싶다
추억은 방울방울
추억은 내 머리 속에 저장되는것이 아니다
겨울날의 추억은 차가운 대륙의 공기가 기억하고
여름날의 추억은 바다에서 날아온 물방울이 기억한다
지난 해 나와 함께 겨울을 보냈던 공기는
대륙을 지나 북극을 여행하고 돌아와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날의 향기와 감촉들을 내게 돌려준다
아버지의 고물상에서 만졌던 쇳덩이의 차가운 감촉들도
방문을 열면 느껴지던 코끝이 찡한 독일의 겨울 냄새도
초겨울 시청앞 광장에 누워 영화를 보며 너와 나누던 온기도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들려준다.
안전 + 제일
모두가 외롭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웃으니까 아무도 울지 못했다. 지하철엔 사람들이 읽다 만 신문이 있었고 지하철엔 신문이 읽다 만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화가는 '나는 내 작품이 너무 좋아요' 라고 말했다. 어느 사상가는 '나는 원래 나인 것을 먹는다' 라고 말했다. 한번은 웃었고 한번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연은 아름답다고 혼자 고백했을때 자연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자연에게도 아름다움에게도 나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길에 놓인 돌멩이를 발끝으로 찼을때 돌멩이는 왠일인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돌멩이에게 나는 그냥 또 다른 돌멩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지렁이가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고 있을때엔 얼마나 불안할까를 생각했다. 왼쪽으로 구부리고 오른쪽으로 구부리고 매 순간 모든 행동들이 지렁이에게서처럼 나에게도 실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렁이는 너무 위험해서 안전에 처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안전해서 위험에 처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여행
뜨겁고 간지러운 피를 가졌으면서
얼음처럼 차가운 생각들로 단단히 조심을해요.
완전한 고립 같은 걸 꿈꾸면서
망설임 없이 악수를 청하고 웃어보여요.
쓸쓸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에 오는 길을 봉쇄합니다.
목이 말라 사막을 찾아 떠나는
그런 이상한 여행.
겸연쩍
창밖이 벌서부터 매미소리 천지입니다.
조금 전까지 나랑 같이 새벽의 오붓함을 나누던
귀뚜라미는 이 소란함이 싫어 일찍 잠들었나봅니다.
혹은, 같이 울어주는 짝이 없어 겸연쩍었는지도 몰라요.
그랬나요? 입추라더니 귀뚜라미가 때맞춰 잘도 나타났군요.
낮동안은 뭔가 치밀어오르는 짜증때문에
아무일 아니라는 듯 베게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는데,
새벽에 깨어나 시간을 보내고나니 마음이 진정되더군요.
새벽은 저에게 마치 거대한 괴물로부터 잠시 몸을 피해
숨을 고를 수 있는 피난처와 같다고 할까요,
새벽은 저에게 참 안전합니다.
뭔가 일이 잘 되지 않는겁니까?
아아, 아닙니다 아무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 느껴본적 있나요,
대낮의 햇볕아래를 활보하는 인간으로서
저 자신의 그림자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감 같은것 말입니다.
글쎄요. 당신은 그렇게 까지 생각하나요? 참 별종이군요.
아. 그게, 그러니까. 저는 새벽이 좋아요.
날이 밝는다는건, 그러니까. 그것을 목격하는 일은
저에게 매우 서운한 일이에요. 아- 그러니까,
새벽 시간의 그 분방한 기분이 사그러들면
또 뭔가에 쫒기는 마음이 되어버리고...
음?
탐구생활
그것이
이천칠년이던가,
앞지르려던 생각이었는지,
쾌적한 속도로 걷고있던 길에서
비탈진 갓길로 흙탕을 퍽퍽 튀기며
미끄러져나오다가 그만 떼구르르르르-
풍덩쿵.
알고보니 지름길은 고사하고
한참을, 돌아가는 미궁이었음을-
알겠네.
世俗은 오늘 지금 이순간에도
무자비한 속도로 도망치는데
그것에 뒤쳐지면 뒤쳐질수록
야속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드디어 따돌렸다는 듯한
오묘한 쾌감이 느껴지는건 무어냐.
옷을 툭툭 털어 매무새를 가다듬고
이제 좀 달려볼까- 할법도 한데
드러눕고만 싶은 기분이 드는건 무어냐.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책을 읽다가
허리가 쑤시면 이렇게, 엎드려있다가
졸음이 오면 일어나 이렇게, 설겆이를 하고
싱크대에 남은 마지막 물기를 이렇게, 훔쳐내고
아! 하는 기합과 함께 찬바닥에 드러누워 요렇게.
