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있는 김대현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렇게 저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 반갑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 대학생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대화에 응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께 조금은 개인적인 저의 고민들을 털어놓고자 합니다. 대화에 앞서 선생님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었어야 함이 옳았겠지만, 솔직히, 번역된 책으로 접하는 선생님의 사상은 제겐 너무 어려웠던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그저 한명의 예술학도로서 선생님과 오늘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김대현씨가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저의 생각들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대화에 앞서, 김대현씨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 싶군요? 김대현씨는 지금 김대현씨가 살고있는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김대현씨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역시, 작가가 되려면 '세계관'이라는 것을 가져겠죠? 하지만 제가 세계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것 같습니다. 과연 이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실망스러운 대답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저에겐 이 세계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랍니다.
예 좋습니다. 김대현씨에게 세계는 '도통 모르겠는' 그런 것이로군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보지요. 김대현씨에게 이 세계는 참을만한 곳인가요? 아니면, 참을 수 없이 끔찍한 그런 곳인가요?
아, 글쎄요 어떻게 보면 참을만한 곳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끔찍하기도 하답니다. 이 세계가 참을만하다는 것은, 제가 살고있는 지금의 한국엔 더이상 전쟁도 없고 기아도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다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과거의 어려웠던 시기에 비하자면 꽤나 확실히 풍요로워지긴 했으니까요. 제가 자라온 세대에는 그런 시대적인 고난이 없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컴플렉스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네 물론, 배가부른 소리이죠. 하지만 제가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이 세계속에서 저 자신이 너무나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렸을적 언젠가부터 저는, 진부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피하고 싶어했었습니다. 진부한 말, 진부한 생각, 진부한 가치들로부터 말이죠. 개성있는 외모나 옷차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어떤 책을 평소에 읽고싶어 하다가도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리거나 하면 더이상 읽고싶지 않는다던가 하는식으로 말이죠. 고심끝에 남들과 다른 어떤 독특한 생의 슬로건 같은것을 고안해냈다고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내용의 슬로건이 텔레비젼 상업광고속에 등장하면 그자리에서 당장 그런 태도를 버리고 싶어지는 그런 것 말입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고싶고, 남들과 다른 것들을 표현하고 싶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나' 라는 사람은 독특하다고 여기고 싶은 것이겠지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김대현씨는 남들과 다르다고 하는 가치를 획득했나요?
결론은, 불행하게도 아니었습니다. 지구상에 인구가 너무나 많아서일까요?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엔, 나 혼자만 독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것 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인터넷에서 다른사람들의 블로그를 엿보다 보면, 나만의 고상한 취향이라고 여겨졌던 것들도 이미 너도나도 다 알고있고, 누구나가 꼭 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저 자신도 남들과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말을 하며 살고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조차 최근에서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랍니다. 그런 인식은 저에겐 참 고통스러운 경험이랍니다. 남들과 다를바 없다는 사실이 왜 그토록 끔찍하게 여겨지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들어, 서울에서 예술을 전공하고 있는 스물 여덟살의 남학생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교육과정을 거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지를 대부분 추측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빤히 보이는 삶을 삶을 살기 싫어서 일까요? 그렇게 저 자신이 무의미하게 느껴질때가 저는 가장 끔찍하답니다.
솔직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는 김대현씨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세계가, 제가 보았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군요. 그리고 아마 현대의 예술가들이 느끼는 어려움 역시 김대현씨가 느끼는 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대현씨가 느끼는 바 그대로, 이 세계는 모든 개별자의 고유성을 통계적 수치나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수치로 통분해버리는 고약한 특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합리성이 '관리된'사회 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인지도 모른다는 의미로서 말이지요. 아마 김대현씨도 저의 이런 생각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 거대한 하나의 수용소! 그 비유가 참 와닿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곳에서 제가 무엇을 생각해야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할지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마침 김대현씨가 제가 여쭈어보고 싶었던 것을 이야기하셨군요. 김대현씨는 예술을 전공하신다고 하셨지요? 온전한 대답을 기대하기엔 조금 이르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묻겠습니다. 김대현씨는 김대현씨가 파악한 그 끔찍한 세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예술을 통해서 말이지요.
아, 글쎄요. 제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조차 대답할 수 없는걸요.
괜찮습니다. 아마도 저의 질문이 너무 앞질러갔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보지요. 김대현씨는 현대의 많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갤러리에서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혹은 김대현씨에겐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나요?
아, 네, 아마도 저는 선생님 앞에서 좀 더 솔직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갤러리에서 느끼는 감정은 거의 두려움에 가깝습니다. 특히 '무제' 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추상작품들을 볼 때에는 거의 불쾌한 기분이 들 지경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위 잘나가는 현대의 작가들의 작품들조차도 제게는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폴록이 캔버스 위에 뿌려놓은 물감들에서도, 파울 클레가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선들에서도 저는 아름다움이라던가 어떤 감동같은것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아마도 저에게 미학에 대한 소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인 것 같습니다만. 예술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관객들로하여금 지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림 앞에 서있는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 예술가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었는지 저는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하고요.
