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 하지만 조금은 더 여유로운 하루였다. 아무 계 획없는 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져, 오늘은 아침에 이런 저런 할일들을 열거하고 별 불만 없이 그것들을 잘 수행했다. 너무 자유롭게 하루 하루를 보내왔었던 것인지, 아주 작은 의무, 아주 미세한 압박, 스트레스도 마음에 도드라져 보이고, 금새 제거해야 할 무엇인 것처럼 여긴다. 계속 미뤄뒀던 그래픽 프로그램을 배우기 시작했고, 프랑스어 공부를 조금 했다. 그리고 스케치를 좀 해보았다.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건 없었지만, 습관을 만들어 나갈 수만 있다면,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처럼 하루를 몇몇 좋은 습관들로 채워나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에는 무심코 어머니를 찾아뵈러 형님 댁으로 갔다. 내심 어제 불편한기색을 보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집에는 어머니 혼자 계셨는데 차분하게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으셔서 다행이다. 이내 형님과 조카가 들어오고 형이 차려준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는 다같이 한강에 나갔다. 어머니의 보폭에 발을 맞추고 느릿느릿 걷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예쁜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다시 어머니와 형, 조카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와, 나는 따로 한시간 정도 다시 산책을 했다. 참 특별하지 않지만, 이정도면 충분하다 싶은 하루였다. 산책을 하며, 지금 만들어가는 생활, 내가 처음 일궈가는 생활 패턴을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고, 다시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단단해지기 위해, 당분간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 끌어들이고 또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래서 온통 혼돈으로 가득 찬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관계란 꼭 그래야만 할까. 그렇지 않은 관계도 가능할까. 정말 단단하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 건강하게 교제하고 싶다.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잦아들더니,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나태함, 자만, 오만함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작아진 마음 덕에 조금 겸손해졌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또 거만한 내가 나타난다. 양 극단만이 있고, 중간은 없는 것일까. 새로운 작업실에서 상큼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계획대로 착실히 일을 진행하고, 내일을 준비하고, 피곤함에 잠들던 모습은 또 금새 어디 가고 계획 없이, 많이 먹고, 피곤해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 자신.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변한 것이 없다. 좋은 점을 나열해 볼까. 요즈음 잠을 잘 잔다. 그 점은 아주 칭찬해 주고 싶다. 그리고 그림을.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고 무진 애를 쓴다. 애를 쓰는 것 만으로도 칭찬해줄 수 있다. 그림을 매일 그릴 수 있는 시스템. 그 시스템만 마련할 수 있다면 나는 아주 행복할 것이다. 그 시스템이 있다면,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엇이든 창작하고. 그 창작물을 기록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 지금 이 짧은 기록 안에서도 그림 그릴 소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가벼워짐'에 대해 갖는 죄책감. 중간이 없고 극단적이기만 한 나 자신. 오늘은 또한, 불안. 급격하게 증대되는 불안. 짜증. 그런 것을 느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잠에서 깨어 멍하니 있다가 담배를 태우고 무작정 처음 생각나는 일을 시작해버리면 그 하루는 대개 망치게 된다. 꾸준하게 반복되는 일과에서 오는 연속성이나 보람과는 상관 없이, 일단 뭔가 몸을 힘들게 해서 보람과 만족감을 얻고 또 그 이후에 많이 먹고 쉰다는 핑계로 늘어져 있다가 하루를 마감하기 십상이다. 다행히 오늘은 늦게 일어났지만 불안해 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단 십분 동안 만이라도 하루의 계획을 세워보았다. 그날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정해놓고, 그 일과를 어떻게든 맞추어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하루를 보내는 것 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또한 갑작스러운 초대나 손님이 있다 해도, 그에 맞추어 머릿 속에서 시간을 조정하고 마음에 여유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은 우편을 보내고, 주방을 청소하고 책을 읽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보람차게 보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슬슬 졸음도 밀려온다. 이렇게 조금씩, 규칙적인 일과를 늘려 갈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이메일을 쓰거나, 홈페이지를 관리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스케치를 나가거나, 또는 멀리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충동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단지 내 성향이 충동적이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나에게는 꾸준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성실성이 어딘가 여행을 가던, 해외에서 작업하던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 오늘은 정말 그 순간 순간 해야 할 일에 집중하였고, 마음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마음이 편안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좀 더 서두르지 않고, 좀 더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길거리에서 붙잡고 한시간 동안 하소연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벌레가 달라붙어도 성급히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김새를 가진 벌레인지 찬찬히 관찰하고 슬며시 놓아줄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보리차를 끓여서 무심코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라, 보리차에 숨겨진 맛, 하나 하나를 음미하며 마시고 싶다. 급하게 끓여 먹는 라면이 아니라, 정성껏 보기좋게 차린 그런 식사를 하고 싶다. 오늘은 이만 쓴다.
