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색

행복한 순간들은 마치 빛과 같아서
그것들을 추억하는 일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무더기의 섬광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매 순간들이 발하는 빛깔들는
서로 간섭하고 투과되어
무엇이 빨강이고 무엇이 파랑인지
분간할 수 없게된다.

빛의 삼원색이 혼합되어
白색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행복의 가산은 더 짙은 행복이 아닌
눈부신 無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반면 슬픔의 감정들은
묵직한 페인트의 그것처럼
지나는 자리마다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되어
그자리에 고착되어버린다

그것들은 서로 섞이면 섞일 수록 黑으로
분명 거기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또다른 無로
수렴되어 내부에 가라앉는 것이다

헤이리

헤이리라는 곳이 애초에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이십여년 전부터 ‘기획'하여 ‘조성한’ 마을인지라, 이어져 온 역사와 전통이랄 것이 없지만, 인위적으로 어떤 주제를 가지고 테마-파크 형식의 가짜 이미지를 내세운 마을로서는, 내 기억으로는 거의 대한민국 최초가 아니었던가-싶다. 아마도 헤이리 이후 그 짭짤함을 맛 본 행정가들이 전국 방방곡곡 에 듣도보도 못한 관광테마 단지들을 조성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통일전망대나 임진각 이외에 딱히 볼거리가 없던 파주에 헤이리가 가져다 준 부가가치는 물론 이곳 주민들의 신소득원으로서 의미있는 일이었을테지만, 옥상에 올라가 이 일대를 둘러보면, 나즈막한 산둥성이마다 뜬금없고 조악하게 자리잡은 인공단지들이 주는 부조화 탓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건축가들의 미니멀리즘 한풀이 장소이기라도 한 듯 정숙한 헤이리 건물들에 들어선 경망스러운 가게들부터가 부조화.

헤이리 마을 동쪽으로는 야심차게 조성되었던 영어마을의 근본없는 유럽풍의 건축물이 볼성사납게 늘어서있고, 남쪽을 볼라치면 신촌에나 있을법한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장식된 모텔촌이, 그 너머에는 조성중인 고려역사박물관이 보인다. 성동IC 초입에는 그 부조화의 정점으로서 프랑스 남부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파주프로방스 맛고을(?)이 자리잡고 있다. 그나마 이곳의 지역적 특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곳은 아마도 파주 산업단지 옆으로 자리잡은 실향민들의 묘소가 있는 경모공원 정도일 것이다.

주말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경모공원에서 가짜의 조화를 사들고 가짜의 북한 행정구역이 표시된 경모공원 올라가 망자를 기리고, 프랑스풍(?)의 맛고을에 들러 순두부나 돈까스를 먹고, 식후경으로 영어마을에 들러 영어만 사용해야하는 유럽풍(?)의 가짜 도시를 거닐거나, 헤이리에 들러 모던한 식당에서 오뎅국을 먹고 철지난 최신의 예술작품(?)까지를 감상하고, 또 온갖 스타일로 장식된 모텔룸에 들어가 하루종일 체험했던 복제와 가상, 가짜의 하루를 되새겨볼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파주-시뮬라크르-테마파크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어쩌면, 전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임진각에 조성된 놀이동산이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이 치열하게 싸우던 전선, 최접경지역에 조성된 평화누리공원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애초에 '아이러니'가 파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날씨가 너무 좋은 나머지, 이곳에서 유일하게 근본있는, 역사와 전통을 소유한 자연풍광에 대비되어 도드라진 인위적인 도시풍경이 밉살스럽게 보였던가보다. 그래도 아직은 파주가 좋다


나라는 집채

먹먹한 하늘 잠시 훌쩍이는가 싶더니 비를 흩뿌린다. 이제 막 연두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앞산도 하늘을 뒤덮은 희뿌연 대기에 빛이 바랬다. 행여 이제 막 틔어나온 떡잎들에 중국 공장서 날아온 나쁜 액이 들까 걱정되어 옥상으로 올라간다. 삼삼오오 뿌린대로 자란 녀석들은 씩씩하기만한데, 옥상에 갇혀 휘몰아치는 사나운 북서풍 한자락에 오싹한 기분이 들어 나는 한달음에 삼층으로 내려와 이중창을 닫아 잠근다. 콘크리트 벽체 안에서 을씨년스러운 바깥을 바라보며 한없는 안도감을 느낀다.