하교를 알리는 중학교 벨소리랑
진심으로 울어대는 메미소리랑 들으며
저녁엔 무얼 먹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어젯밤 한강에 비치던 달빛을 찍으러 갈까 생각도 하고
읽다만 이정우씨 개념뿌리들을 더 읽을까 생각도 하고
아아 이런 생활이라면 세상 모르고도 살 수 있을것 같다.
오오 세상에 모든 시계가 멈추어버린다 해도 좋을것 같다.
아아, 일단은
어머니가 오신다고 하니,
더러운 재털이를 소각하고
곰팡이 슬은 돗자리는 깨끗이
양말과 팬티는 개어두고
새 밥을 지어놓아야지.
생각의 요要는 이러하다
나의 20대 개인사를 한 편의 자전적 소설로 혹은 한 편의 성장영화로 번역 해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나의 생에서 포착할 수 있는 중심서사 혹은 시놉시스는 이러한 것들이다. "혼돈스러운 세계상 앞에서, 순수하게 독립 된 '자아'를 획득하고자 하는 21세기의 젊은 청춘의 고뇌! 스펙터클한 예술가의 삶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동경과 도전! 하지만 계속되는 방황과 시련. 과연 그는 전체성에 매몰된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 이외의 통속소설을 서 너 편 더 쓸 수 있을 만한, 번잡스런 고민들도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크게 보면 '개성있는 자아 획득'이라는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 본적이 없다.
개성있는 자아의 획득이 내게 중요한 이슈가 되는 이유는, 세계 내 존재로서 '나'라는 개체의 '존재감'이 (지금 내게) 부재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왠지모르게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존재론적 고민처럼 보이는 이 존재감의 문제는 때때로 허무주의적 감상과 한데 버무러져,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의미없는 존재'라는 식의 결론으로 귀결되어버리곤 한다. 그러한 니힐리즘적인 세계인식은 그 어떤 희망찬 기대나 생산적인 소망들에도 찬물을 끼얹는 듯한 비관적인 결말만을 예고한다. '내일은 없다' 인 것이다. 내일의 존폐 여부와 생존이 걸린, 바로 이 존재감의 문제에서 부터 '개성있는 자아'에 대한 요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개성있는 자아의 획득의 한 방편으로서 내게는 예술이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예술가로서 어떤 것이든 의미있는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그 '의미'를 세상에 발설함으로서 의미있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세계 속에 등단, 혹은 데뷰, 혹은 도킹하고 싶은 것, 그로서 '개성있는 자아'를 찾고 세상 속에서 '존재감'을 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20대를 살며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에 대한 해법이자 비전인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자면 마치 내가 미술대학을 택하기 이전, 즉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런 존재론적 고민들에 심취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그것은 물론 아니다. 1980년에 태어나서 칼라티브이를 통해 88년 서울올림픽을 보았고, 중산층의 자녀(한국전쟁 전후세대의 부모를 가진)로서 평범하게 자라온 나에게 예술가의 이미지란, '보이는 형상을 똑같이 잘 그리는 사람' 정도였다. '고흐의 잘린 귀'로 대변되는 천재적 예술가나 광기 등의 이미지는 그나마 최신의 것이었다.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은 물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한탄한 적은 없다. 온갖 종류의 돈버는 방법에 대한 비법서들만 난무했던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왔음에도, 유미주의적 이상과 낭만주의적 비전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고 그러한 삶을 현실화 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해 다행히 자부심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 생각 뿐이라는 냉소와 심심한 위로를 동반한 그런 자부심이긴 하나...
최근 일이년 전부터 그렇게 - 지금 생각해보면 - 낭만적이고 감상적이기만 한 이유로 예술가가 되어보자 라고 마음을 집어먹긴 했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과연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전근대적 예술가상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시작한 시점의 '고흐의 잘린 귀'에서 멈춘 감성으로, 근대를 뚫고나와 포스트모던에 합류한다는 것. 게다가 '동양화과'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전통의 계승-발전'이라는 숭고한 번뇌까지 스스로 짊어지게 된 운명 속에서. 과연 어떻게 헤쳐나가야만 하는가.