모처럼 여유로웠던 아침. 해야 할 일들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림을 그렸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공기, 좋은 음악. 아무 생각 없이 그림에 빠져드는 일. 얼마 만인가. 왜 이토록 쉽지 않을까. 방해꾼이 너무 많다. 왜 나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혹은 왜 나는 그토록 혼자 있고 싶어 하는가. 작업에만 몰두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인가. 사람들과 부대끼기 싫어 도시를 떠난 게 아니라, 그저 월세에 대한 부담 때문에 도시를 떠나온 것일까. 시골에 오니 이곳의 끈끈함이 부담스럽다. 나는 왜 이토록 엮이기 싫어하는가. 왜 이토록 거절하지 못하는가. 애초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 못하면서, 왜 넉살 좋은 척하는가.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나의 결정과 나의 의지로 살기 위해 결심했으니,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거절에 거절을 해야 할 것이다. 싫은 것은 그저 거절하면 되는 일이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저 형식적인 맞장구, 예의, 비위 맞추기 등으로만 모두 채워진 그런 대화, 아무런 날카로움도 엿보이지 않는 무디고 그저 그런 대화, 를 듣고 있다 보면,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보다 나은가? 우월한가? 나는 왜 혐오스럽게 생각하는가? 그런 대화가 가능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 친구들 가까이 살고 싶다. 그런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는 외롭다.
하루 편의 글을 짓겠다는 다짐이 이토록 어려운가. 하루 한 시간 그림을 그리겠다는 다짐, 하루 한 끼를 정성껏 차려 먹겠다는 다짐, 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단 며칠 규칙이 있고 일관성이 있는 삶을 지켜내는 것이 어렵다. 때로는 피치못할 일들이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고, 대게는 나 스스로 한 번쯤은 어떤가 하며 규칙을 깨 버린다.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십 년 전부터일까 이십년 전 부터일까 늘 같은 자리, 늘 게으름에 빠지고 마는 습관을 고치고 싶었고, 그게 안 된다면 내 삶은 나아질 구석이 없다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며, 늘 그렇듯 지금 또 반성하고 다짐한다. 차 한 잔도 충문한 마음가짐으로 마시도록 하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잘 보이는 몸 어딘가에 새겨 넣어도 마찬가지일까. 하여간 이런 내 모습에 늘 자책하고, 늘 비관한다. 내가 나에게 해주고픈 말은, 이 못된 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생산적이고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는 좋은 습관을 몸에 베이도록 하지 못하는 한 나는 어디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좋은 습관이 일주일, 열흘, 한 달, 석 달, 나아가 일 년을 꼬박 채워 나갈 수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 자신감이 생길 것이며, 그제야 비로소 세상에 당당히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그림도 그런 꾸준함에서, 단단함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다른 많은 것들을 희생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3월 23일(토) 오늘이 며칠이더라 하고 생각하다가도 허름한 집 어딜 고칠까 어딜 더 정리하고 청소할까 하다 보면 잊고 만다. 오늘은 그새 토요일. 영월에 다시 돌아온 지 며칠 만에 날짜를 잊고 만다. 이곳에서는 따분할 틈이 없고 답답하다는 느낌이 없다. 몸이 피곤하여 온갖 신음을 내며 침대에 눕곤 하지만, 그날 하루 충분히 노동하였다 하는 자부심에 괜히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잠은 잘 오지 않는다.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겠다는 다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일까. 괜히 욕심부리지 않고 잠이 올 때까지 깨어있기로 한다. 내일은 마음을 좀 더 내려놓고 어딘가 다녀와볼까 싶기도 하다.
마음가짐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은데, (혹은 달라졌다고 믿고 싶은지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종종 보던 사람들과의 관계들로부터 무척 소외되었지만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옆집 이선생님, 골목 어귀 신사장님, 우체국 국장님, 종묘상 사장님, 면사무소 선생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다들 따뜻하게 나를 대해주고, 그 어떤 의심의 눈초리도, 선입견도, 비판적인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안전하게 들어차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편안하다. 아마도 서울집이 다 정리되고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아, 앞으로는 무얼 하며 살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벅차오를 것이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그런 미래가 나는 가장 좋다.
영월 寧越
새 집에 들어와 자는 첫날. 지붕은 비록 곧 주저앉을 듯 하고 사방에서 벌레가 기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집이지만, 이 적막함이, 찬 공기가, 까만 하늘이 너무나 좋다. 여기에 오기로 한 것이야말로, 내가 거의 유일하게 선택한 일임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해야겠다. 앞으로 살아가며 선택하고 배우고 기뻐할 일들도 그러할 것이다. 원치않으나 억지로 하는 일,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해 선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야 진짜 삶을 사는 것 같다. 매일 노동하고 산책하고푹 잘 것이다. 그 이외에 더 바라는 것이 많이 생긴다면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징후일 것. 지금까지의 떠돌이 도시 생활과는 다를 것이다.
오늘은 밭을 일구었다. 일구었다라는 동사를 써본 것은 이번이 처음일까. 겨우내 얼었다가 봄볕에 녹아 보송보송한 흙을 갈아엎고 달걀만한 돌멩이들과 질기게 뿌리를 박고 남아있던 잡초들을 골라냈다. 흙의 감촉이 보드라웠다. 땅 속에서 낙엽과 미생물, 벌레들이 잘 다져놓아 알알이 영글어 있었다. 덩어리 진 흙을 부수면 그 안에서 청량한 흙냄새가 났다. 어릴적 흙바닥에서 실컷 놀 때나 맡아볼 수 있었던 그런 향기이다. 무려 여섯시간 가량을 일했는데, 아무런 것에도 산만해지지 않고, 다른 잡념을 떠올리지 못 할 정도로 집중하여 일에 몰두했다. 이렇게 한 가지 일에 오래도록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더러워진 옷을 털어내고 옆마을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어찌나 행복한 일이던지. 시골살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사그라들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걱정하지 말자. 부디 도시에서처럼 미래를 염려하지 말자. 어젯밤에는 모처럼 별이 많이 보였다.