공들여 쌓아 태풍에도 끄떡 없는 벽체. 그 안에서 느끼는 안도감. 감히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이중삼중의 안전장치. 여유가 있을때(바깥 상황이 안전할 때) 어느때고 드나들 수 있는 미닫이 문. 그런 것들이 내가 삼십오년 지은 ‘나'라는 건축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자재와 공법으로 세워졌으므로 그에 대한 자부심 또한 크고 거대하였다. 그런 대단한 자부심으로 세워놓은 건축물에 물이 새고, 틈이 벌어지고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최근에야 깨달았다.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고 만(말) 폐허를 바라보며, 이제 힘들게 벽을 쌓고 안전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물과 불, 바람을 이길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다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더 단단한 재료로 더 완벽한 성체를 쌓을 생각에 몰두한다.

내가 나에 거주하며 나라는 집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세상을 향유하는 것- 이 아니라면, 나도 너도 누구라도 마음껏 밟고 드나들 수 있는 공터가 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들어앉아있던 곳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와 그 흔적을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하여 나도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고 너도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몰라, 나도 나를, 너도 나를 ‘나’ 혹은 '너'라 지칭하거나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런 집없는 형태의 '나’, 한 곳에 거주하지 않는 '나’, 바람막이 없이 바람에 직접 부데끼는 '나’, 아무데도 없는 듯 있는 '나'의 형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 가능성을 다방면으로 검토해보고 새로운 나를 발명해보고자한다.

꽃에 대한 악의

나는 꽃의 개화를 지켜 본 적이 없다. 피어있는 꽃 앞에서만 꽃이라 불러봤을 뿐, 그것이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볼만한 여유와 인내가 없다. 꽃이 지는 것 또한 본 일이 없으니 오로지 만개한 것들에만 이름붙이고 사랑했던가보다. 꽃은 주변의 녹음과 반대되는 색으로 피어남으로서 오로지 자신에게 주목해야 할 것임을 주장한다. 하여 자신을 피어나게 한 본체의 소중함과 그 푸르름을 일순 꽃을 위한 배경으로 전락시켜버린다. 막 피어날 것들의 발육이나 시들어버릴 것들의 쇠퇴를 예감하지 못하도록 취하게 만든다. 세상은 꽃처럼 만개해 있는 완성형의 사물과 사람들만이 도드라져 보이는 일종의 야생 정원이다.

구석의 코너, 궁지의 호주머니

그림에 시간을 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 한 적이 있다. 같은 이유로 그림을 감상할 때에도 다른 것 보다 그 작품에 담긴 시간에 더 주목하게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 그리는 사람의 ‘고독의 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시간이 주는 감동은, 작가의 노고에 대한 찬사나 고통에 대한 연민과는 관련이 없다. 작가가 그 작품을 구실로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화폭 안에 들어가 안도하고 한 획 한 획에 온 신경을 쏟아붇고 그를 괴롭히던 것들로부터 뚝 떨어져나와 평정을 되찾았음에 틀임없는 그런 안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숨어 있었던 획들을 따라가다보면, 나 역시 그 획들 사이에서 그의 감정과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가 있다. 그것이 내가 작품을 읽는 유일한 방법이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무심코 어딘가로 기어들어가듯 그림에 고개를 쳐박고 색을 채우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는 시간 동안을 그림 속에 숨어 살았는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림에 이것 저것 가져다 붙이는 제목과 그에 따라오는 의미들은 어쩌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오직 그에 담겨있는 시간 뿐이다. 그림 안에 있을 때에 느끼는 평화는 물론 잠시 뿐이며, 언제고 다시 돌아 나와야 하는 것은 틀림 없는 일이다. 그림 밖에 있을 때에는 무언가에 정신을 팔려 있거나, 추위에 떨듯 불안해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림에 시간을 ‘담는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살다’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게다.