역시 기대했던 바 대로, 솔직한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좀 더 쉽게 대화를 진행해 나갈 수 있을 것 같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대의 예술가은 바로 김대현씨가 느꼈던 것과 같은 그런 고통스럽고 불쾌한 체험을 통해서,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불쾌를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김대현씨가 이야기 하셨던 것이기도 하고 또 제가 정의하기도 한 것 처럼, 이 사회는 모든 것을 동일화 하려는 속성을 가지고있습니다. 김대현씨 역시 그런 사회 속에서 본인이 그토록 무의미한 개체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고통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술은 바로 그 동일화의 강제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사회와 구별려 하고 그것과의 차이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거부하고 의미를 파괴하고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배반함으로써, 예술은 사회와 구별되는 자신의 타자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그런 것이었군요!
소위 '합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보여주기 위해 예술은 스스로 부조리해지기도 하고, 이 사회의 '질서'라는 게 사실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보여주려고 작품에 혼돈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된며, 사회와 거리를 두고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의 비동일자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사회를 비판하는 방식인 것이지요.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지만,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술은 사회가 행하는 동일화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해야하며, 운명을 건 그 끝없는 탈주를 통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무엇으로 남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서 예술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무는 것 밖에 없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 눈을 감고 이를 악무는 것밖에 없다니요. 그토록 절실한 생각으로부터 그러한 작품들이 탄생되었다니, 그런 것도 몰랐던 저는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아, 어쨌든, 그런 이유로 현대의 예술은 그토록 '알 수 없는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로군요. 선생님의 표현대로 '타자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고통'을 체험하게 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나요?
현대 예술이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김대현씨도 모더니즘의 행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아실거라 믿습니다. 현대 예술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거부함으로서 아름다움을 기린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현대의 예술가은 바로 김대현씨가 느꼈던 것과 같은 그런 고통스럽고 불쾌한 체험을 통해서,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불쾌를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현대의 예술은 현대의 사회적 상태의 미메시스입니다. 하지만 이는 '반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사회의 부정적 상태가 작품 속의 내용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면한 그 형식 속에 침전되어진다고 보아야겠지요. 제가 아무래도 김대현씨에게 조금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 역시 제게 학문적 소양이 부족해서일 것입니다. 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현대의 예술이 왜 그런 난해한 형태여야만 했는지, 왜 제가 그림 앞에서 불쾌와 고통을 느껴야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제가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술의 운명이 사회의 동일화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쳐야 하는 그런 것이라면, 저는 좀 더 새롭고, 좀 더 알수없는 그런 것을 찾아내서 만들어내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파괴된 가상은 오로지 '새로움' 속에서만 구제 가능합니다. 이러한 미적인 진보에 참여하지 않고 과거의 조형언어를 고집하는 예술가는 미적으로만 퇴행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반동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문화산업은 언제고 대량복제를 통해 그 미적 진보를 평가절하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작품은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작품에 대한 최종적 해석이 있어서는 안되는 그런 수수께끼 말이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예술가란 왠지 이 사회에 대해서 반동적이어야 하고, 약간은 삐딱하기도 해야 하며 또 정신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엉뚱하기도 한 그런 사람이어야 할 것 같군요. 저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자 할때면 항상 그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에 부딪치고 말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러한 생각때문에, 절망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시대 이후에도 그러한 형식실험은 끝없이 이어져왔고, 20세기에 들어서 새로운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예술의 형태 역시 엄청난 속도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가는 얼마나 될까요? 또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아, 제가 정말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인지 부터 생각해봐야할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김대현씨에게 현대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현대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는 더이상 미적 주체가 아닙니다. 예술가는 그저 현실에서 진행되는 어떤 객관적 과정을 매개하는 영매일 따름이지요. 제가 생각하는 현대의 새로운 예술적 주체는 이렇습니다. 이성의 폭력성을 거부하고, 자연이라는 타자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사람, 동일화의 강박을 벗고 개별자들의 존재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비합리성을 비판할 줄 아는 탈근대적인 사람, 자신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자신 안의 자연성을 억압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 희망도 절망도 그리고 역사의 최종 목적도 섣부르게 상정하지 않는 사람. 수수께끼와 같은 그런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포작할 감수성을 지닌 그런 사람이 진정 현대적 의미의 예술적 주체입니다.
아! 역시 예술가가 되는일은 어려운 일이었군요! 현대의 어떤 예술가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 라고 했고, 또 어떤 예술가는 '모든 것이 예술품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었죠.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되려 위로가 되는것 같기도 합니다. 왠지 아무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저에겐 또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저에게 이 세계가 꼭 그렇게 '고통스럽고 끔찍한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편리하며 빠르고, 화려한데다가 재미있기도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는 디지털 전자제품들과, 매일 발표되는 생명공학적 성과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이성에 대해 찬탄해 마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즐기고 있는 입장에서, 이 세계를 '진실하지 못한' 무엇으로 보기란, 되려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일인 것입니다. 아, 선생님과의 대화를 결국, 이렇게 넔두리로 마무리하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와 함께 자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있는 고민들은, 저 자신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인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