여기에 와서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잊기 위해 나는 노동할 것이다. 밭을 갈고 채소를 키우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분명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머무는 마음
평창동에 새로운 공간을 얻었다. 대학교 1학년 때, 故송수남 교수님 댁 이사를 도와드리며 와 본 이후로는 처음이다. 아예 산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아직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얻어진 결과이다. 점심 무렵 간단히 산책을 갔다 오려는 마음에 길을 나섰는데, 둘레길 팻말을 따라 걷다 보니 북한산 중턱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그 참에 정상까지 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늘진 곳이 아직 얼어있어 둘레길 초입에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대단한 생각을 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나무들 곁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은 현재에 머물 때만, 깃털처럼 가볍다. 과거로든 미래로든, 마음이 시간의 축 위에 놓이면 금세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져 버리고 만다. 무거운 마음은 몸도 무겁게 가라앉힌다. 과거가 주는 무게감과 미래로부터 오는 무게감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과거의 기억이란, 현재의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나간 사건들이지만,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선택하려는 일의 합당한 이유를 과거의 자신을 근거로 찾아 명분으로 삼고자 하기에, 세상 모든 일을 논리적인 인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기 쉽다. 한편 미래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마음을 짓누른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여러 갈래 중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가려내기 위해 또 고민한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환영일 뿐이고,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가상일 뿐이다. 사람이 과거로부터 온 미련과 후회, 죄책감에 시달리며, 미래에 다가올 최선의 선택을 위해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일이다.
산책은 과거와 미래에 엉겨 붙어 팽팽해진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나무와 새, 물을 바라봄으로써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 혹은 회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론은, 자연과 가까운 이곳으로 이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
* 뜬금없는 생각
현생 인류 이전의 초고대 문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문명은 인간의 형태가 아닌 다른 종에 의해 달성되었을 것이다. 발달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인간의 형태일 것이라 믿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이듯, 지구상에 있었던 다른 문명이 유인원의 형태를 가졌으리라는 것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상상이라 생각된다. 그 초고대 생명체가 현-인류가 끝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생명-개조, 영생의 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으리라 가정하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무쌍한 지구의 생태 환경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는 생명-형태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형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세포의 형태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세포 단위의 생명이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완결된 '첨단'의 생명-형태인 것은 아닐까?
March 30, 2017
비가 내리는 하루였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지만, 새롭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릴 때 만큼은 마음이 편했는데, 그렇지 않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렇게 그리면 정말 멋질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있는 중에, 이렇게만 하면 정말 멋질 것이라는 기대가 들지 않는다. 그렇게 침울한 기분으로 이 아름다운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니, 무언가 잘못된 기분.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드는 것 조차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던 아름다운 형상들은 어디로 갔을까. 눈을 감는 것 조차 두렵고 흰 종이를 보는 것이 이렇게 두려웠던가.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그런 자유가 이토록 버거울 수가.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지 모르겠다.
March 29, 2017
날씨가 무척 좋았다. 하늘은 모처럼 푸르고 바닷물은 잔잔했다. 햇볕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바닷가 바위 위에 누워서 부드럽게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았던 것에 비해 마음은 무척 어지럽고 산만했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이것 저것 손대기만 했다. 의미 있는 그 무엇도 생산해 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마음이 움츠러들면 나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든다. 산드라는 마주칠때마다 자기 삶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털어놓는다.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에게는 위로나 격려도 소용이 없다. 나를 끌어내리기만 할 뿐. 필립은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자고 부추긴다. 자신이 늘 새롭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지- 그 또한 계속 듣다보면 지겹게 느껴진다. 마르셀은 나처럼 사람들을 피하는 듯 하다가도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엉뚱한 얘기만 하곤 한다. 이제 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는데, 지긋지긋한 기분이 드는 것이 미안하다. 아마도 움츠러든 마음 때문일게다. 사람들이 싫은 내가 문제인지, 사람들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을 평안하게 한 뒤, 일찍 잠들고 싶은 날이다.
March 23, 2017
함박 눈이 내린다
산이며 바다며, 자동차며 나무며,
사물을 나누는 경계를 다 털어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듯
바지런히,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쉬지않고 떨어진다
나는 따뜻하고 튼튼한 방 안에 앉아
하얗고 까맣게 변한 세상을 바라본다
원래의 색과 형태를 잃고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린 세상을 바라본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의 장난을 즐겁게 관전한다
이대로 다 덮여버렸으면 좋으련만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와 하늘길이 하얗게 지워져
하는 수 없이 이곳을 집으로 삼아 머물면 좋으련만
다시는 계절이 순환하지 않아
늘 희고 검은 풍경만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세상은 너의 말처럼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해
푸른 세계는 나를 절망에 빠트리고
붉은 세계는 나를 춤추게 해
너와 함께 하는 붉고 또 푸른 세상을
나는 언제쯤 행복이라 여기며 누릴 수 있을까
March 23, 2017
오늘도 새벽 여섯 시 전, 하루를 시작한다. 열시 전에 잠들어 다섯 시 즈음 잠에서 깨 한 시간 정도 늑장을 부리다 일어나기. 아침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 뭔가 생산적인 아침을 보냈다는 생각에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오후엔 새로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다음 날을 위한 스케치를 미리 해 두고 자는 것. 그런 습관만 들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저녁에 운동을 할 계획이었는데 그건 포기했다.