그림그림

파멸이든 죽음이든 그 다음에 무엇이 올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면에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것들을 나는 느낄 수 없지만, 그것들은 이미 나를 핥고 맛보고 냄새맡는다. 나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지하지못하면서도 그것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안다. 보이지 않을 뿐 눈 앞에 있다. 유혹하지 않지만 미혹되고마는 그런, 검정의 그림을 그리고싶다. 유혹하지 않으려면 그 검정은 백색에 가까워야 할 것이고, 미혹되게 만들려면 그 백색을 매몰차게 배반하는 짙은 흑색이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게 핥고 빨고 냄새맡을 수 없으려면 그 그림은 완전히 투명해야 할 것이다. 하여 매혹적인 그림은 검고도 하얗고 또 보이는 듯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별을 그린다

공중에 떠있는 물리적 실체로서가 아닌, 주기적으로 열렸다 닫히는 하늘에 찢어진 틈으로서 달을 바라볼 때 처럼. 밤하늘의 별 또한 미세한 구멍들이라 여기는 것을 좋아한다. 암흑물질로 무한이 뻗은 우주를 상상하는 것 보다, 단 한꺼풀 벗겨내기만 하면 다른 차원이 열릴 것 같은 장막으로서의 우주가 더 안전하고 포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대낮에 검은 천을 뒤집어 쓴 것처럼, 밤의 씨실과 날실의 촘촘함이 미치지못하는 틈으로 저편의 우주 바깥의 대낮을 상상하는 것이 재미있다. 내가 인식하는 외부 세계의 안쪽은 어떨까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즐겁다.

우주의 바깥은 하얀 여백이고 세계의 안쪽은 어두운 먹색이리라. 둘 다 한꺼번에 걷어버리거나 찢어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것을 통과하려면 물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이 되려면 뜨거워 녹아내려야 하는 것처럼, 마음 속에 느껴지는 몽우리나 더 단단하게 뭉쳐있는 생각들은 되도록 빨리 데워(그려)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우주 저편으로 자신을 흘려보낼 수 있다. 물보다 더 나은 상태라면, 아마도 빛이 되는 것일게다. 빛이되려면, 먼저 어둠을 다룰 줄 알아야겠다. 어둠은 일종의 연료와 같아서, 빛이 되고자 하는 만큼 최대치의 어둠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울컥 하고 그 어둠을 토해(그려)내면, 일순간 빛이 되어 발하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리하면 세계의 내부를 슬쩍 조명해 볼 수 있다.

아버지의 파이프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유품들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신 스스로가 특별히 아끼던 소장품이랄 것도 없는 단출한 삶을 사셨기에 따로 챙겨둘 것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이 파이프가 어쩌면 유일하게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 유아기를 보낼 때에 아버지는 자동차 기술자로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계셨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 유감스럽게도 가족들 모두다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사막여우 일화와 몇 장의 사진들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왜 살아계실 때 더 많이 물어보지 못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중동에서 시간을 보내실때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다. 젊은시절 아버지는 어떤 기질과 취향을 가진 청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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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의 옆면에는 조그맣게 HardCastle이라는 파이프 제조사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왠지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사우디 시내의 한 고급 타바코숍에 들러 이 매끈한 영국제 파이프를 집어들고 흡족해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유려한 디자인의 다른 여러 파이프들 중에서도 타바고채임버 바닥 부분에 각이 져 있어 잠시 내려놓아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마음에들어 하셨을 것 같다. 그리고 곡선이 강조된 디자인은 너무 세련되어서, 나무 외피를 그대로 남긴 디자인은 너무 나이들어보여 기피하셨을 것 같았다. 물론 넉넉치않은 주머니사정도 고려하셨을게다. 어쩌면 그곳에서는 저렴한 롤링타바코를 피우다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구입해 오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국생활을 접고 귀국하는 공항 면세점에서 뭔가 그 시절의 이국적인 기분을 추억할만한 고급의 취향을 가지고 싶으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공장에서 생산된 이십개비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내 취향은 참으로 멋대가리가 없다. 