나는 이러한 '착한 모범생'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일전에 한 레포트에서 <'나'와 '세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현상학적인 고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해법을 스스로 내 놓은 적이 있다. 나와 세계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이라는 것은, 곧 '당대성 회복'의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당대성 획득이라는 것은 현 시대적 맥락과의 내가 서 있는 지점과의 시공간적 거리감을 파악하는 일이다. 또한 자신감 회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시공에서 방향감각을 잃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세계 인식의 부족은 이내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세계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게 되며 그렇게 버려진 영혼은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유배시킨다. 불합리에 무감각하며 불편부당함에 대해서 무관심해진다. 파악불가능한 자연-세계는 박약한 정신에게 공포이며, 그를 더더욱 내부로 숨어들게 하거나 도피하게만 만드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계속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 세계로부터 추방된 이방인의 이미지는 구현하고 싶은 유혹이기도 하다. 나약한 영혼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포착해 낼 만한 엄두가 나지 않는 현실-세계를 마주할때마다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하기 보다는 도피하는 것이 익숙하고, 늘 낯선 취향만을 탐미한다. 끊임없이 그 낯선 것들과 동질감을 얻으려 하고 자기 스스로가 날것의 신선함을 얻었다고 착각한다. 누군가에게 그 낯선 것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절망감을 느낀다. 부딪쳐야할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내면으로 숨어들거나 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며 본질을 왜곡한다.
그러한 태도는 때로는 정신병적 우울을 동반할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나 다다-에 대한 향수를 갖게 하기도 하여, 그러한 생방식이 어떤 생산적인 창작활동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탈주자의 다리는 늘 피로하고, 언제나 위로받고만 싶어진다.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과감한 배신과 탈주의 이미지는 자기 스스로가 마치 천재적 운명으로 태어나 전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스러져가야만 하는 숙명적 존재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내가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던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 지점은 지하로 몸을 끌어내리는 무덤이며 스스로를 잡아먹고 결국 극한의 영점으로만 달려가는 블랙홀이다. 그러한 타자 흉내내기-로는 애초에 상정했던 '존재감 획득'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는 결론에 이르렀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를 향해 웅크렸던 몸을 퉁겨서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 그렇다면 온전한 세계인식을 갖게하는 혜안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역사는 더이상 과거의 역사에서처럼 단선적 서사로 기술되지 못한다. 예전의 역사가 튼튼하게 다져진 일차원의 길 위에서 한발짝 한발짝 돌다디를 두드려보며 탐색할 수 있는 역사였다고 하면, 지금의 상황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삼차원의 그물망 속에서의 사차원의 시공간감을 획득해야 하는 다차원적인 상황인 것이다. 당대성의 획득이란, 그런 의미에서 나와 세계에 시공간적으로 벌어져 있는 간극을 인식하는 일이며, 그것은 타자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것이다. '자아'에 대한 시공간적 현실적 무게감은 그러한 균형감각 속에서 차츰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허우적 거리지 않고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세계라는 지형을 또렷이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세계 속의 '나'라는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그것을 예술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일도 가능해 질 것이다.
짧은 생각
지금은 아마도, '나' 라는 지점이, 어떤 '작용'을 만들어내는 존재로서 기능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위험 앞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 것을 헤쳐 나가고 있다기보다는, 당장에 무장을 해제하고 손을 들어 그 것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지요. 다가오는 위험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내부에서 생겨나는 가벼운 욕구들에서부터, 이런 저런 관계들 속에서 생겨나는 부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같은 일상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을 맡겨버린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욕구는 충족시키고, 부담은 덜어내고, 불안은 해소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의 느낌에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처음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저 일련의 과정들이 오히려 저의 존재 자체가 대기중에 희석되어버리는 느낌입니다.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 있을 때, 공기가 나에게 부딪치며 만드는 저항감이 내 존재감을 형성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내가 그 바람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바람'이라는 비유를 썼다고 해서 당장에 '자유'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우리는 그것을 '긍정'해버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저항하지 않으면 '나'라는 지점은 의미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저항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까 말했던 그 '부담'이나 '불안'과 같은 무게감도 덜어버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바람과 같이 무심한 자연과 그 속에서 '나'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기 위한 저항 말이에요.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대 자연으로서 말이지요. 타자를 전제한 싸움이 아니기에 그 저항의 끝에 이루는 혁명도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물론 허무할 수도 있고요. 그리 기쁘지도 않을 테죠. 내가 바람 속에 꿋꿋하게 서있다고 해서 지나가는 바람이 상처를 받거나 칭찬을 해주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기서 괜히 스피노자나 들뢰즈를, 노자나 장자 이야기를 꺼내진 말아주세요. 저도 잘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