아침에는 의뢰받은 일을 했다. 솔잎, 버섯, 등 여섯 가지 식물을 그리는 일인데, 머리를 복잡하게 쓸 일 없이 무심히 묘사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아침에는 여느때와 같이 산드라와 담배를 피웠다. 함께 시간을 맞춰 피웠다기 보다는, 언제나 처럼 그녀가 먼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급적 혼자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아침부터 힘 빠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역시나 그녀는 오슬로의 학교로부터 거절 통지서 얘기를 늘어놓는다. 또 자기 작업에 대한 불확신, 작가로서 자신감이 없다는 이야기. 거의 매일 듣다보니 응원해 줄 마음도 더는 나지 않아 건성으로 듣곤 했는데, 오늘은 홧김에 그녀가 가진 재능과 가능성을 웅변하듯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기분이 좋았는지 담배를 한 개비 더 말아 피우고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뭔가 자기도 이미 알고 있는데 다만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었던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이라 기운이 조금 빠졌지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래도 응원 해주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의뢰받은 책 표지 스케치 작업을 했다. 심리 치료에 관한 이야기인데,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기존의 내 그림의 주제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기존 그림과 다르게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비슷한 주제로 너무 많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큰둥한 마음으로 그렸으나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중간에 필립이 들어와 어제 그리다 만 그림들을 칭찬해 주었다. 나름 새로운 시도랍시고 해보다가 영 어색해서 책상 위에 던져두었는데, 칭찬을 듣고 보니 다르게 보인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싶으면서도, 또 그만큼 어렵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게 느껴진다. 마음을 좀 더 비우고, 그때 그때 해보고 싶은 시도들을 적극적으로 풀어 내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일기를 쓰다가 졸리면 잠들 계획이다. 지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경계한다. 오늘 오후에 두 시간 쯤 햇볕이 작업실을 환하게 밝혔다. 그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 한 걸 보면, 적잖이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올빅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해 물었을 때, '행복은 태양'이라고 대답한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March 21, 2017
어제는 함박눈이 오더니 오늘 밤엔 비가 세차게 들이친다.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엉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엉망일 것도 없다. 나에게는 어떤 감정들이 남아있는지 가만히 살펴본다.
그리움. 그리움은 문득문득 찾아온다. 왁자하게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빈 속을 채우려 서울 종로 뒷골목 어딘가를 헤매고 다닐 때 나던 냄새라던지, 행복에 겨워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던 너의 모습. 천진난만한 미소. 그런 것들이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 온화한 장면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다. 무엇이, 어떤 냉혹한 결심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문득 문 밖에 나설 때마다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디일까?를 의심한다. 따뜻한 한끼,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맵고 짠 음식, 온화한 재잘거림, 따뜻한 방바닥, 그런 것들로부터 어떻게 떠나올 수 있었을까? 그 착한 마음씨들을 나는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좇아 가는 것일까. 그것은 자유일까? 명예? 성공? 혹은 자존심?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난 이 년간의 삶을 부정하고서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그것부터가 난관이다.
삶은 어쨌거나 잘도 흘러간다. 이상하리만치 순탄하다. 삶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쾌적하다. 걱정할 것이 없다. 어쩌면 걱정할 것이 없어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걱정거리가 될 만한 것이 만에 하나라도 나타나면 내 마음은 그리로 가 철썩 달라붙는다.
어제는 헤르만 헤세의 '방랑' 수기를 읽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 헤세는 나무에, 산에, 물줄기에 감탄을 늘어놓는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주방에 내려왔는데 마침 필립이 거기에 있다. 언젠가 알프스 산맥을 따라 장거리 하이킹을 떠날 계획이 있는데 함께 할 생각이 있느냐 묻는다. 어찌된 일일까. 요즘 들어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마치 앞으로의 내 삶이 이미 어딘가에 치밀한 각본으로 정리되어 있는 듯 하다. 작가는 연극 속 주인공이 의심을 품지 않을 정도만큼 우연적인 사건을 섞어놓지만, 가끔 이렇게 필연을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실수로. 어쨌든 참으로 멋진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계획을 따라 움직이는 것일테니, 기분따라 움직이는 '방랑' Wanderung은 아니겠지만, 수 백만원 돈을 지불하고 뉴욕에 가서 살아보겠다 하는 계획 보다는 멋진 계획임이 분명하다.
방랑도 멋진 계획이다. 무한정 걷는 것이라면, 나 역시 자신이 있다.