내가 국민학생일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휴일이면 이 파이프로 안방에서 담배를 태우셨다. 담배 때문에 벽지 색이 누렇게 변한다는 어머니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느이 엄마는 맨날 저렇게 잔소리다-‘며 나에게 윙크를 날리시던 모습. 능숙하게 담뱃잎을 파이프에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담던 모습. 기린표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치익-하고 불을 피워, 파이프 안으로 수욱 수욱 불꽃을 당기던 찡그린 표정도 어렴풋 떠올랐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있던 늦둥이 아들을 위해 처음 몇 모금의 연기는 어김없이 도너츠를 만드는데에 써버리셨다. 파이프담배는 어쩌면 아버지가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이자 취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파이프에서 THIS 담배로 바꾸신 시점부터 우리 가족 형편이 조금씩 팍팍해졌던 것 같다. 

 무심코 가지고있던 파이프 속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행복이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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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단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그 행복의 과실을 찾기위해 그것이 숨겨져 있을거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그것이 감춰져있을 법한 비밀상자들만 무한히 창조해내는 과정과 다름없지않나-하는 생각을 담은 그림이었다. 모두가 ‘행복'을 찾고 있는데 사실 그 행복이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었다고 하면 너무 싱거워서 누가 찾으려 들겠는가. '좋은 것'이라고 알려진 것들 주변에는 항상 그렇게 '어렵게 획득할 수 있는 과실'이라는 식의 거추장스러운 오해들이 존재한다.

동양화에는 '일품(逸品)'이라는 미술비평 개념이 있다. 비 전문가가 보면 너무도 쉽게 그려진 듯한, 일필휘지의 그림들에게 주는 최고의 찬사이다. 쉽게 말해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정신을 담은 그림을 찬탄하는 말. 주로 화법을 두루 섭렵하고 자기 화론을 정립한, 혹은 그것 조차도 뛰어넘어 이제 무심한 경지에 이른 老화가들의 작품에 붙는 찬사이다. 이를테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 일품(逸品)이라는 것은, 그림 그 자체 보다도 그 老화가의 인생과 지적, 정신적 삶의 경지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일생을 무대 위에서 보낸 댄서가 고희의 나이에 무대 위에 다시 올라 숨을 헐떡이며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 춤의 역동성이나 리듬감을 평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삶 자체에 대한 감사와 경의의 표현으로서 기립박수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말로, 젊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대오각성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또 누군가 지천에 널린 행복이라는 열매를 마음껏 베어 물고는 나는 정말 행복하다-며 미친듯 춤을 춘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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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노력'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애초에, 젊은이들의 경솔함을 꾸짖기 위한 도덕적 훈화이거나, 꺾여 쓰러지기 쉬운 치기어린 자존심을 달래주고 기운을 북돋우기위한 격려의 차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양의 고통이었던 것이 누군가에겐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생채기일 수도 있다. 고통의 양은 그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여, 절대적인 잣대로 누군가에게 '이만큼의 고생’ 끝에 가서야 '낙樂'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행복함을 증명받기 위해) 쓸데없이 고통의 단계를 지나 올 필요가 없다. 행복은 지천에 널려있다. 단지 아무데나 있는 것을 어렵게 구했다고 생색낼 수 없을 뿐.

변명의 디테일

요즈음 우리의 화두는 <디테일>이다. 발단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해 ‘좋았어'라던가 '그냥 그래'라는 식의 밍밍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을 습관적으로 늘어놓는, 내 화법에 대한 친구의 불만섞인 충고에서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대상에서 디테일하게 표현해 낼 만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라며 불같이 항변했다. 원래 곧잘 글로 대상의 면면을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뭔가 대상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야하는 글과 달리 뭉뚱그려 애매하게하는식의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런 표현능력이 퇴화된 것 같다는 식의 변명도 곁들였다. 다음에는 대상 자체를 문제삼았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맛보는 대상의 표피적인 것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사고방식 자체를 뒤 흔들어놓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이 있는 대상이 아니고서는, 섬세하게 표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식의 이야기였다. 한번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분석해보기도 했다. 나는 작품을 창작할 때에 그 작품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관객과 대화하길 원하지 그 사이에 등장하여 왈가왈부 의견을 나누고싶지 않다. 작품 안에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에 대한 가능성이 모두 열려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작품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짓지 않지만 커다란 인상이나 느낌을 담는데에 집중한다. 그런 식의 표현을 추구하다보니 말로 생각을 표현할 때에도 완결된 생각이나 호불호가 분명한 감상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식의 장황한 해석이었다. 감상자의 입장에서도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있는 소설보다는 시를, 핵심만을 다루는 철학서들을 더 좋아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라 부연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 중심의 서양 근대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혹은 일원론/이원론에 갇혀있지 않은, 가타부타 호불호를 말하지 않는 도가적인 생각에 더 가까워지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나도 이렇게 되어버렸다-며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을 주문처럼 외며 변명하고 싶기도 했고, 비트겐슈타인의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를 인용하며 구구절절 언어 표현의 한계를 통탄해하며 감동적인 변명을 하고싶기도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이 모든 것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풍파에 견디다 못해 모난 부분을 스스로 깎고 다듬어야 했고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밋밋란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신세한탄을 하기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자책과 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계속해서 ‘재밌네’, ‘맛있다’, ‘좋다’는 식의 유아적인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고집한다’고 표현하기엔 굳게 버티어 지켜내야 할 신념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디테일한 생각들을 ‘게으름’에 대한 변명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표현에 있어서 디테일함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한 변명을 하다보니 변명의 디테일만 점점 늘어가는 형국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늘어놓은 다양한 변명들을 종합하다보면, 밍밍한 표현에 대한 일종의 새로운 미학을 정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99%