March 20, 2017
지난 주말에는 오늘까지 끝내야 할 작업들이 있어 조금 바빴다. 하지만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어딜 가야 한다거나 어떤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거나, 마음가짐을 달리 해야한다거나 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어젯밤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여기 온 지 한 달이 지나고나서부터는 창밖의 풍경에 조금 무심해 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창밖의 풍경은 늘 경이롭다. 방에서 올려다보이는 높은 산이 하얗게 뒤덮였다. 산 정상 부근에는 짙은 안개가 껴 있어 더욱 신비롭다. 나는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며 나뭇가지에서 이제 막 떨어지는 눈덩이를 바라본다.
Francois-Joel Thiollier 씨가 연주하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을 듣는다. 듣다가 문득 나의 그림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분위기를 그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더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싶다.
March 17, 2017
올빅은 여전히 흐리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 해가 나고, 나머지는 주야장천 비가 내린다. 어제는 낮잠을 조금 자고 아침까지 그림을 그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밤새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로부터 점차 단절되고 있다. 혹은 나 스스로 단절시키고 있다. 몇 년 전에도, 또 그로부터 몇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기분. 조금 지나면 아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 기대하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느낌. 혹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어디로든 옴짝달싹 튀지 못하는 딱딱한 내가 녹아내리고 또 무화 되는 느낌. 방랑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선명한 경계도, 묵직한 무게감도 필요치 않다. 그때그때 다른 모습이어도 상관없으리라. '나'라는 건 이토록 불명료하고 또 가변적이다. '나'로서는 이런 흐리멍덩하고 불명료한 상태가 무척 편안하다.
반면 특별한 관계는, 깊은 관계는, 오래 지속한 관계는, 하나의 성격을 가진, 상대방이 기대하는 올바른 '나'의 상이 생겨버리고, 또 그 기대를 저버리기가 무척 어렵다. 어쩌면 그렇게 무한한 신뢰를 갖고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 '나'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숙한 인격', '어른스러움'인 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잘 녹아든,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라는 말에는 늘 그 자리에서 가정과 사회를 위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어른'이라는 자가 이랬다저랬다, 혹은 무책임하게 자리를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성격을 바꾸어 버린다면, 신의를 져버렸다거나, 덜 성숙하다거나, 철이 덜 들었다는 얘기를 듣기 십상일 테니까.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긴장을 조금씩 풀리는 듯한 하루. 내키는 대로 하루를 보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어깨에서부터 등까지가 시큰거려 그림을 오래 그릴 수 없다. 누워 있어도 편하지 않다. 스트레칭을 조금씩 해봐야겠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겠다.
Naglaklepp
하지만 어제 필립과 산에 다녀왔다. 그저께 짜증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점심때까지만 하더라도 외출할 마음이 없었는데, 하늘이 무척 파랬다.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날씨도 그제만큼 춥지는 않아 보였다. 밥을 먹기 시작할 때쯤 지친 표정의 필립이 들어왔다. 지난번 산행 이후로, 그리고 몇 번의 낚시 실패 이후로 새로울 것이 없었던지라,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왠지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싶기도 해서 함께 산에 가자고 했다. 처음엔 시큰둥한 것 같더니, 출발할 때 즈음엔 신난 표정의 필립. 나이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데, 마음은 영락없이 십 대 소년 같다. 새로 작가들이 입주한 이후로, 달라진 분위기에 대해서, 작업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오랜만에 나누며 산을 올랐다. 지도상에서 보면 Naglaklepp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를 향해 약 800미터 고지를 오르는 길이었다. 처음엔 그 높이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중간중간 필립이 진행하고 있는 사진작업을 도와주며 쾌적하게 산행을 했다. 꼭대기까지 가볼 생각이 있냐는 말에, 오기가 생겨 그러자 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눈을 밟고 올라가다가, 정상 부근에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올라가야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한 걸음 내딛기도 쉽지 않았다. 푹푹 빠지는 눈에 정강이 아래가 좌우로 뒤틀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냉기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발은 꽁꽁 얼어붙기 시작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니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한 햇살을 받는 하당거 피오르의 전경이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서편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허연 눈을 뒤집어쓴 산맥은 햇빛에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반대편 하늘이 매우 아름다웠다. 푸른회색빛의 하늘에서 보랏빛으로, 핑크빛으로, 다시 대낮의 푸른 하늘빛으로 이어지는 하늘색 아래로 분홍빛의 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바다는 청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색감의 조화는 본 적이 없었다.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추위를 더는 견딜 수 없어 간단히 요기를 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는 곧장 하산했다. 어제는 그렇게 산에서 내려와 쓰러지듯 하루를 마쳤다.
오늘은 아주 평화로운 하루였다. 점심부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일기예보대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작업 중이던 그림을 마저 그리는데 숨이 가빠왔다. 한국에 두고 온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이내 무거워지고 가슴이 아프다. 어쩌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잉크로 그리는 그림이 갑갑하게 느껴져서 새로 사 온 부드러운 콘테로 그림을 조금 그렸다. 마르셀의 방에서 가져온 환자용 침대(마르셀의 방은 오래전에 의사의 진찰실로 쓰이던 곳이다.)를 창가 난로 옆으로 옮기고, 그 위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버드란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권태'에 대한 장이었다. 읽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느꼈던 권태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부류의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보니 현관 앞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빗자루로 눈을 치워내다가 무심코 눈사람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세 시간 동안 눈사람을 만들었다. 모두가 좋아했다. 필립은 아끼는 위스키를 한 잔 내주기까지 했다.