교보문고에 들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근에는 철학코너 이외에 경제쪽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최근까지 다녔던 회사에서 친했던 이과장님이 주식 공부 좀 해보라- 해서는 아니고, 순전히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에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딴식인가?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식이랄까. 자본과 경제지표가 지금의 세상을 읽는 핵심이라는 정도는 진즉에 알았지만, 그동안은 왠지 나같은 사람은 ‘세상물정에 밝은’, 혹은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것들에 무지한 것이 작가로서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관심은 들뢰즈를 읽게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가치들이 자본으로 환산되는 이 시대에, 애초에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갈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숙명에 대해 비장하게 이야기하던 대목에서 뭔지모를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투덜투덜 불평만 늘어놓을 수는 없기에 좀 더 공부를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한국에도 다녀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겨, 최근에는 몇몇 책을 기웃기웃 들춰보기도 했다. 세계적인 불평등, 상위 1%에 집중되어있는 부, 그리고 점점 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백여년 간의 세계 경제 통계을 근거로 증명해내는 것이 그의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런 불균형에대한 대안으로 고소득자에대한 과세, 상속세에 대한 누진세, 등의 실질적인 대안(하지만 여전히 현실성 없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나같은 그림팔이(혹은 월급쟁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 상위 1%와 상대적으로 열악한(?) 나의 경제적 수준을 비교해 볼 엄두도 나지 않을 뿐더러, 그럴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 또한 이 전지구적인 현상 - 정부의 철저한 기획 하에 점점 더 심화되고있는 듯한 - 을 뒤집어 엎어봐야겠다는식의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수년 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었던 아랍의 봄 시위나, 뉴욕의 ‘월가를점령하라’, 등의 운동들이 그 어떤 가시적인 결실을 맺지도 못하고 정말 ‘운동’에 그친 채 사그라든 것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한 가지만 약속해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 라고 말하지 말아달라”
- 슬라보예 지젝이 ‘월가를점령하라’ 운동에 참여하며 남긴 당부의 말

그렇지만 기왕(?) 이런 세상에 태어나 살며 겪고 있으니, 이런 세상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되는 것은 당연지사. 혁명까지는 꿈도 꾸지 않지만, 그림을 그려 먹고살겠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불평을 어떻게든 내식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게 소용없다면, 하다못해 비탄에 빠진, 혹은 그러한 일들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그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른쪽 전방