별달리 한 것은 없지만, 마음이 여러모로 넉넉한 기분이다. 내일이면 한국에서 떠나온 지 한 달이 된다. 이곳 주인 한스 씨는 내가 도착 한 날, 한달 쯤 지나면 쫓기는 듯한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질 거라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듯싶다.
March 06, 2017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바람 때문인지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꾸만 하이킹을 가자고 하는 필립을 보고는 거의 짜증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집중해서 작업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이킹이 작업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변을 늘어놓는다. 한편 산드라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 작업실 문을 두드리며 담배를 같이 피우자고 한다. 평소 같으면 넉살을 부리며 웃어넘겨 버렸을 일에도 신경질이 났다. 모두가 나를 방해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지 않겠다고,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작업에 집중하고 싶을 뿐인데, 행여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나를 인식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사실은 사교성이 떨어지는 것이 맞다. 남들보다 사교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인데도 사교적인 사람인 척 보이느라 노력한 날들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저 남들보다 비-사교적임을 인정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바람 소리가 이토록 클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창문을 닫아 놓고 있어도 바람이 만들어 내는 파도 소리가 쉴새 없이 들려온다. 파도는 어딘가 부딪쳐 사그라지지 못하고 쉴새 없이 일렁인다. 셀 수 없이 많은 파고가 솟구쳤다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마치 바람과 물의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듯 살벌하다. 한편 산을 넘어온 바람은 산정을 덮고 있던 얼음과 눈가루를 쓸어내고 전속력으로 절벽을 타고 내려온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 사이로, 거대한 바위틈을 지나며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장자가 말하듯, '하늘의 퉁소 소리'라 하기엔 너무 거칠고 또 무시무시하다. 문밖을 나서면 바람의 위세에 놀라 몸과 마음이 절로 움츠러든다. 이런 거대한 자연 속에서 매일 이렇게 거센 바람을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바람이 잦아들고 햇빛이 온화하게 비치는 날이면, 자연으로부터 외출을 허락받은 기분, 어쩌면 거의 용서받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엔 하늘을 향해 고맙습니다 절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고 거대한 도시로 떠나게 되는 것일까. 이곳에 오니,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오늘은 2월 17일에 보았던 바다를 그렸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느낌이 좋았고 수면 위의 물결이 아주 매끄럽게 느껴졌었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오후의 햇볕이 수면 위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수면에 반사되어 그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오늘의 바다는 어떨까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채비를 단단히 하고 해안가 바위로 올라가는데 하마터면 바람에 떠밀려 미끄러질 뻔했다. 파도는 거칠었다. 탁 트인 하늘 여기저기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풍랑이 솟구쳐올랐다. 솟아오른 파고는 바람에 잘게 부서져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이런 바다를 그릴 수 있을까. 이런 바람을 그릴 수 있을까. 어서 그려보고 싶다.
베르겐 여행
이틀간 베르겐에 다녀왔다. 재료를 사러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다른 친구들과 원치 않는 전시를 보러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립은 서운해하는 눈치이다. 그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친구이다. 다 같이 하는 일을 누군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할 것은 무엇인가. 이곳까지 와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휩쓸려 다니기 싫었다.
베르겐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것이 없었다. 되도록 천천히 둘러보고 싶어, 하룻밤 머물 곳을 예약해두고, 맛있는 곳, 가보면 좋을 곳을 찾아보았다. 하나같이 해안가의 세모꼴 나무집들 사진과, 어시장,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들이 검색되었다. 비가 많이 내리고, 물가가 비싸다는 얘기 일색.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잠시 이들과 떨어져 홀로. 또 홀로 있고자 떠나는 것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떠나기 전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기대와는 상관없이 최근 들어 재발한 불면증이다. 차라리 무엇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잠을 청하려 누워있기만 다섯시간 째, 결국 그대로 일어나 첫차를 탔다. 버스에 올라타니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늘 바라보던 산 너머 풍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 너머 마을에는 올빅보다 더 큰 마을들이 피오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골에 살다가 도시 풍경을 처음 본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버스는 하르당에르피오르의 산모퉁이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서쪽 끝까지 이어졌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나 싶은 곳에도,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으면 그곳에 집이 있었다. 특이하게 이곳 지붕에는 잔디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더니 스키리조트가 있는 근방을 지날 때는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른 겨울나무는 흰색 옷을 입고 있었고, 푸른색 전나무들은 무거운 눈을 이고 있었다. 환상적인 설경이었다. 스키는 탈 줄 모르지만, 아무 곳에나 내려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베르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눈꺼풀은 무겁고, 세시간 동안 좁은 의자에 끼어 있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어비엔비를 통해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가격에 비해 좋은 곳을 얻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여장을 풀자마자 졸음이 쏟아졌지만, 이틀 중 하루의 낮을 허비해 버릴 수는 없었다. 가벼운 에코백을 메고 나와 거리를 걸었다. 대강의 방향만을 확인하며 무작정 걸었다. 오늘날 베르겐이 있게 한 항구 주변의 수백 년 된 집을 둘러보았다. 과거에는 국제적인 한자동맹의 무역항으로서 위세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여, 열 채 남짓의 건물만 옹졸하게 모여 있었다. 건물들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져 있어, 마치 사방으로 포위되어 도망칠 곳이 없는 듯 보였다. 어시장으로 유명한 곳은, 개점시간이 멀었는지 한산해 보였다. 관광시즌을 앞두고 이곳저곳 공사하는 곳이 많았다. 한적한 주택가를 거닐며, 이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젊은이들은 어디론가 분주한 걸음으로 사라졌고, 노인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린아이들보다 유모차에 실려 가는 아기들이 더 많이 보였다. 파리에서 느꼈던 것처럼, 유독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내게 있어 '유독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란, 아주 천천히 걷는 사람이다. 아주 천천히 뒷짐을 지고 땅도 보고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며 걷는 사람들 말이다. 사실, 사람들의 면면을 관찰하기엔, 거리가 너무 한산했다. 어느 순간, 거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놀랐다. 비 오고 난 뒤 서울의 주택가 뒷골목에서 느꼈던 것 같은, 일상적인 느낌이 주는 서늘함이었다. 바로 지난 주, 올빅의 레지던시에 들어온 지 삼 주째 되던 날 느꼈던 공포와 어쩌면 비슷한 느낌. 새롭던 것에 익숙해지는 순간,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일상적인 것으로, 무채색으로 순식간에 퇴색해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마치, 처음 와본 곳임에도, 그곳에 몇 년 살았을 때 느낌을 미리 느껴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도망치듯 주택가를 빠져나와 다시 도심으로 들어왔다.
쇼핑센터와 식당이 밀집한 곳에 와서는 밥 먹을 곳을 찾아다녔다. 미리 검색해 본 몇몇 식당의 위치를 확인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생일이라는 핑계로 비싼 가격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관광객으로 붐비는 레스토랑에서 홀로 비싼 저녁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금 외진 곳에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고 싶었다. 숙소 주변에 작은 가게들이 많았던 것 같아서 다시 집 쪽으로 돌아갔다. 어느 식당에 갈지 망설일 수 있을만한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찾아간 곳은, 스페인식 요리를 하는 작은 반지하 식당이었다. 생선요리를 먹고 싶었는데, 마침 생선요리 전문점이라는 듯, 메뉴판에 그려진 커다란 생선 그림을 따라 들어왔다. 나는 '구운 채소'와 '오늘의 생선'요리를 주문했다. 오븐에 구운 흰 살 생선요리와 샐러드가 나왔다. 어쩐 일인지 구운 야채가 생선보다 더 맛있었다. 따뜻한 음식에 맥주까지 마시고 나니 온몸이 나른했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 열한시였다. 무척 외로웠다. 술을 한잔 마시고 싶어, 다시 집을 나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따라 왔더니, 낮에 들렀던 화방 근처 클럽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였다. 늙은 남자들이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었다. 클럽을 지나가니 또 다른 선술집이 있었다. 가게 이름은 Three Lions. 창문 너머 통기타를 연주하는 가수의 모습이 보였다. 짧은 머리의 금발 남자는 어디선가 들어봤던,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을 법한, 90년대 히트곡들을 부르고 있었다. 빈자리가 많은 한산한 테이블마다 나와 같은 외로운 남자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고개를 무대 쪽으로 고정시키고 앉아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찾아온 지역 사람들은 딱히 할 말은 없는지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끔씩 술을 입에 가져갔다. 아는 얼굴이 나타나면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흥을 돋워보려고 조금씩 몸을 흔들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들도 내가 아까 낮에 느꼈던 그, '익숙함'이 주는 공포를 떨쳐내 보려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왜 왔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을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낯선 이방인에게서 그 이상을 궁금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늘 그 이상을 궁금해 하길 바란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먼저 조용히 듣는 편이다. 많이 듣고 그에 대해 많이 물어본다. 상대방은 신이 나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정장 나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물어보지는 않는다. 나는 상대방이 궁금해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잘 못 하는 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나는 호감을 느낀다. 한 잔을 더 마실까 하다가 그렇게 조촐하게 홀로 생일을 기념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홀로 있기 위해 왔다.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 그뿐이다. 외로움은 나에게 익숙한 것, 견딜 만 한 것. 이라 생각했다. 물론 견딜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은, 홀로있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지만, 물론 더는 외롭지 않아서 좋은 일이다. 오늘 같은 날 누군가와 함께 거리를 거닐었다면, 분명 더 많은 것들을 감상하고 더 많은 것들에 감탄했으리라, 그래서 더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나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홀로 있어서 느끼는 외로움도, 함께 있어서 느끼는 부담감도 다 느껴본 적 있는, 와 본 적 있는, 익숙한 감정이다.