대화를 시작하면 그는 으레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그의 오른쪽 전방을 바라본다. 그것은 대화 상대가 앞에 있을 때나 옆에 있을 때나 마찬가지인데, 그가 단지 부끄러움 탓에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치 못한다거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동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화를 시작할 때 약 십오도 위쪽을 향하던 시선은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의 추상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각도도 점점 높아지는데, 존재나 아름다움 처럼 추상적 개념으로 추상적 개념을 설명해야하는 주제에 이르면 마치 자신의 뇌를 보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처럼 그의 눈은 거의 흰자로 뒤덮여버린다. 대화가 그럭저럭 잘 이어질 때에는 그렇게 눈알을 굴리는 것에서 그치지만, 이야기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잘 이어지지 않을 때 그는 오른손을 들어 공중에 매달린 무언가를 잡아 채는 동작을 하기도 한다. 마치 손으로 동그란 구멍을 만들려는 듯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모아, 역시 오른 쪽 위에 두고 상하로 흔들어댄다. 그의 이런 우편향적인 대화 습관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의 몸은 오른쪽을 향해 움츠러들어있는 상태로 굽어져있다. 마치 말을 하기 위해 읽어야 할 문장이 그의 우뇌 어디쯤에 미리 적혀있기라도 한 것 처럼 눈을 치켜뜨는 그의 행동은 그 앞에 앉아있는 상대를 그의 말에 집중하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등 뒤 어딘가를 놀란듯 돌아보게되거나 머리위 천장에 시선을 끌 만한 무엇이 있는지를 자꾸만 찾아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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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아주 오래전에 화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화초에는 얼굴이 없다는 이야기. 바라보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정면이 없다는 이야기. - 라고 누군가에게 설명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화초에 얼굴이 없다는 이야기는 화초의 얼굴은 외부로 향해있지 않고 내부로 향해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했어야 했다. 그래서 화초와 마주 볼 수는 없으며, 그것의 정면을 알게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나란히’ 있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이다. 내부를 바라보는 화초, 식물은 오로지 자신의 성장과 번식에만 관심이 있다. 햇볕을 향해 잎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나무는 옆에 서있는 나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내가 성취한 것들을 질투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외의 다른 존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몰두해 있는 존재자에게 나는 언제나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당황함을 느낀다. 아마 늘 상대방을 의식해 그들의 취향과 욕구에 꼭 알맞는 나로 변신시키다가, 그러한 요구가 더이상 없을 때 - 상대가 스스로에 몰입해 있을 때 -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는 그런 당황스러움일 것이다. 여하간 그래서 나 스스로도 몰두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되고 무엇인가에 몰입하려고 보면 몰입 그 자체에만 신경이 곤두서버려, 결국엔 아무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써놓고보니 내 박약한 집중력에 대한 이야기.

아브젝시옹

나로 하여금 지성이나 이성을 앞세워 대처할 수 없도록 하고, 오히려 나에게서 기묘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와 동시에 그 나의 욕망을 함부로 추구할 수 없도록 합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덫에 걸린 것 같이 내가 가까스로 존재를 위험하게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기묘한 체험을 ‘아브젝시옹’이라고 말합니다.

하여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확실히 아브젝시옹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을 얻었다고해서, 그 개념으로 지금의 나를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처해진 상황이 개선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자, 당신이 느끼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슬픔’이라는거요.’라고 해서 그 ‘슬픔’이라는 개념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왠지 멋있어 보이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들은 확실히 무엇에든 피해자가 되고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구실이, 위로가 되는 것 같긴 하다. 그런 취지에서 말하자면, 나는 쌩볼릭한 세상으로부터 급작스레 빠져나와, 변증법적으로 조응할 무언가를 찾지 못해 게네시스 속에서도 세미오틱한 코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상태인 것 같다.

아주 검고 멋있는 그림

외로움에 굳건한 사람들을 보면 늘 사랑에 빠진다. 감독도 연기자도 필요없는, 구경당하지 않아도 괜찮은 덤덤하고 시시한 그들의 문장들 속에서 질투를 느낀다. 어딘가로 도망칠 필요없어 일말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당연한 일주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항상 검고 매끈한 사람들과의 가졌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뒤늦게 그리워한다. 정떨어지게 아름다운 그들의 초연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그 앞에서 적당한 검정색을 찾지 못해 촌스러운 컬러를 택하고 말았던 나의 불안한 표정과 말투. 끝내 이색 저색 섞어보다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어정쩡한 회색으로 화면을 뭉게버리고 말았던 내 모습들. 그 모든 일들이 그리워진다.

검고 매끄러운 그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면 종종 아주 검은 색의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데, 그럴 때면 오줌이 마려운 것 처럼 불안과 초조에 휩싸이고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검정색 안쪽으로 도망치듯 잽싸게 뛰어들어가는 나를 보게된다. 뒤를 이어 그를 따라 들어가는 또 다른 검은 그림자와 함께.