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난 터라 정해진 체크아웃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아직 서너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시내를 다시 둘러 볼 생각은 없었다. 어딘가 편안한 카페에 틀어박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한다니, 나는 매우 자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정리가 꼭 필요할 만큼 복잡한 생각은 없다. 단지, 잠시 멈추고 싶은 욕구가 늘 따라다닌다. 어디엔가 조용히 머물면 좋은 생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늘 있다. 조용한 곳에 대한 갈망이랄까. 조용한 올빅에서도 나는 더 조용한 시간을 찾고 있지 않나.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곳은 Bergen Kunsthall이었다. 노르웨이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물론 뭉크가 빼놓을 수는 없겠다. 작품 수는 오슬로의 네셔널 갤러리와 비슷했지만, 시설은 조금 낙후된 듯 보였다. 작품은 무척 좋았다. 특히 내가 매일 보고 있는 피오르 풍경을 작가마다 조금씩 다른 화풍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대표 작가로 꼽힌 Johan Christian Dahl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바다에 대한 표현 연구, 구름에 대한 표현 연구 작품들이 아름다웠다. 특히 야경을 그린 작품이 많았다. 구름 뒤에 숨어서 먼 곳의 풍경을 밝히고 있는 달빛을 아주 잘 표현한 그림을 보고 있자니,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림에 풍경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면서도 망설였던 나에게,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는 장소를 그리면, 그것 장면 속에 나의 정서가 담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 정서가 잘 표현되었다면, 그 마음이 담겨 보는 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라는 믿음을 얻고 돌아왔다. 풍경에 감정을 담는 법. 그것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서야 생각난 것인데, 음악가 그리그에 대한 장소들을 찾아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March 03, 2017
일기를 쓰지 않은 채 이월에서 삼월로 넘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려 해도, 매일 비슷한 일과의 반복인지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옆방 작업실을 쓰던 나이 라는 친구가 떠나갔고, 어제 독일에서 온 마르셀이 그 방을 차지했다. 산드라가 핀란드 여행에서 돌아왔고, 미국에서 예순이 넘은 멋쟁이 여류화가 에바 씨가 새로 입주했다.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되는 시기여서 마음이 조금 어수선했는지, 지난 일주일 간은 뭔가 리듬을 잃어버린 듯 산만했다. 늘 감탄하며 바라보던 창밖의 산과 바다를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을 보는 사람처럼 무심코 바라보았다. 편안하게 풍경을 그리던 마음이 새로운 기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조급증으로 번졌다. 기상 시간은 조금씩 늦어졌고, 저녁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쓰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일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이다. 레지던시 친구들이 모여서 다른 마을의 전시장을 가자는데, 영 내키지 않아서 마치 원래 세워둔 계획인 듯 내일 베르겐으로 떠날 것이라 말했다. 하루 이틀 정도 익숙해진 전원 풍경을 떠나 도시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종종 레지던시에 지원하게 된 계기에 대해 얘기할 때면, 복잡하고 시끄러운 관계들로부터 잠시 떠나서 혼자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하는데, 사실 이곳에 홀로 고독하게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슷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정든 곳을 떠나 이곳으로 찾아온 작가들이기에, 어쩌면 더 강한 연대감으로 묶인 관계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서른여덟을 축하하는 생일 파티를, 고맙게도 사귄 지 한 달도 채 안 된 이곳의 친구들이 마련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종종,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타적이고 또 너그럽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오늘 또 그렇게 느끼고 만다. 나는 왜 이타적이지 못한가를 생각하는 밤.
February 21, 2017
비가 바람에 떠밀려 창문을 두드린다.
무사히 추락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욕심은 없었다는 듯
창문을 두드려 내 평온을 깨뜨릴 의도는 없었다는 듯
저들끼리 무리 지어 창틀 아래로 도망치기 바쁘다.
바람이 창문을 잡아당긴다
손잡이를 돌릴 수 없다면 통째로 떼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창문 주변을 맴돌며 저들끼리 위우- 위우- 웅성거린다
자신의 힘으로 할퀴지 못할 감춰진 무언가가
창문 안에서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는 것처럼
너무 크고 무딘 자신의 발톱을 한탄하며 떠나간다.
창밖엔 가로등 불 몇 개가 폭풍의 그림자를 비추고 서 있다
기대어 얌전히 흘러내릴 기둥을 찾지 못한 빗방울들이
멈출 줄 모르는 이 성난 괴물의 긴 털을 따라 춤추듯 나부낀다
두려움 없이 서 있는 저 가로등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괴물의 발끝도 보지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으리라
보지 못하는 것 보다 두려운 것은 없으리라
땅에 묶여 도망칠 수 없는 나무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가지를 제멋대로 움직이고
기억을 잃어버린 노인처럼 고개를 덜덜 떤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처럼 어딘가를 가리킨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모든 방향을 가리킨다.
오늘 나는 경계가 없는 두 사람을 그렸다
경계가 없어서 둘이 하나인 듯 보이는 그림을 그렸다
둘이 하나있듯 지내다가 하나와 하나가 된 우리를 생각했다
우리는 늘 경계를 지우기에만 골몰했다
웃기게 생긴 끌로 경계를 벗겨내거나
낙천적인 손톱으로 그 경계를 잡아 뜯었다
경계와 가장 거리가 먼 색을 덕지덕지 발라버렸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우리의 경계는 그래서
얼얼하고 화끈거리고 간지러운가보다
내일은 김치를 담궈봐야겠다