이 시시한 추격전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나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난 뒤, 이제 정말 아무것도 가장할 필요와 의욕이 사라진 어느 날, 비로소 외롭고도 굳건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나를 구경하던 또 다른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면서 부터 시작된 이야기.

눈구멍 뒷편의 눈구멍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무한한 검정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해도, 아! 하면 아! 하고 따라붙고마는 특유의 탄성이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잦은 탈주와 추격으로 두 쌍의 눈구멍 사이의 유격이 헐거워진 탓에, 그 자리에 멈추어 있더라도 쫒고 쫒기는 모양새로 정지해 버린다.

그래서 아주 검고 멋있는 그림을 떠올릴때면, 아주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더라도 늘 착란상태이다. 가장 시끄러운 음악과 가장 조용한 음악을 분주하게 번갈아 재생시키며, 가장 추잡한 것들과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번갈아 생각해 낸다. 불을 모두 껐다가 금방 다시 켜고, 모든 것에 무심했다가 금방 사랑하게 된다.

원형불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하루가
의미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하루가
어제와 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변화와 차이가 없는, 의미 없는 하루가
나를 불면하게 한다.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알고있던 관념들로부터
그동안의 기억들로부터
물리적 신체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으며,

자유롭기 위해서는
모든 관념들에 대한
모든 기억들에 대한
모든 경계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불면은
그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 하여
차이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차이를 위한 노력에 피로를 느끼게 하니
나를 다시 불면하게 한다.

관광객

관광觀光이라는 말은 참 아름답다. 말 그대로 반짝이는 것들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빛나는 아름다운 것들은 말없이 그저 걷기만 하는데에 더없이 아름다운 구실이 되어주었다. 그 아름다운 구실조차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어느 시점엔가는, 그저 그렇게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두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러니까 보는 장치를 이고 다니는 어떤 관광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관광觀光에는 순진하고 음흉한 의도가 있었다. 외로워지면 스스로 견디다 못해 어디엔가 감추어 두었던 무엇인가를 꺼내어 보여줄 것이라 믿었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걷다보면, 고문을 이기지 못해 봉인된 그 무엇인가가 미끄덩 하고 쏟아져 나올거라고 믿었다. 감춰지고 봉인된 무엇인가가, 어디엔가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그 어디인가 하는 지점을 어느 순간에 잃어버린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어느 순간을 되찾아 줄 어딘가가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나의 관광은 스스로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협박이자, 스스로 발견하기 위한 탐험이었다.

하지만 협박은 전혀 먹히지 않았고, 탐험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뒤섞인 채 함축되어있는 시간과 공간을 다시 풀어헤쳐 펼쳐놓고, 마치 처음 들어선 것처럼, 마치 처음 맞이한 것처럼 울거나 웃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정말 웃기고 슬픈 이야기일테니까. 문득 죽거나 아직 살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싶었다. 나도 이제 그냥 지나가며 관광觀光하는 객客일 뿐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화초와 나란히

화초는 얼굴이 없다. 화초의 정면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화초 자신만이 자신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화초의 정면을 알지 못한다. 화초는 얼굴이 없다. 나는 얼굴이 있다. 나의 얼굴은 바라보고 바라봄을 당한다. 바라보는 쪽으로 열려있어서 닫힐 수가 없다. 나의 정면은 공유되므로 나는 나만의 정면을 바라볼 수 없다. 나는 완결 지어질 수 없다. 화초는 스스로 정면을 가진 채 완결되어 있다. 화초는 고독하다. 나는 고독할 수 없다. 나는 화초의 고독을 탐낼 수 없다. 나는 화초의 고독이 탐이난다. 그래서 화초를 고독하게 놓아둘 수밖에 없다. 화초는 고독하다. 화초는 얼굴이 없다. 화초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화초는 나를 바라볼 수 없다. 화초는 얼굴이 없다. 화초와 나란히 나는 고독하다. 화초와 나는 나란히 자신의 정면을 바라본다. 갑자기 화초가 눈물을 흘린다.

녹색광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빛,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 같은걸 바라 본 게 언제였던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나 달을 바라볼때면, 그 생김 탓이겠지만, 어떤 하나의 거대한 '눈'을 상상하곤 한다. 그 거대한 눈에서는 감정을 찾아 볼 수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너무나 우월해서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고 또 그래서 한없이 무정한 그런 느낌이랄까.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내가 '바라본다'기 보다는 '보여지고 있다'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 절대적인 시선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모처럼 내가 나와 함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헐거운 느낌 없이 내가 나에게 꼭 맞는 것 같은 쾌적한 기분.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뭔가가 되고 싶고, 되어야 한다는 그런, 강박적인 명사로서의 내가 아닌, 그냥 그대로 '있다'고만 말해도 좋을 그런 동사로서의 느낌. 축축하고 습한, 의심많고 연약한, 타자들의 시선이 말끔하게 멸균된 듯한 그런 보송보송한 느낌. 말이다.

속삭일 귀가 없어도 말해야겠다

기조를 잃어버린 것일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모른척 너스레를 떨며 문장을 써내려가던 그 재미를 잃어버렸다. 무엇인가 쓰지 않고 내버려두니 쓰는 마음이 퇴화해버리는 것일까. 이러다 영영 단 하나의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무엇이든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거나 그리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다행히 누군가를 만나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간의 고민들을 소상히 털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마는, 못된 버릇은 어느정도 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은 여전한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뭔가 그림을 통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쓰지 않는 것에대한 불만과 불안은 여전히 남는다.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써보도록 하려고 한다. 허세든 날조든, 의미없는 혼잣말 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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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또 한가득 들이 부었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오후 네시 쯤 작업실에 기어들어와 있지만.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 어쩌면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뭔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이 내게는 일종의 휴식인 것 같다. 일전에 보았던 영화 녹색광선의 주인공처럼 어떤 극적인 계기를 기다리며, 결국에는 그 무언가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까지를 감내하며 보내는 이상한 휴식.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에 녹색광선같은 극적인 무언가가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계기를 지어내고야 말겠지만)

하여간, 영화를 보는 내내 프랑스에 가서 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독일에 가려고 했을때도 비슷한 충동에서였다는 것은 애써 모른척 하며) 무익해보이는 주제를 가지고도 무용하다고 서로를 무시당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여 어른과 아이가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과 각박한 마음으로 서로 이기려 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납득시키려고 애쓰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영화는 영화일뿐이겠지, 하면서도 부러워서 오랜만에 '도피'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에 있건 중요한 건 마음이다. 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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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는 일련의 패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쩍 자주 하는 생각이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과 점 사이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어떤, 선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시간으로 느껴지고, 특별히 기억할만한, 어떤 사건으로서의 점이 등장하여 경로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선-운동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아무리 겹쳐져도 두께를 가질 수 없는 아주 얇고 가느다란 시간이다. 반면,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선-운동조차 없는 하나의 멈춰진 점으로 느껴질 뿐인데, 그 점에서의 시간은 닫혀있지 않고 무한하게 열려있는 공간의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게 이질적인 두 시간대에 대한 추상을 가지고 지나간 달력상의 수 개월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끝을 알 수 없이 열려있는 검은 공간 위로 유성우처럼, 순간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흔적으로서의 시간이 깜빡거리는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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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거리로 따지자면, 미술작품은 문학이나 음악에 비해 작가가 감상자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것 같다. 예술사에 대한 조예가 부족하여 그저 뜬구름 잡는식의 느낌- 일 뿐이지만, 글을 읽는다- 는 것과 음악을 듣는다- 의 두가지의 감상행위에 비해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 는 행위는 좀 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자기 전에 누워 이불 속에서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과, 화이트큐브 전시장에서 또각또각 자기 자신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마저 의식하며 감상해야 하는 작품, 그 정도의 차이, 그런 거리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뭐랄까 전시장 안의 미술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뭔가 대접받으려고 한 껏 어깨에 힘을 주고있는 모양새여서, 어쩌다 전시장에서 '나는 너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조소- 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나는 너무 똑똑해서 너희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꺼야-' 라는 식의 작품을 만나게 되어도 냉소- 하고 말게되는 그런 느낌. 그런 형편. 그런 짧은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